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 작가가 쓴 <진화신화>는 단편 모음집입니다. 그간 다양한 매체에 발표했던 단편들에 새로운 작품을 넣어 만든 두 번째 작품집. 제목 때문에 생물학 관련 내용일 거라 생각하지만, 제목과 수록 작품들 간의 큰 관계는 없습니다. 첫 번째 수록 작품을 그냥 책 제목으로 사용한 것뿐. 이 작품집을 가리켜 발견 시리즈 4권이라고도 하던데, 본래 김보영 작가의 특징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 발견으로 세계간을 뒤집어 업는 걸 잘 하기 때문일 겁니다. 한국인의 특기인 밥상 뒤집기를 세계관으로까지 발전한 사례 는 물론 아니지만, 밥상 뒤집은 것보다 더 기가 막힌 짜릿함을 경험할 수 있죠.

 

당연하게도 이런 뒤집기는 엄정한 논리로 이루어집니다. 뜬금없이 반전에만 몰두하여 기존 설정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무너지는 작품들도 많은데, 김보영 소설들은 그 세계의 질서에 맞는 전개를 보여주다 마지막에 한 방 크게 터뜨리며 끝나기에 경이롭죠. 이 경이롭다는 말은 김보영 작가의 글을 읽고 난 소감문에는 빠지지 않는데, 그만큼 인식의 한계를 넓혀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것도 캐릭터 하나에 그치지 않고 세계 자체가 바뀐다는 점에서 테드 창이 지적한 SF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국내 작가라고 하겠네요. 테드 창이 국내 강연을 할 때 진정한 SF는 세계관을 뒤바꾸어야 한다.고 했었죠.

 

9편이 있는데, 다 읽어본 건 아니고, 가장 흥미를 끈 진화신화만 본 상태입니다. 이미 예전에 발표한 작품이라서 몇몇 개는 본 기억도 나네요. 진화신화 <삼국사기>를 인용하면서 시작하는데, 신화 속 동물들이 상상이 아니라 실재했다는 가정으로 썼습니다. 넵, 크리쳐물입니다. 읽어 보면 신화에 걸맞게 별 희한한 것들이 다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국 신화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논리를 찾아냅니다. 신화를 상상으로만 놔두지 않고 현실로 끌어 내리고, 그 와중에서도 기이와 신비를 유지하는 게 이 단편의 특징. 배경이 하도 옛날인지라 하드 SF에 달하는 엄밀함은 없지만, 등장인물의 대사를 들어보면 현대 생물학을 배운 게 아닐까, 싶은 단어도 몇 개 튀어나옵니다.

 

제목이기도 한 진화는 신화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게 진행속도가 상당히 빠르네요. 몇 억 년을 거쳐야 할 변화가 생명의 의지 혹은 잠재성에 따라 몇 개월에 걸쳐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변화는 생명의 위기가 극한에 달했을 때만 발현하기 때문에 생각만으로 다른 동물로 변하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이거 연습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뭐, 그 바람에 이 시대엔 우리가 상상도 못할 수많은 생명이 어울려 삽니다. 문제는 세상이 살기 힘들어지고, 그 바람에 목숨을 부지할 생각으로 변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 민중의 아픔이 진화에 점점 가속도를 붙이고, 그 와중에 변화의 극을 달리는 존재가 드러남으로써 사건은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상당히 깨는 설정이고, 그만큼 재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이렇게 좋은 설정을 가지고 이 단편 하나로 그친다는 게 좀 아쉽네요. 좀 더 분량을 늘이거나 다양한 생물들을 보여줘도 좋았을 것을. 흠, 아마 분량이 길어지면 워낙 별별 생물이 다 튀어나올 테니까 마지막 그 존재의 부각이 희미해질 우려도 있지만. 다양한 진화의 장을 연출하는 듯하면서 짧게 끝나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여기에 나온 동물들이 죄다 인간에 근본을 두기에 진짜 야생에서 태어나 자란 야생동물 이야기는 없습니다. 야생동물은 먹고 사는 문제에 그리 영향이 없으니까 진화가 더딜지도 모르니 소재가 안 되어 그런 것 같네요.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크리쳐나 괴물 이야기라고 하기도 좀 어색하기도.

 

거기다 생긴 건 전부 다른 놈들이 왜 이리 소통이 잘 되는 건지. 이렇게 해놓으면 감각이 달라져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식의 다른 작품이 무의미해지는 것 아닌가?하는 의문도 들고요. 결국 다같이 인간이었다는 게 해답이긴 한데, 그런 고로 생김새는 다양하되 알맹이는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순적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저 같은 경우, 서로 다른 존재들이 소통이나 문화에 차이점이 많아 부딪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그것과는 정반대라서 약간 실망하기도 했네요. 어차피 아이디어 중심인 이 분량의 작품에 그런 걸 기대하는 게 잘못된 거긴 하지만. 특히, 중간에 나온 호랑이는 뭐랄까. 육체가 달라지면 당연히 생리 기반이나 인식 방법도 달라지기 마련인데, 그런 반영이 하나도 없어서 희한하기도.

 

, 원래 이쪽 설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만요. 결국 작가의 설정 나름 아니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일대기를 좀 더 알려주었으면~, 싶기도 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도 아주 적당한 만큼만 비중이 있어서 너무 잘 짜였다는 압박이 들기도 합니다. 좋게 말하면 딱 알맞은 분량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여유가 없다고 할까. 전후관계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지만, 어떻게 태어나고, 왜 그렇게 변한 건지, 그런 신체로 어떤 사건을 벌였는지 이야기에 살을 붙여도 좋았을 거라고 봅니다. 모험소설로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는데도 아이디어의 활용에만 그치고 거기서 더 나가지 않았습니다. 작가 능력이 안 되어 안 쓴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재와 기법을 실험하려고 그런 것 같아서 아쉬움이 배가 되네요. 특히, 후반에 나온 그 여인과는 괜찮은 로맨스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나가 버리기도.

 

나머지 8편은 이것과 별개의 설정으로 진행하는 듯합니다. 하나의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각기 다른 9개 세계들인 거죠. 땅 밑에가 있는 걸 보면 확실합니다. 그러니 진화신화의 설정이 재미있다고 다른 작품들까지 기대하다간 좀 실망할 수도? 모르죠.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이 언젠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죠. 그게 언제가 되느냐가 문제겠지만. 굳이 비슷한 세계관을 찾자면, 용의 애완인간이 등장하는 마지막 늑대가 있는데, 읽어보진 않아서 딱히 말을 못하겠습니다. 도서 사이트의 리뷰를 보면 아마 별 관계 없는 9개 세계가 분명한 듯.

 

해괴한 동물들이 연타로 나온다는 점에서 신비동물 이런 거에 관심이 있으면 꽤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소설대로만 세월이 흐른다면 신비동물학이 대세겠군요. 그런 게 아니더라도 기발함으로 우러나오는 경외감을 느끼고픈 독자에게 추천할만한 단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