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장원님이 쓰신 <대재앙 이후의 세계>를 보는 중입니다. SF 하위 장르를 설명하는 총서 중 하나인데, 제목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야기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종말 문학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포스트 홀로코스트를 쓰더군요. 그리고 보면, 케이트 윌헬름이 쓴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국내 번역판 역시 홀로코스트라고 불렀죠. 국내에서는 아포칼립스와 홀로코스트라는 용어가 병행하는 듯한데, 아포칼립스 쪽이 살짝 우위인 것 같습니다. 이건 구글링한다고 알아낼 수 있는 정보도 아닌지라 그냥 개인적인 감일 뿐입니다만. 영미권에서도 아포칼립스를 더 많이 사용하는 듯하네요. 혹시나 해서 해외 도서 사이트에서 두 용어를 검색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아포칼립스는 결과가 2,000개를 넘는데, 홀로코스트는 150여 개에 그쳤습니다. 섣불리 단정할 수 없지만, 이런 걸 보면 아포칼립스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쓰이나 봅니다. 홀로코스트는 특정 사건을 지칭하는 뉘앙스라 그럴까요.

 

 

포스트 아포칼립스든 홀로코스트든 사실 두 단어가 가리는 작품군은 거의 비슷합니다. 세상이 멸망한다는 내용이니까요. 허나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아포칼립스는 말 그대로 종말 장르 전반을 포괄합니다. 질병, 전쟁, 자연 재해, 기술적 비극 그리고 기타 환상적인 요소(신이 강림하거나 악마가 지옥에서 올라오거나 등등)까지 두루 포함합니다. 한마디로 원인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세상이 멸망했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싶으면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이와 달리 포스트 홀로코스트는 똑같은 종말을 다루더라도 그 원인이 전쟁으로 치우칩니다. 홀로코스트라는 어감 때문인지, 전쟁이 나서 인류가 대부분 죽은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것도 핵전쟁이 많죠. 질병이나 운석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는 듯합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경향이 그렇다는 뜻이지, 딱히 공식적인 정의는 아닙니다. 그냥 포스트 홀로코스트와 아포칼립스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제가 보기에 <노래하던 새들도>나 <대재앙 이후의 세계>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쪽이지, 홀로코스트는 아닌 듯합니다. <노래하던 새들도>는 멸망 원인을 전쟁이라고 뚜렷하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거의 산골짜기 복제인간 생존자들의 이야기라서 인류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안 나옵니다. 그리고 <대재앙 이후의 세계>는 전쟁만 아니라 각종 멸망 원인을 두루 살핍니다. 분량만 따지면, 전쟁보다 천재지변 요소와 질병이 훨씬 더 많은 듯하네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고, 어차피 장르 명칭이라는 건 그렇게 딱딱 나뉘는 게 아니죠. 아포칼립스든 홀로코스트든 좋은 작품을 보는 게 중요하지, 이름이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저 이정표 역할을 할 뿐이죠. 어쨌거나 종말 문학은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융성한 하위 장르인데, 아포칼립스와 홀로코스트란 용어는 통일이 안 되나 봅니다.

 

 

※ 그리고 보니, SF 총서 1권은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영문 단어를 그대로 썼는데, 2권은 포스트 홀로코스트라는 영문 대신 대재앙 이후라고 번역했네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만큼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명칭이 부담없이 퍼졌나 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역시 국내에서 널리 쓰이는 명칭이지만, 뭔가 좀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용어니까요.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좀 그렇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