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슈퍼 로봇 이야기, 괴수/괴인/초인 이야기 외에... 다양한 작품과 장르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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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생각하는 건데, 셜록 홈즈는 현대 사회를 참 속 편하게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홈즈는 우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축입니다. 이 인간은 추리광이자 추리기계입니다. 다른 건 죄다 엉망인데, 추리 하나만큼은 잘해서 그걸 먹고 살죠. 취미가 본업인 셈이고, 밀리터리 매니아가 군사 지휘관이 되는 것만큼이나 잘 풀린 케이스. 거기다 추리를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따라올 사람이 없어서 유명한 왕실 가문도 수사 의뢰를 합니다. 덕분에 인간성이 아무리 험악해도, 수사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어도, 돌봐주는 이가 없어도 먹고 사는 데 전혀 지장 없습니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좋아하는 걸 하는 것뿐이지만, 그게 결과적으로 명성과 부를 불러온 거죠. 집 안에서 바이올린이나 연주하다 수사가 들어오면 취미 삼아 해결 후, 의뢰비가 들어오고, 그걸로 공연도 관람하고 여행도 다니고… 이보다 더 좋을 게 어디 있을까요.
거기다 사교성이 0점이라 친구도, 연인도 없는데, 이게 또 장점이 됩니다. 사람들은 가끔씩 인간 관계에 질려 도시를 떠나고픈 욕구를 느끼곤 합니다. 빅토리아 시대엔 어땠는지 몰라도 그 당시 사람들 역시 일하는 와중에 인간 관계에 지칠 때가 많았을 겁니다. 최소한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살죠. 허나 홈즈는 수사 관계로 만나는 경찰 외엔 인간 관계랄 게 없어서 골치 아픈 문제에 얽히는 일이 없습니다. 못 살게 구는 상사, 속 썩이는 부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여인, 우정을 시험하는 친구…. 아무도 없습니다. 더 무서운 게 이 인간은 외로움을 안 탑니다. 친구와의 술자리나 연인과의 설레는 잠자리 따위 사치일 따름입니다. 홈즈의 감성에 변화가 있을 때는 어디까지나 사건이 안 풀릴 때입니다. 세상 모든 남자들이 반할만한 아가씨가 지나가도 “흠, 귀에 미처 지우지 못한 잉크가 묻은 걸 보니 인쇄업을 하는군.” 뭐, 이런 소리나 해대죠. 나쁘게 말하면 목석이고, 좋게 말하면 시크합니다.
아, 물론 왓슨이 있긴 하죠. 그런데 홈즈는 의사 친구가 없어도 혼자서 수사하러 빨빨 돌아다니느라 바쁩니다. 왓슨이 요긴하긴 한데,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냥 그런 셈. 심지어는 세상에 둘도 없는 동료니 뭐니 해도 결국 사건 의뢰가 없으면 약물이나 흡입하고 다닙니다. 동료는 없어도 되지만, 수사(범죄)가 없으면 안 됩니다. 이 인간은.
제가 보기에 셜록 홈즈는 현대 사회의 이상적인 개인주의를 몸소 실천하는 인물입니다. 직업 걱정이 없고, 따라서 돈 문제가 없습니다. 취미가 곧 직업이고, 거의 대부분 성공하니 정체성도 대만족이죠.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니 연인에게 돈 쓸 일도 없고, 상처에 마음 아파하지도 않습니다. 수사는 어차피 혼자 다해먹으니 상사나 부하 때문에 고생하지도 않고요. 의뢰가 안 들어오면 못 견디고 폐인이 되지만, 범죄가 항상 일어나는 터라 취미(일거리)가 바닥날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도대체 뭐가 더 부족한가요? 명예? 런던 경시청만 가도 경관들이 다 일어나고, 스캔들을 막아준 공작들이 손을 내밉니다. 부? 왕실 사건을 해결해주기 때문에 의뢰비는 많이 받습니다. 홈즈 본인이 돈에 별 신경을 안 쓰기 때문에 가난하게 사는 것일 뿐. 사랑? 추리 기계의 마음에 사랑 따위 없습니다. 저 유명한 아이린 애들러조차 사랑하는 게 아니라 존경하는 거죠.
홈즈가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건 이 인간이 그저 명탐정이라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홈즈는 현대인들이 부러워하는 ‘무심한 듯 시크한’ 덕목 그 자체입니다. 아마 현대 사회 가치관이 크게 변하지 않는 한 홈즈의 인기는 식지 않을 겁니다.
셜록 홈즈의 삶은 아서 코난 도일이 평생 꿈꾸었던 삶의 올바른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셜록 홈즈는 뛰어난 인물이기는 하지만, 빅토리아조 시대의 '신사'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 당시 영국에서 '신사'라는 사람들은, 존경받을 만한 직업을 가지고 있고, 직업과 별개로 사회 활동(또는 클럽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스포츠를 통하여 신체를 강건하게 단련하고,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국가를 위하여 어떤 형태로든 헌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서 코난 도일이 '신사'다운 삶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려면, 그의 청소년 시절을 좀 살펴 봐야 합니다. 아서 코난 도일은 어려서부터 별로 행복하게 성장하지 못하였습니다. 조부는 화가로 나름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아서 코난 도일의 부친은 많은 형제들 중 막내였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는 유산이라고는 거의 없었고, 공무원으로 일하기는 했지만 술을 너무 좋아해서 집에 가져다 주는 돈도 별로 없었습니다. 워낙에 가난한 집안이어서 장남이었던 아서 코난 도일의 학비조차 조달할 수 없었죠. 그가 청소년 시절 기숙사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삼촌들의 후원 덕분이었습니다. 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공부해야 하는 처지는 자존심이 강한 아서 코난 도일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고, 이는 그가 청소년 시절부터 '신사' 계급으로 올라서기 위해 평생 치열한 노력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아서 코난 도일은 가난뱅이가 '신사'가 될 수 있었던 유이한 방법 - 군에 입대하여 '장교'가 되거나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라는 전문직이 되는 길 중 후자를 택했을 뿐입니다.
아서 코난 도일이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은 개업의로 환자가 잘 안와서 힘들었던 시절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홈즈' 시리즈로 대박을 치기 전까지 인생의 전반부가 거의 가난뱅이의 삶이라고 할 수 있었죠. 아서 코난 도일의 삶은 가난뱅이 집안에서 '신사' 계급이 되기 위한 몸부림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가 되는 것도 무척 힘들었지만, 개업의로 자리잡는 것도 힘들었죠.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내린 글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부'를 이룩하였고, '의사'라는 전문직에다가 많은 원고료를 받는 부유한 작가가 되자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면서 스포츠를 즐기고 또 국가를 위해 헌신합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꿈꾸었던 '신사'의 전형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죠.
셜록 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이 평생 치열하게 노력하여 손에 넣었던 반듯한 '신사'로서의 삶 대신에, 자유분방하게 살아가고 싶었던 그의 마음 속의 또 하나의 이상을 구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셜록 홈즈는 평상시 늘어져 있는 생활 태도도 그러하고 정신 세계 자체가 삐딱한 인물이죠.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나 그러한 것도 별로 없습니다. 반듯한 신사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오히려 영국의 전형적인 신사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아서 코난 도일이 평생 추구하였던 '신사'로서의 삶은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것도 만만치 않고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습니다. "집에 가는 것보다 나하고 있는 것이 더 재미있을 걸"이라며서 왓슨을 꼬드기는 홈즈의 대사는, 절도 있는 신사로서의 삶을 추구해 온 아서 코난 도일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자신이 홈즈를 통해 나름대로 대리 만족을 느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셜록 홈즈는 예나 지금이나 저의 이상적인 인간상입니다. 수많은 독신남이 원치 않게 독신인 경우가 많은 반면 홈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스스로 우아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영위하니까요... 저는 주변 사람들이 여자 친구를 사귀거나 헤어지거나, 혹은 결혼해서 부럽다는 시선을 보낼 때, 바라보지도 원하지도 않는 홈즈같은 꿋꿋하고 고고한 한마리 학 같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