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동물에는 호기심이 있게 마련이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중에서도 특히 호기심이 왕성하기로 잘 알려졌습니다. 무엇보다 눈앞의 사실에만 호기심을 갖는 여타 동물과 달리 인간이라는 동물은 온갖 추상적인 것들에 관심을 두고 궁금해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내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 같은 앞으로의 일, 그리고 “비는 왜 올까?”, “하늘은 왜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지?”처럼 관찰한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의 원인 등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며 이 답을 찾고자 합니다.

  이제까지의 관찰만으로 볼 때 사실상 인간만이 가진 이러한 특성은 교육 등의 결과는 아닌 듯합니다. 실례로 이러한 호기심과 정답을 추구하는 행위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어쩌면 말 못 하는 아기때부터) 보이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뇌가 그만큼 우수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인간, 아니 인류의 삶은 바로 이 호기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태초에 인간이 불을 발견할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문명의 발달은 ‘호기심’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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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을 찾아서... 인류의 문명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

 

  인류 문명의 원천인 불은 호기심과 ‘정답’을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된 힘입니다. 오직 인류만이 가진 이 독특한 기술은 눈앞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이라는 존재를 처음 본 동물들은 대개 두려움을 가집니다. 그 중 일부는 호기심을 갖고 접근하지만 뜨겁고 아프다는 것을 알고 도망칩니다. 그들의 호기심이라는 것은 대개 그 정도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과 해를 주는 것을 가리는 정도로 만족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뜨거워하며 피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계속 그 정체를 파고든 끝에 이것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예 직접 불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얻어 속칭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이처럼 호기심이라는 능력으로 불이라는 힘을 얻은 인간은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질적으로 호기심 충족을 위해 노력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호기심은 엄청나게 강력한 것이어서 만화나 영화 등에선 이 호기심 때문에 죽거나 다치는 이들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눈앞의 이익보다도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행동 때문인데, 사실 이는 현실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사례입니다. (이 역시 여타 동물과는 다릅니다. 여타 동물의 호기심은 대개 생존 본능과 직결되어 있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때때로 생존 본능을 넘어서니까요.)


  호기심은 ‘정답’을 알았을 때 충족됩니다. 하지만, 그 정답에 만족하지 못하면(틀렸다고 생각하면) 다시 호기심이 생겨나고 정답을 알아낼 때까지 반복됩니다.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때때로 정답을 아는 이에 대한 부러움, 존경, 그리고 숭배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물론 때로는 질시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하지요.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직접 찾아보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누군가에게 물어서 해결하는 법이지요. 일부 사람들은 전자를 택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후자를 택합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호하지 않는다면 네이버 지식인 같은 서비스가 인기를 끌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호기심에 대해 고민하고 직접 찾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존하는 것은 그만큼 한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네이버 지식인이라면 '내공'을 걸어야 하는 것처럼...

 

 

  오랜 옛날 A라는 인간이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하늘에서 차갑고 흐르는 것이 내린다. 그래 이걸 물이라고 부르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비라고 하자... 그런데 비는 왜 내리는 거지?”

 

  그는 계속 고민했지만, 정답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도 그렇지요. 당시에는 기상학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고, 얼음<->물<->수증기의 상변화에 대한 것도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계속 고민하던 A는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이 풍부한 B에게 찾아가 물어봅니다.
   “비는 왜 내리는 것인가요?”
  하지만,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B 역시 원시 시대의 인간, 비가 내리는 원인 따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도 모른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역시 연장자로서의 체면이 있으니까요.

  한참을 고민하던 B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비의 정령이 있기 때문이다.”

  A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왠지 타당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생각해 보니 조금 부족한 것 같습니다.
  비의 정령이라는 게 있다고 치고, 왜 하필 하늘에 이상한 것(그걸 구름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이 생기고 어두워지는 날에만 비가 내리는 것일까요?

  그래서 다시 B에게 가서 물어봅니다.
  “왜 비는 구름이 끼는 날에만 내리는 걸까요?”
  한참 생각하던 B는 대답합니다.
  “비의 정령은 구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야말로 A는 고개를 끄떡입니다. 그리고 B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지요.

 

  한번 존경을 받기 시작한 B는 존경받는 맛(자랑하는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A가 물어보기도 전에 이것저것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B의 박식함에 그를 숭배하게 된 A는 B의 말을 마을 사람들에게 해 줍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심지어 B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조차- B를 존경하며 그를 추종합니다. 이것저것 질문할 때마다 막힘없이 대답하는 B가 정말로 대단해 보였으니까요. 그래서 심지어는 그에게 먹을 것을 바치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B가 나이가 들어 죽자 A는 B를 대신하여 존경받는 자리에 오릅니다. 오랜 기간 B를 따라다닌 A는 B 다음으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조금 똑똑해지면서 B의 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문을 제기하게 되지요. 그리고 ‘똑똑한 사람’인 A는 이에 대답하고자 머리를 짜냅니다. 그래서 B의 말이 좀 더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모하여 만들어집니다.

 

  시간이 흘러 B가 죽자, B를 따르던 이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인 C가 뒤를 잇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마가 계속 되면서 사냥을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민하고 고민하다 C를 찾았습니다.
  “비를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C는 곤란해졌습니다. A와 B의 지식을 모두 이은 그조차 비를 멈추는 법은 몰랐으니까요. 한참을 고민하던 C는 한가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비를 내리는 것이 비의 정령이라면 비의 정령에게 빌면 될 것이라고...
  그래서 C는 말했습니다.

  “비의 정령에게 제물을 바쳐라. 내가 비의 정령에게 기도를 해 보겠다.”
  그러면서 C는 정성을 다해서 비의 정령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비는 좀체 그치지 않았지만 절대로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비는 정령이 내리는 게 맞으니 비가 그치지 않는 건 자신의 기도 방법이 틀렸거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과연 비가 그쳤습니다. C와 마을 사람은 기뻐하면서 비의 정령이 소원을 들어준 것이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사냥을 다녀와서 잡은 짐승으로 잔치를 열고 비의 정령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물론, 많은 사냥감이 C에게 전해진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C의 기도가 성공하는 것을 보고 감격한 D는 C의 제자가 되어 그의 모든 것을 배워나갑니다. 그리하여 정령을 화내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리하여 비가 많이 내리건 아니면 적게 내리건 상관없이 정기적으로 비의 정령에 제물을 바치며 기도합니다. D가 정성을 다하여 기도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이번에도 비의 정령이 굽어 살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됩니다. 혹시라도 비가 너무 많이 내리면 오직 정성이 부족하다고 여겼을 뿐….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E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웃 마을 출신인 E는 D의 기도는 잘못되었다며 비의 정령은 오직 과일만을 좋아한다고 주장합니다. D는 화를 내며 그를 쫓아내라고 하지만, 어느새 주변 사람을 설득해서 세력을 늘린 E는 D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강경하게 맞섭니다.


  그리하여 마을에는 비의 정령에 과일만 바치는 파와 고기를 바치는 파가 나뉘어 대립합니다. 비의 정령을 모시는 일은 마을 사람들의 생사가 걸린 일이기도 하니, 때로는 주먹다짐이 일어나기도 일수….

  결국, E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 D는 자신의 권위를 위협할만한 존재를 완전히 없애고자 합니다. 그래서 과일 파인 이웃 마을을 ‘이단’이라 주장하며 침공해서 멸망시킵니다. 고기파는 이 승리야말로 자신들이 옳다는 증거라 여기며 D에 대한 숭배를 더합니다.

 

  D를 중심으로 ‘비의 정령교’라는 것은 계속 번성합니다. 마을이 커지면서 비의 정령은 ‘비의 신’이라는 존재로 승격하게 되었고 수많은 다른 신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비의 신이 정말로 있는가?’, ‘정말로 기도는 효과가 있는가?’

 

  이러한 호기심이 등장하면서 비의 신을 모시는 신관 F는 고민하게 됩니다. 이대로는 자신의 권위와 교단의 질서가 깨진다고 생각한 F는 비의 신을 믿지 않으면 죽어서도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남기지만, 그것만으로는 비의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무렵 G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농부인 G는 겨울에 내리는 눈이 봄이 되면 녹아서 물이 되고 물을 끓이면 다시 수증기가 된다는 사실을 보면서 호기심을 갖습니다. 특히 수증기가 하늘의 구름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결국 구름 그 자체가 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나날의 변화를 관찰한 F는 비가 내리고 그치는 주기가 있으며, 비가 내리기 전에는 습해지거나 바람이 부는 등 특정한 조짐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것은 기도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정리해서 ‘비의 흐름에 대해서’라는 책을 씁니다. 그의 이론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비가 내리고 그치는 것을 더욱 정확하게 측정하는 방법으로서 눈길을 끕니다.

  이번에야말로 위기에 몰린 F는 결국 강경책을 세우게 됩니다. 바로 G를 이단이라 몰아붙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단을 믿으면 비의 신이 분노하여 가뭄을 내릴 것”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 G를 잡아다 처형하고 G가 남긴 책을 모두 불살라 버립니다.

 

  그래도 G가 남긴 유산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과학 기술이 발전하자 G의 주장이 하나 둘 사실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H란 사람은 투명한 그릇 속에서 물의 상변화를 관찰하여 비와 비슷한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을 발표했고, I란 사람은 산 위에 올라가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기온이 내려가서 수증기가 쉽게 물로 바뀐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심지어는 산 위에 걸친 구름이 안개 같은 것으로 단순히 공중에 뜬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이렇게 수많은 사실이 드러났지만, 비의 신교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G의 희생 이후, 수많은 학자가 비가 왜 내리는지를 증명했지만, 비의 신교를 믿는 이들 중에는 그래도 비의 신이 비를 내린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오직 종교의 이야기만이 진리이며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은 비가 내리는 과정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구름 속을 들어가 본 일이 없기에 과학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비는 신이 내려주는 것. 이 말을 의심하는 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러한 말이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심지어 산에 올라가 구름을 직접 본 이들조차 과학자의 말을 사실로 믿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산 위의 구름에 비치는 신비한 영상이 구름의 신의 정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신을 보았습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그들이 신의 권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마을에서는 비의 신교가 번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한 비의 신교와 관련한 이야기는 현재 알려져 있는 종교의 이야기에도 대부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도 아이들이나 원시 사회를 유지한 종족들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기도 합니다.

 

  아이들 중 누군가가 궁금한 것을 이야기할 때 그것에 대답하는 아이는 거의 대부분 정해져 있으며, 그 아이는 '똑똑한 아이'로 (조금 과장하면) 숭배됩니다. '똑똑한 아이'의 대답이 옳건 그르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대답은 대개 아이가 멋대로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질문을 던진 아이는 호기심을 해결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호기심은 인류 문명의 원천이나 개개인이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그 자신이 고민하며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모르는 것은 무조건 물으면 된다, 그리고 그 말을 믿으면 된다는 사고 방식은 그 자신과 인류 사회를 퇴보시킬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 방식의 중심에는 '(신이 말했다는 진리를) 의심하지 말라'라는 내용을 담은 종교가 존재합니다.

 

  여러 종교에는 물론 좋은 내용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교에서 주장하는 '모든 이에 대한 사랑'이 대표적이겠지요. 하지만, 종교란 결국 궁금한 것,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을 모두 '신의 이름'에 넘겨 버리는 행위에 다름 없습니다.

 

  '종교를 믿는 이가 더 도덕적'이라는 주장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이러한 주장의 근간에는 인간이라면 스스로 판단해야만 할 기본적인 도덕조차 신의 뜻에 맡긴다는 무책임한 사고 방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랜 옛날부터 종교광들은 '신의 이름'이라는 말 아래 각종 만행을 자행한 것입니다.

 

  인간은 의심하고 호기심을 갖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호기심은 우리에게 파괴의 상징이자 재생의 상징인 불을 가져다 주었고, 우리 인류가 현재에 이르는 문명을 이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물론 모든 일을 의심하고 호기심을 갖고 접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호기심과 궁금증을 홀로 해결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신의 말이건 정부의 말이건, 학자의 말이건, 모든 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면 세상은 퇴보하고 어지러워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힘들게 바뀌기 마련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힘 호기심을 억누르기보다 이를 바탕으로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생각하고 살펴보기를 권합니다. 그것이 인간적인 삶이니까요.

 

  많은 종교에서 "의심하지 말라."라고 거듭 말하는 것 자체가 인간은 본래 '의심하는 동물'이라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여담) 하지만, 세상에는 종교 이외에도 조건 없는 신념이 많이 존재합니다. 각종 도시 전설, 각종 음모론 역시 이러한 조건 없는 신념 중 하나이며, "보라고 부르는 댐을 만들면 강물이 맑아지고 홍수를 막을 수 있다."라는 황당무계한(많은 나라에서 낡은 사고 방식이라고 드러난) 생각을 믿고 밀어붙이는 것 역시 종교나 다를 바 없는 조건 없는 신념, 의심없이 따르는 신념이겠지요.
  그리고, 역사가 입증하듯, 이러한 '진리에 대한 의심없는 신념'은 항상 좋지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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