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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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던 단편 소설중에는...
한 군인이.. 펜팔로 알게 된 여인과 만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약속 장소에 기다리는 도중 왠 매력적인 여성이 그 군인을 헌팅하고 군인은 정중히 사양하죠.
결국 마침내 나타난 여인은 나이 많은 할머니.
군인은 그 할머니에게 아는 척 하는데 할머니는 그녀가 저 앞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줍니다.
교과서에서 처음 봤던 소설 같은데 이젠 제목도 기억 안 나네요.
지금 생각하면 살짝 기분 나쁠 법도 하겠지만
군인이니까 괜찮았을지도요.
여튼 소설 속 그 두사람이 만나게 된 인연이라는 게
누군가 책에 주석을 달아놨는데
그 주석이 너무 자기 마음에 쏙 들더라나요. 그래서 어찌 연락을 하게 되었다고 하죠.
지금으로 치자면 SNS에 달린 평을 보고 반해버린 걸까요.
어쨌거나 그때나 지금이나 책에 낙서하는 건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낙서하는 건 그 말씀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 해도
중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책에 글을 쓸 수 있는 건 설령 작가라 해도 제일 앞 페이지에 이 책을 ~에게 바침 정도 몇마디 적는 게 고작이라고요!
....
그 당시에 SNS가 있었을 리는 없고 무언가에 대한 평을 나눴을리도 없으니 책에 달린 주석이 고작이겠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책에 주석을 적는 건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주석을 단 내용, 혹은 해설을 한 내용만으로도 베스트 셀러가 된 책들도 있었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책의 본의를 이해하는데에는 책 그 자체의 내용으로도 충분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든 누구든 나서서 뭐라 뭐라 변명하는 것도 꼴사납죠.
여튼, 암만 이뻐도 책에 낙서하는 사람은 안됩니다. - 가 제 결론이랄까요. :)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
뭐, 도서관이라는 것이 현대에는 도서관에서 처음부터 신간을 구입하여 도서관을 꾸리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옛날에는 개인이 소장한 장서를 기부받거나 하여 도서관을 만드는 일도 많았을 것이고 원래부터 주석이나 낙서가 있었던 경우도 있을 수 있겠죠. 원래 낙서가 있었다고 해도 덧칠하는 것이 허용될 일은 아니지만 낙서가 있으면 그 낙서에 대한 낙서를 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 일종의 화장실의 법도 같은...
(개인적으로는 교과서 이외의 책에 뭔가를 써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만,,, 문제집도 그냥 연습장에 풀었던.. - 사실 거의 문제집따위 관계없이 살았던 공포자 인생이지만^^;; - )
책에 무언가를 적어넣는 것은 괘씸하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책을 매개로 공감을 나누다 이루어지는 만남이라는 것은 나름대로 로맨틱하군요(웃음)
-전자책에 붙인 주석을 공유하는 SNS 서비스 개발을.... (이미 있으려나?)
주석이 원전에 버금가거나 심지어 능가하는 명성을 얻은 예도 꽤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좌전>이죠 - 흔히 <좌씨전>, 또는 <좌씨춘추>라고 불리는 물건인데,
공자가 지었다는 <춘추>에 대하여 노나라의 좌주명이 나름대로 견해를 주석으로 달은 겁니다.
그런에 흔히 춘추를 읽는다고 하면 공자의 원전보다는 오히려 좌씨춘추를 의미할 정도가 되었죠.
나관중의 <삼국지>가 만들어진 것도 진수의 역사서에 배송지 주, 김성탄 주 등이 덧붙여진 덕분이었구요.
한국에서 주석달린~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마틴 가드너의 <앨리스> 주석본 덕분이었을 겁니다.
특히 <앨리스> 주석본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은 '나라사랑'출판사에서 나온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주석으로 처리된 각 챕터별 체스 기보였는데...
<거울나라의 앨리스>가 체스를 두는 내용을 기반으로 저술되었기 때문에
챕터별로 전개된 이야기가 체스를 어떻게 둔 셈인지 기보가 굉장한 의미를 가졌죠.
웃기는 것은...
정작 마틴 가드너가 달아 놓은 주석에는 체스 기보가 없었다는 겁니다.
일본의 출판사에서 마틴 가드너의 <앨리스> 주석본을 출간하면서 서비스로 체스 기보를 덧붙여 놓았는데,
'나라사랑'에서 일본판 주석본을 통채로 번역하면서 함께 딸려 온 것이었죠.
이후... 마틴 가드서 주석판 <앨리스>가 한국어로 정식으로 번역출간되었지만,
정작 체스 기보는 빠진 채로 나와서 '나라사랑'판은 여전히 희귀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죠.
저는 <앨리스>의 경우 워낙 오래된 작품이고 빅토리아조 시대의 유행을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저자가 수학자여서 기호학에 가까울 정도로 숨은 의미가 많기 때문에 주석판도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만...
<드라큘라>나 <홈즈>와 같이 엔터테이먼트 성향이 강한 대중소설을 굳이 주석판으로 읽어야 하는 지는 회의적입니다.
셜로키언이나 고딕소설 연구자가 아니라면, 별로 의미가 없는 책이 되겠죠.
왕년에 <육조괴담>으로도 알려진 <수신기>를 평생 연구한 분의 주석판으로 본 적이 있는데, 도저히 읽기 어려웠습니다.
같은 번역자가 주석을 제거하고 원문 그대로 읽기 편하게 괴담을 다시 정리하여 출간하였고, 그 책은 상당히 즐겁게 읽을 수 있더군요.
개인적으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도 정확한 번역에 방대한 주석보다는 읽기 편하게 번역하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곡>도 각주나 미주가 엄청나게 많이 들어간 전문 연구자의 심혈을 기울인 번역본보다는
오히려 그냥 본문 중에 주석을 넣고 독서 흐름에 더 신경 쓴 책이 훨씬 더 읽기 좋았거든요.
여담으로...
아이작 뉴턴이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생각한 것은 <뉴턴 역학>을 정립한 것도 아니고,
<미적분>을 발견한 것도 아니고, <프린키피아>를 저술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뉴턴이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스스로 최대 업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성경의 4 복음서에 주석을 달은 것"이었죠.
그렇지만... 아이작 뉴턴이 심혈을 기울렸다는 주석이 담긴 성경은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습니다.
본래 인생이 그런 것이죠.
피에르 드 페르마가 아리트메티콘의 여백에 끼적인 주석 때문에 4세기에 걸쳐 얼마나 많은 수학자와 학생들이 고통 받고 좌절했습니까? 책에 함부로 주석을 달면 안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죠. 심심풀이로 단 주석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ㅡ0ㅡ
이겁니다.
<사랑의 약속 Appointment with Love> by S.L. Kishor
영어 원문 링크 http://reading.posyo.ru/love.html
영문 및 국문번역 링크 http://blog.naver.com/pysun1234/102305257
저기서 주석이 잔뜩 써 있었던 책은 서머셋 몸의 <인간의 굴레>였구요.
주석 달린 드라큘라나 셜록 홈즈 웃기더군요. 온갖 허술한 점을 모조리 잡아내니.
어쨌든 자기만 보는 책이면 모를까, 도서관 책에 낙서하는 건 공공물자 훼손이라고 봅니다. 이건 어느 정도 내용누설이나 스포일러랑 마찬가지에요. 뭔가 거기에 써놨다는 것 자체부터 기분 나쁠 수 있고요. 뭐, 저도 남들이 써놓은 글귀 보고 고개를 끄덕일 때도 있습니다만. 그보다 열 받을 때가 더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