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도서관에서 간단한 독립 시나리오 형식의 TRPG 플레이가 있었습니다.
룰은 익숙한 D20에서 좀 변형된 D100 기반이었는데, 적응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총 여섯 명이 플레이했습니다만... 이름은 다 잊어버렸군요.(...) 적어 놓는다는 것을 잊어버려서.
뭐 어차피 하루짜리다 보니 캐릭터 메이킹도 생략하고 양산형 군인 파티(...)였던 탓도 있겠지요.
하여간 모두 같은 능력치, 같은 장비, 같은 출신의 군바리 여섯 명의 분대로 게임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리플 쓰다 보니 귀찮아져서 대충대충 넘어가기도 합니다. (...))

==========================================

오늘도 술 질펀하게 먹고 늘어져 자고 있으려니 눈치 없는 분대원이 부장님이 찾으신다고 날 깨웠다.
아 나, 잠 잘 자고 있었는데. 짜증이 밀려와 한 대 치려다 말고 눈만 부라리고 나왔다.

"부르셨다구요?"
"아, 다름이 아니라, 자네 채트마을이라고 아나?"

안 돌아가는 짱구를 돌려 봤지만 도통 기억에 없는 이름이다.

"모르겠는뎁쇼?"
"거 기억력 하곤, 역사책에도 나오는 마을이건만... 쯧쯧쯧."

괜히 딴죽이 걸리니 자다 말고 와서 나빴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 부장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 줬다.
물론 눈치 못 채게, 속으로만.

"그 세계수가 있는 마을 말일세. 뭐, 하도 작은 마을이라 자네가 모를 수도 있겠지. 하여간 그 마을에서 최근 사람들이 실종된다고 하더구만. 그것도 처녀들만 말이야."

뭐, 이쯤 가면 뻔한 이야기이다. 우리 분대보고 가서 해결하란 말이겠지. 어쩌겠나, 까라면 까야지. 어쨌든 군인인데.

"오늘은 이미 늦엇으니 그렇고, 내일 당장 출발하도록 하게. 이틀 정도 거리니까 적당히 준비해도 될 거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대충 인사하고 나온 다음 분대원들을 끌어 모아 채트마을에 대해 아는 게 있나 물었지만 그 근처에 트롤킨이 있다고 언뜻 들었다는 정보를 제외하면 도저히 쓸만한 정보가 없었다. 하긴 우리 사이에 뭐가 있겠냐. 덕분에 오랜만에 외출해서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면서 정보를 모았다. 단골 마담들의 말에 의하면 벌써 거기에 2개 분대가 갔지만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왠지 기분이 으스스해지는데?
돌아오지 못한 놈에게 빌려준 돈좀 대신 갚으라는 말에 대충 손 흔들면서 재빨리 빠져나와 부대로 돌아왔지만, 뭐 정보가 있어야 준비를 하든가 하지, 이거야 원.
그러던 와중에 분대원중 한명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혹시 주임상사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요?"

머리 위쪽에 느낌표가 떠오르는 기분으로 그놈의 뒤통수를 후려 갈긴 다음에 바람같이 주임상사를 찾아갔다.
다행히 주임상사님은 생각보다 쓸만한 정보와 주변 지리 정보를 전해 주었다. 아무래도 그 실종 사건은 2달 전부터 일어난 일인듯.

다음날, 우리들은 채트마을을 향해 출발했고, 첫 날은 별다른 일도 없이 지나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야영을 했다.
하루 밤이 지나고 이틀째, 시간도 오후를 지나갈 무렵 저 멀리 두 인영이 어른어른 보이기 시작했다.
가도 한복판이고, 무장한 군인 여섯명에게 둘이 뭘 어떻게 하랴 싶어 적당히 주시하면서 가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경장 차림에 비해 칼은 꽤나 좋은 걸 쓰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나가려 했더니 갑자기 놈들이 칼을 빼어 들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가진 거 다 내려놓고 가라!" 라니... 이건 바보 아닌가? 코웃음과 함께 전투준비를 명령했다.

전투는 뭐... 예상처럼 시시했다. 놈들은 팔다리 하나씩 잘려 나갔고, 우리들의 피해는 전무했다.
적당히 응급 처치만 해 준 후, 놈들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왜 습격했냐는 질문에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고 잘 대답하던 놈들이 사주한 놈의 정체를 물으니 부들부들 덜면서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목숨을 위협하는데도 말을 하지 않다니. 상태를 보아 하니 말은 하고 싶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분대원중 한 명이 어떤 말을 하면 죽는 류의 흑마법 저주가 걸린 것은 아닐까? 라는 말을 했는데, 확실히 그럴 법 했다. 트롤킨 등의 몬스터를 부리는 흑마법사가 있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그 날은 너무 늦어 거기서 야영 준비를 했고, 다음날 습격한 놈들을 업고 마을로 향하기로 했다.
그다지 쓸만한 정보는 없었지만 일단 마을로 향하는 샛길을 알아내기도 했고, 사주를 한 놈은 마을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마을에 다다라 입구를 슬쩍 보니 농부 같은 두 청년이 농기구를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척 봐도 어설퍼 보이기는 했지만 일단 나 혼자 조용히 접근해보기로 해서 접근하다 실수로 나뭇가지를 밟고 말았다.

"거기 뉘신지?"
"...아, 동물에 쫓겨 길을 잃었습니다."

순간적인 기지로 일단 속이고 시작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던가? 우리는 두 마을 청년(한스와 스미스라 한다)을 구한 은인이 되어 마을에 들어올 수 있었다. 촌장에게 안내받아 사건에 대해 정보를 얻으려 했는데, 두 달 전에 연락해 이번이 첫 응답이란다. 우리가 세 번째라는건 확실한데, 역시 중간에 뭔가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군.
하는 김에 트롤킨 이야기까지 물어 보았는데, 아주 흉폭하고 흉측하게 생긴 놈이라는 것 말고는 특별한 정보가 없었다. 직접적인 습격 사실은 없는 것 같지만 일단 근거지가 어디쯤인지는 알아 두었다. 트롤킨 이야기를 하면서 묘하게 기뻐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수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던지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시간이 늦지 않았기에 바로 옆산에 있다는 트롤킨의 본거지 동굴로 찾아가기로 했다. 동굴을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동굴 속에서 크르릉 하는 짐승 소리와 사람의 다독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자 우리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 두 청년을 조종한 사악한 흑마법사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일단은 정보가 더 필요했다. 동굴 입구에 간단한 함정을 만들고 분대원들을 동굴 입구 위쪽에 올려 놓고 활을 겨누게 시킨 뒤, 나는 갑옷을 벗고 동굴 안으로 잠입하기로 했다. 잠입하고 보니 불빛이 하나도 없이 깜깜한 상태였고, 깊숙한 곳에서 아주 희미한 불빛만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더 확실하게 들린다. 여자가 트롤킨들을 진정시키는 듯 하군. 여자라니! 마녀인가?
하지만 최대한 눈을 찡그리며 자세히 봐도 마법사같지는 않았다. 마을 처녀처럼 보이는데...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해 보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 봤다. 갑옷도 벗은 상태... 들킨다면 쉽게 끝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하필이면 거기 물이 고여있을 건 또 뭔가. 나는 작은 물웅덩이를 밟아 찰박이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도망갈까? 아니야. 내 직감으로 이 여자는 위험하지 않다. 트롤킨들을 부리고는 있지만 명령조가 아닌 친구나 아이를 다독이는 말투다.

"거기 누구죠?"
"실례합니다."
"누구냐니까요?"
트롤킨들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좋지 않군.
"아, 이 근처에서 마을 처녀들이 실종된다는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중입니다."
"이리 나와 보세요."

가까이 다가가자 트롤킨들이 일어선다. 상...당히 크군. 나도 어디 가서 덩치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저건 너무 크다.
난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있고 통하지 않을 상대가 있는 법이지. (쫄았다고는 말 못한다.)

그녀는 마을 촌장의 딸이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마을은 이미 두 달 전에 몰살되었다고 한다. 특히 촌장도 확실히 죽었다고.
그렇다면 내가 본 촌장은 뭐지? 유령인건가? 갑자기 으스스해졌다.

어쨌든 그녀는 내가 정말로 채트 마을을 도와주러 온 사람이라면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다. 하지만 날 믿을 수가 없다고... 하긴, 내 덩치가 좀 커야지. 난 필사적으로 내가 진짜 군인이라는 것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알리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그녀는 내 뒤통수를 내려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깨어났을 때 나는 이미 꽁꽁 묶인 상태였다. 부하가 있다는 것도 이미 털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날 앞세워 동굴에서 나가려는 듯했다. 이놈들이 내 머리에 화살을 꽂아넣을지도 모르는데... 난 갑자기 분대원들을 갈구던 옛 생각이 나면서 오한이 들었다.

동굴을 나가서 벌어진 일은 내가 동굴 안에서 벌였던 일과 대동소이했다. 그놈들이나 나나... 무식한 건 똑같아서 군인이라는 걸 납득시키려는 시도가 모조리 실패해 버린 것이다. 다행히 분대원중 한명이 여자끼리 뭔가 통하는게 있었는지 겨우 납득하고 날 풀어주긴 했지만, 마을에 돌아다니는 '그것'들을 없애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 그것이 뭔지 물어봤지만 대답은 얻을 수가 없었다.

결국 마을로 돌아온 우리는 예의 입구의 청년들의 안내를 받아 촌장 집으로 향했다. 그러던 와중 세계수를 자세히 보고 싶다고 하자 매우 기뻐하며 우리를 한 방향으로 안내했는데, 방향만 알려주고 우리의 뒤에서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닌가? 동굴의 여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수상하다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어 머뭇거리는데, 갑자기 그놈들의 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저 뼈는, 스켈레톤!

뭐 하지만 아무리 뼈가 단단한 스켈레톤이라도 6대 2는 무리였겠지. 서로 아웅다웅 뼈에 튕겨 오르고 갑옷에 튕겨 오르고 하는 와중에 분대원 A의 화살 단 두방에 두 스켈레톤의 머리가 터져 나가면서 일격필살의 활솜씨를 자랑했다. 니가 분대장 해라!

마을 중앙의 세계수 근처에 가니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 주변에 여자 둘과 한스, 스미스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걸 빙 둘러싸서 스켈레톤이, 물경 수백! 마을 사람이 전부 스케레톤이 된 것 같았다. 중앙에는, 뭐 이쯤 오면 누구라도 짐작하겠지만 촌장이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뭔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오냐 나도 한판 해 주마.
활을 꺼내들고 매우 신중하게 조준하기 시작했다. 거리는 약 100m. 내 손을 떠난 화살이 놈의 머리를 꿰뚫는 순간, 분대원이 만든 불화살은 세계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젠 끝이겠지. 조종자도 사라졌고, 원인이 되는 듯한 세계수도 불태웠으니, 라고 생각한 순간, 스켈레톤이 느릿한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건 예상 밖이군.

난 돌파대형으로 생존자들을 구출할 작전을 세웠다. 쐐기 형태로 방패를 좌우에 받친 후 돌격해 스켈레톤의 벽을 뚫고 생존자 네명을 들춰 업었다. 놈들의 속도가 매우 느린 덕에 별다른 방해 없이 마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우리들은 입구를 막고 마을 방벽과 집에 불을 질렀다. 불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로 번졌고, 우리들은 생존자들을 동굴로 데려가 촌장의 딸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끝. 우리들은 팔자에도 없는 영웅 취급을 당했다. 한스와 스미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어 준다면 적당한 보상은 해 줄 용의는 있지. 어쨌든 먼저 덤빈 것은 그쪽이 아닌가! 협박당했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쯤이면 모두에게 해피 앤딩이지. 암.

==================================================================

분대장(리딕)의 시점에서 왜곡되고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본 모험입니다. 쓰다 보니 귀찮아져서 대충대충 때웠네요.
간만에 리플 쓰다 보니 길이 정리도 안되고, 애초에 일지도 안 썼고, 이래저래 멍때리면서 썼네요. 앞으론 이렇게 안 써.
profile

묘실공대 후문 옆 낡은 아파트 담벼락 틈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