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과학 포럼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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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모 사이트에서 인터스텔라에 대한 내용으로 토론이 있었습니다.
인터스텔라가 과연 하드 SF인가 소프트 SF인가 하는 것이었죠.
하드와 소프트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제가 본 SF물 중에서 완전한 하드 SF라고 부를 만한 것은 전부 단편소설 뿐이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 단편집이라든지, 래리 니븐의 '변하는 달'이라든지...
아무래도 장편이 되다보면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과학 외적인 요소들을 끌어와서 스토리를 진행시켜야할테니, 자연스럽게 과학이 아닌 요소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게 되고, 거기에 초점이 가다보면 과학적 상상력은 좀 밀려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싶더군요.
사람들이 흥미를 갖는 스토리를 진행시키려다보면 결국 스토리에 맞춰서 과학적 고증을 어느 정도 포기하게 되기도 하고요.
또 다른 창작 커뮤니티에서도 SF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하드 SF는 대중적 관심을 얻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하드 SF인 것부터 대중성을 잃는다고 해야되려나요.
대중성이 없는 장편은 결국 출판되기도 어려울테니, 억지로라도 대중적인 요소를 집어넣거나 아예 포기를 하거나 해야되지 않나 싶습니다.
차라리 단편이라면 아이디어만 가지고 이야기를 진행시켜도 될테고, 출판에 덜 얽매이는데다 집필하는데 드는 시간도 비교적 적으니 부담도 없을테고요.
여러모로 SF라는 장르는 어려운 것 같네요.
한국에 나온 하드 SF의 대명사로 불리는 작품이 할 클레멘트의 <중력의 임무>입니다.
진짜로 과학적 지식만 가지고 글을 쓰려고 했던 작가의 작품이고, 명백한 장편이죠.
아시모프나 클라크 같은 작가는 하드 SF라기보다 소프트 SF와의 중간지점 레벨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사람 모두 왠만큼 탄탄한 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고, 과학 지식과 설정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내고 있지만,
흥미로운 전개를 위해 이런저런 다른 요소들도 많이 끌어다 사용하는 성향을 보이거든요.
아시모프라는 작가는 장편이든 단편이든 수수께끼나 미스테리를 만들어 푸는 것을 즐기지,
과학 지식을 충실하게 소설에서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이 로봇>에서부터 '로봇공학 3법칙'을 자신만의 추리물로 전개하는 무기로 활용해 온 작가라고나 할까요.
작가 본인이 본질적으로 추리물을 무척 좋아하고 그런 성향을 숨길 생각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로봇 시리즈 단편이든 장편이든 아시모프의 글은 추리물의 구조가 아닌 작품이 별로 없습니다.
미스테리 구조가 아닌 대표작 <최후의 질문>, <전설의 밤>, <200살을 맞는 사나이> 등도 하드 SF는 아니죠.
클라크는 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경이감'을 주는 것에 주력하는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 클라크의 작품 중 하드 SF라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라마와의 랑데뷰>가 유일했습니다.
미지의 외계 라마에서 온 우주선을 탐사하는 과정이 정교하게 묘사되어서 하드 SF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도 1부 <2001>에서 탐사선 묘사를 제외하면 하드 SF다운 구석이 별로 없고,
3부 <2061>이라든지 4부 <3001>까지 가면 소프트 SF는 고사하고 그냥 '공상' 과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개인적으로 과거 가장 읽기 힘들었던 SF 앤솔러지가 <하드 SF 르네상스>였습니다.
하드 SF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그냥 읽기 힘들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그 "소수의 멀리 나가는 사람들" 중에 제가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드 SF 르네상스>를 접하면서 느꼈으니까요.
미적분이나 순수 이성 비판이 재미있느냐고 묻는 것과 똑같겠죠. 저는 <쿼런틴>에서 번역자 해설이 기억에 남더군요. 너무 순수하게 정제해서 차마 접하기 힘든 소설이라고요. 하드 SF를 쓰거나 읽는 건 그런 뜻이겠죠. 애초에 이 장르는 특정한 좁은 소비층을 위해 만든 겁니다. 유명세는 몰라도 대중성을 노리기 어렵죠. 그러니 양산형으로 쏟아지기 어렵고, 작품 숫자도 한정적이고요. 대중성과 전문성을 모두 겸비하는 작품도 있겠지만, 그건 극히 예외일 겁니다. 다만, 장편 하드 SF 자체야 충분히 있습니다. 어쨌건 소수긴 하지만, 그걸 원하는 소비층은 꾸준히 존재하니까요.
지인이 <인터스텔라>가 하드 SF냐고 물어보길래 <쿼런틴>을 읽은 느낌을 상기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라고요.
하드라는 단어가 붙은 건 원래 그렇습니다. 하드 락이건 하드코어 포르노건 뭐건 간에...소수의 좀 멀리 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물건이죠.
아무튼 장편 하드 SF는 많지는 않지만 있을 만큼은 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는 절대 아녜요. 그저 작가가 대다수의 독자들은 별로 신경 안 쓸 요소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느냐의 여부일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