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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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권장/추천 도서와는 사뭇 다른 벌거지님의 추천 도서 목록을 보고 하나씩 구해서 읽어보는 중입니다. 먼저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심농의 '누런 개'를 읽었습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5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인데 5편 모두 판이하게 다른 느낌을 줍니다. 개인적으로는 타이틀 작품인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물 같은 '생존 시간 카드'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효율적인 식량 소비를 위해 각자의 생존 시간을 제한한다는 발상이 1900년대에 나왔네요.) 이 작품이 아이들의 순수함을 그려낸 '칠십리 장화'와 같은 소설집에 있다는 것도 경이롭습니다.
마르셀 에메의 책을 몇 권 더 구입해서 볼 생각인데 걱정되는 부분은 혹시 이 책이 마르셀 에메의 베스트가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쥐스킨트가 쓴 글중에 가장 좋아하는 책은 향수, 좀머씨 이야기, 비둘기, 콘트라베이스가 아니라 단편소설집 '깊이에의 강요'에 들어 있는 타이틀 작품 '깊이에의 강요'와 '승부' 였거든요.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충격을 받아서 나머지 작품을 모두 구해서 읽어봤는데 다소 아쉬워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혹시 마르셀 에메의 작품에 조예가 깊으신 분께서는 추천 부탁드립니다.
오래 전에 셜록 홈즈를 하나씩 파다가 아쉬운 점이 있어서 추리소설에서 손을 땐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스커벌의 개'를 연상하는 '누런 개'를 다 읽고 역자의 글을 살펴보니 역시 메그레라는 탐정을 내세운 시리즈 물이었군요. 오랜만에 읽기도 했지만 먼치킨 캐릭터가 종횡무진하는 셜록 홈즈와 다른 느낌이라서 괜찮게 읽었습니다. 몇 작품 더 읽어보고 싶네요.
제가 읽은 문학동네에서 번역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보다 벌거지님이 읽으신 책이 더 나은거 같아요. '생존 시간 카드' 보다는 '시간 배급 카드'가, '칠십리 장화' 보다는 '하늘을 나는 장화', '속담' 보다는 '격언'이 내용을 잘 표현하는 더 나은 제목이라고 생각되네요. 아, 그리고 추천해주신 책들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읽겠습니다.
본래 이세욱씨가 번역을 잘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성귀수씨와 더불어 특급 불문학 번역자로 여깁니다.
다만... 이세욱씨는 한국어를 사용하여 번역할 때 "정역"을 하려는 고집이 있습니다.
항상 보면 프랑스어 원문을 한국어로 옮길 때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유사한 단어를 고릅니다.
한국 사람에게는 잘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프랑스어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속담"으로 직역되는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한국 사람에게는 "격언"이 더 어울릴 수 있는데,
이세욱씨는 굳이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서 "속담"이라고 번역하는 고집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런 식의 번역을 고집하는 사례로는, 영문학 특급 번역자이자 소설가로도 활약하는 안정효 선생도 있죠)
제가 읽은 '백상'의 번역본은... 아마도 일본어 중역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기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해외 문학을 번역할 때 한자 조어로 자국 문화에 어울리는 단어를 잘 뽑는 편인데,
원문보다도 더 유려하게 잘 읽히도록 번역된 한자 조어를 볼 때 저는 일본어 중역을 의심합니다.
또 한 가지 근거라면, 제가 읽은 마르셀 에메 단편집은 번역자 이름이 무척 생소했기 때문입니다.
어지간한 번역자의 경우에는 왠만해서 그 이름을 몇 번 접해서 익숙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마르셀 에메의 베스트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라는 단편집이라는 지적은... 절반은 맞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못지 않다고 평가하는 작가의 책이 하나 더 있는데, <나무 위로 올라간 고양이>입니다.
이 책은 왕년에 한국에 처음으로 완역되어 나올 때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출간되었다가
나중에 <착한 고양이 알퐁소>, <날라아 돼지>, <길 떠나는 양> 세 권으로 다시 재출간되었습니다.
해당 연작 단편들이 워낙 유명하다보니까, 그 단편집 중 <장님 개>, <철학하는 소>와 같은 단편은
30~40년 전부터 [계몽사 세계 아동문학 전집]과 같은 아동용 전집물에 포함되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역자가 단편집 <파리의 포도주>, 장편소설 <초록 망아지>를 번역해 내 놓았는데...
성인 취향의 유머가 함께하고 있는 <초록 망아지>는 무척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아주 잘 쓴 책입니다.
<파리의 포도주>는 마르셀 에메의 베스트가 아닌 나름 쓸만한 단편집으로 생각하고 읽으면 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로, 문학동네에서 나온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안타깝게도 마르셀 에메의 작품 중 베스트에 속하는 단편을 모두 담고 있지는 못합니다.
흔히 마르셀 에메의 단편 걸작이라면 <벽을 통과하는 사나이>와 <사빈느>, <집달리> 세 편에다가,
아동 팬터지 <하늘을 나는 장화>, 그리고 <시간 배급 카드>와 그 속편 <법령>까지 대표작으로 봅니다.
제가 알기로 이런 베스트 단편이 한 권의 단편집에 모두 수록되어 한국에 출간된 책은 아직 없습니다.
'백상'에서 나온 단편집에는 왠만한 작품이 거의 다 실려 있는데 왠일인지 <집달리>가 누락되어 있고,
'문학동네'의 단편집에는 <사빈느>가 없으며 <시간 배급 카드>는 있는 데 속편 <법령>이 빠져 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살림'에서 나온 [이문열 세계명작 산책] 10 권짜리 단편집 앤솔러지 시리즈 중에
제 4권 <환상과 기상>이 팬터지 앤솔러지인데... 여기에 마르셀 에메의 <사빈느>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책 위주로 마르셀 에메의 작품 베스트를 챙겨 읽고 싶다면,
문학동네의 단편집을 구해 읽고 이문열 세계명작 산책 제 4권에서 <사빈느>를 읽는 방법이 가장 쉽습니다.
거의 모든 작품이 실린 '백상'의 단편집은 절판된 지 오래되어서 책을 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거든요.
마르셀 에메는 성인 대상으로 쓴 작품에서는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늘어 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표 단편 <벽을 통과하는 사나이>, <사빈느>, 장편 <초록 망아지>는 성(性)이 핵심적인 소재 중 하나죠.
하지만 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을 주요 독자로 생각하고 쓴 <하늘을 나는 장화>, <격언>과 같은 단편들과
동물 팬터지 연작 <나무 위로 올라간 고양이>와 같은 책에서는 어린이의 시점으로 동심을 잘 담아냅니다.
어른을 대상으로 하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든 재기발랄하고 유쾌한 필치의 유머가 살아 있는 것은 같습니다.
기발한 환상, 유쾌하고 즐거운 유머, 아련하고도 애수어린 "예술적인" 마무리... 이런 게 마르셀 에메의 특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