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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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조언, 감상, 딴지 모두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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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라이너 로센버그- 헤인 동부 제 3지역
대부분의 전자 장비들이 터져 버려서, 안그래도 조용하던 기지 안은 정말 ‘지나치게’조용해졌다. 기지 안을 걸어다니는 발소리는 물론이고 움직일 때마다 군복이 내는 소리, 심지어는 옆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어쩌다 누군가 기침이라도 하면 온 기지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잔뜩 우울해져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나는 어젯밤에 굉장히 편안하게 잠을 잤다. 옆에서 전자장비들이 쉴새없이 작동하는, 작지만 은근히 거슬리는 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잠시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먼저 일어나서 숙소 밖으로 나갔던 슈벨이 돌아왔다. 표정이 비교적 밝았다.
“비상용 통신장치를 써서 본부와 교신은 했다더군. 이 근처에 있는 기지에서 오는 지원군과 함께 오늘 오전 11시에 다시 공격을 하러 간다고 했어. 비볼테를 거쳐서 톤즈 쪽으로 간다고- 그쪽을 점령하고 나면, 이곳 기지에서 쓸모가 없어져버린 저 컴퓨터들을 대신할 새 컴퓨터들이 온다고 했어. 기능이 몇 가지 없긴 해도 새로 헬멧을 가져오기 전까지는 그냥 저-기, 저기 창고에 보관되어있는 비상용 헬멧을 쓰라는군. 프로그램하고 전자장비만 좀 딸린다 뿐이지 장갑의 두께는 우리가 쓰던 것하고 똑같으니까 불안해하지는 말라고 장교가 그러더라.”
어차피 우리가 어제 바이러스의 습격을 받지 않았더라도 오늘 공격을 가는 것은 정해져 있던 일이었으니, 그다지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슈벨이 아까 자기가 가리켰던 창고로 가서 헬멧을 꺼내왔다. 그리고 부소대장이 누군가를 함께 데리고 왔다.
“이번에 새로 우리 소대를 맡으신 주니흐 에르 산나반 중위님이시다.”
어느새 모여있던 우리 소대 전체가 일제히 경례했고, 산나반 중위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우리에게 경례를 했다. 몸은 날렵해 보였으며 딱 벌어진 어깨와 단정하게 깎인 콧수염이 믿음직한 인상을 주었다.
“이 93번 소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 여러분을 책임지고 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몸 성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말투 또한 힘있으면서도 거칠지 않아서 누군가를 설득하기에는 딱 좋은 목소리였다. 다들 한창 우울해져 있다가 새 소대장이 오니 조금 안심이 되는지 표정들이 밝아졌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에 왔더니 어제 봤던 조르타반 야스히루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배식판을 들고 가서 그를 마주 보고 앉았다.
“어제, 굉장했지요? 내 헬멧도 터져버렸는데, 내가 조금만 늦게 벗었더라면 아마 내 얼굴도 성치 못했을 겁니다. 터지고 나서 헬멧 안쪽을 살짝 들여다 봤더니 온통 파편 투성이더라구요. 어찌나 소름이 끼치던지…….”
조르타반이 겁을 먹었으면서도 뭔가 신난 듯한 표정으로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 운 좋게도 미리 헬멧을 벗어두고 있었지요. 기계음이 없어서였는지, 덕분에 잠 하나는 잘 잤습니다.”
조르타반이 살짝 웃었다. 그는 이미 배식판을 깨끗이 비운 상태였다.
“그러면 저는 밥도 다 먹고 했으니, 이만 우리 소대 쪽으로 집합해야겠군요. 오늘 처음으로 싸우러 나간다고 생각하니까 굉장히 겁이 나는데요! 혹시 톤즈에서 만나게 되면 좀 지켜주십시오-”
농담을 던지면서 일어나는 조르타반에게 다시 인사했다. 슈벨처럼 활기찬 점이 좋았다. 어쩌면, 정말로 톤즈에서 만날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식사를 먹고 나서 다시 우리 소대 쪽으로 집합했다. 다들 진지한 표정이었고, 특히 새로 부임한 산나반 중위 덕분에 우리 소대 전체가 다들 산나반처럼 늠름하고 믿음직하게 보였다. 어제 일 때문으로 처음에 우리가 받았던 헬멧을 쓰고 있는 병사는 두 명 밖에 없었고 다른 병사들은 모두 이곳 창고에서 꺼낸 헬멧을 쓰고 있었는데 정작 쓰고 나니 그 모양새가 상당히 우스꽝스러워서 옆에 있던 슈벨이 픽 웃었다. 이윽고 산나반 중위가 임시 헬멧을 가진 병사들 중 나와 슈벨을 포함한 몇몇에게 통신장비를 주고서 임시용 헬멧의 안쪽에 부착하라고 했다. 아마도 임시용 헬멧은 통신장비의 성능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량기지 쪽으로 갔다. 아직 전투에는 쓰이지 않았던 듯한, 마치 새것같은 보병수송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전차 또한 굉장히 많은 수가 있었다. 우리가 타고 왔던 보병수송차들은 수리가 진행중이었고 (그마저도 어제 바이러스가 침투해 수리 로봇들이 죄다 고장난 모양이지만) 안쪽에 있던 피나 시체 등은 어느정도 수습이 되어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 차량기지는 무진장 넓구만. 이 안에서 축구 경기를 동시에 몇 개나 할 수 있을까나- 야아. 중앙군 녀석들이 어제 큰 건 하나 올린 셈이었겠군.”
슈벨이 옆에서 차량기지의 넓이에 감탄하며 말했다.
“모두 탑승한다! 총, 탄창, 헬멧-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한다! 통신 담당병들은 무전 상태를 확인하라!”
통신 시스템이 생각보다 빨리 복구되고 있었다. 이 기지는 이런 사태를 어느정도 예상해놓고 설계된 듯 했다. 어디에선가 수리 로봇들이 나타나서는 기지 여기저기를 바쁘게 손보고 있었다. 차량들도 상당수가 공격을 받았는지 운전수들 표정이 언짢아 보였다. 그들은 계기판을 만지작거리면서 뭔가를 조종하고 있었는데, 얼굴이 구겨졌다가도 어느정도 펴지기도 하는 것이 시스템 전체가 망가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윽고 보병수송차들부터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고 한 대씩 차량기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경전차가 그 뒤를 따랐고 중전차와 통신담당차, 지휘차와 대공 요격 차량이 그 뒤를 따랐다.
수송차 안에서의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오르지 못하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동안에, 수송차는 큰 흔들림 없이 헤인의 넓은 평지를 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렬로 따라오던 차량들이 뭔가 진형을 갖춘 모양이었지만, 수송차 안에서는 어떻게 배치가 되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보병수송차들이, 특히 내가 탄 이 수송차가 뒤쪽에 배치되어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저녁 늦게야 이멜반 쪽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에 중앙군이 재차 공격을 오지는 않았는지 저번에 떠날 때 남아있던 몇 명이 와서 우리를 반겼다. 그리고는 창고에 남아있던 ‘멀쩡한 편인’ 헬멧 몇 개와 총 몇정, 그리고 대전차 화기등을 어느정도 지원해 주었다.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병사들의 표정이 약간 시무룩한 듯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다시 쿠르젠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곳에도 역시 중앙군은 없었다. 어느정도 이동하다가, 엄청나게 큰 넓이의 까만 구덩이가 보였다. 물론 그 안의 나무들과 잔디 역시 재가 되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쿠르젠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기화폭탄의 공격을 받았던 곳임이 분명했다. 탱크들의 잔해도 수도 없이 많았다. 이번에는 대공 요격차량들이 우리와 함께 이동하니 어느 정도 걱정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송차 안에 탄 병사들은 가끔씩 소곤거리며 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말을 잘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표정이 긴장되었거나 어두운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헤인 기지에서의 ‘따분하지만 평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져서 생사를 걸고 싸우러 간다는 것이 실감이 잘 나지 않는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쿠르젠에서의 습격을 받았던 일이 생각나기 시작해서, 바깥 풍경을 보며 최대한 생각을 머리에서 없애버리려고 노력했다.
쿠르젠에 투입되었던 이후로 나는 계속 쿠르젠이나 헤인 같은 깨끗한 녹지대에서 있어왔다. 아무리 옛날에 비해서 대기 오염이 줄었다고는 해도 분명히 아인그 같은, 인구가 집중되어있는 도시와 이곳과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가족들과 함께 좀더 공기가 좋은 곳으로 이사갈 수 있게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줄곧 조수석에 앉아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던 수송차 지휘관이 우리 쪽을 돌아보고 입을 떼었다.
“야간에도 계속 이동해야 하니, 지금 자두도록. 지무 쪽 기지가 1선은 뚫렸다고 하지만 2선의 저항이 심하다고 한다. 우리의 목표는 3선까지 완전히 돌파하여 지무 기지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니 잠도 못 자고 이틀 동안 계속 싸워야 할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뭐, 자든 안 자든 그건 자네들 자유니까 싸울 때만 안 졸릴 자신 있으면 안 자도 돼.”
병사들이 잠시 투덜대더니 고개를 뒤로 약간 숙여 벽에 대고 졸기 시작했다. 수송차가 조금씩 흔들려서 자는 것이 영 불편했다. 하지만 점점 피곤해져서 나중에는 눈을 일부러 뜨려고 해도 조금씩 감겨왔다.
-5월 24일, 지무 서부 외곽
일어나 보니, 아직도 수송차가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지휘관이 우릴 깨웠다.
“지무에 들어섰다. 1선은 우리가 완전히 장악했고 2선을 향해서 갈 것이다. 다들 전투준비를 완전히 해놓도록. 2선 근방에 들어서서는 하차해서 이동한다."
-지난 5월 16일 전쟁을 선포하고 17일부터 중앙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한 해방 연합은, 지금도 불분명한 명분만을 가지고서 대대적인 침공을 중앙국에 가해오고 있다. 5월 17일 중앙국 국가원수 스틴페르 안토브가 다시 한 번 ‘오존층을 이용한 대량 살상무기 계획’ 관련 청산에 대한 해명을 했음에도 해방군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가해오고 있다. 이에 우리 국제 북부 군사 연합은 이런 해방군의 행동을 규탄하고, 만일 24시간 이내로 중앙국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중앙국 국경 밖으로 모든 병력을 철수시키며 다시는 중앙국 및 다른 국가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중앙국 및 다른 국가들과 맺지 않을 경우에는 국제 북부 군사연합 또한 중앙국에 대한 침략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해방군에 대해 엄중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알린다.-서기 2264년 5월 24일, 국제 북부 군사연합 총 회의단 대표 노민환.
모청- 지무 제 44 방어선기지
2선은 1선보다 훨씬 더 방어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간간히 날아오던 해방군의 야포 사격은 죄다 요격시스템에 의해서 아무 것도 맞추지 못하고 공중에서 허무하게 폭발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그것들을 두려워 하기보다도 오히려 불꽃놀이쯤이나 되는 것처럼 신난 얼굴로 구경하고는 했다. 해방군들이 우리의 야포사격을 막으면서 느꼈을 쾌감을 알겠다는 듯이 흐뭇한 얼굴들이었다.
잠시 기지 안의 차량기지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상관인 듯한 특수부대원 한 명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부대번호 383 소속이로군. 일단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환영하네. 나는 부대번호 253 소속인 특수 침투대 소대장 베렌 사딕이네. 이 곳에 자네 소대원들 중 살아남은 이들이 와 있으니, 그쪽과 합류해서 임무를 하달받도록. 다행히 자네들 소대장도 살아 있다고 하는군.”
까무잡잡한, 약간은 신뢰감이 떨어지는 얼굴에 반해서 그는 말을 조리있게 잘 하는 편이었다. 이내 사딕은 뭔가 불만스런 듯한 표정으로 다른 곳으로 가 버렸고, 데마이어와 나는 그가 기지 안을 안내해 주지 않은 것을 불평하며 아군 기지 안에서 레이더로 자기 소대를 찾아야 하는 매우 멍청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내 우리가 레이더로 우리 소대를 찾아 그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잠시 뒤돌아보니, 나와 데마이어가 데리고 왔던 57 방어선 기지쪽의 병사들이 우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데마이어가 픽 웃더니 그들에게 다가갔다.
“같이 차를 타고 온 병사들 중에 너희 소대원들이 있을 거다. 이제 더 이상은 우리들을 따라다니지 않아도 돼. 그러고 보니, 이 넓은 기지에서 너희 소대를 찾으려면 너희도 레이더를 써야겠군.”
이내 그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우리에게 경례를 한번 하고는 레이더를 쳐다보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데마이어와 나도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차량기지에서 본 기지 쪽으로 가는 긴 통로를 따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전체 강제 교신이 들어왔다.
“북군연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해방군이 24시간 내로 중앙국 영토를 떠나지 않으면 우리와 합세해 해방군에 대해 전면적인 공세를 펼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해방군은 현재 잠시 우리를 향한 진격을 멈춘 상태이니, 좀더 방어준비를 철저히 해놓도록! 운이 좋다면 그들이 이대로 돌아가겠지만, 계속 무모하게 공격을 해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 놓도록 한다! 이렇든 저렇든 우리에게 주어진 24시간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귀중하니 이 시간을 잘 활용해 중앙국을 침략자들로부터 지켜내는 데 쓰도록 한다!”
데마이어가 이게 웬일이냐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다른 곳에서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소리가 통로를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 데마이어가 만면에 희색을 띄며 입을 떼었다.
“경사 났네. 해방군 자식들이 저렇게 날뛰는데 왜 북군연이 가만히 있나 했어. 아주 잘 됐군! 우리가 가진 부담도 좀 덜어질 테고, 해방군이 이기기는 더욱 힘들어질 테지. 잘만 하면 우리가 반대로 해방연합을 ‘해방’시킬 수도 있겠는걸.”
내가 데마이어가 한 말을 듣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데마이어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세계 전쟁인가. 이쯤 되면 세계 3차대전이라고 불러도 되겠는걸. 그 옛날 위험했던 핵무기야 다 폐기했으니 누가 꼭꼭 숨겨놨던 걸 날리면 몰라도 웬만하면 안 쓰일 테고, 기껏해야 폭발 범위가 좁은 장거리 미사일 정도가 쓰이겠지. 그마저도 요격당할 위험이 크니까 그닥 쓰일 것 같지는 않고, 뭐 결국 세계 2차 대전때랑 별반 다를 것이 없겠군. 기껏해야 뭐, 크래커들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정도겠네.”
“문제는 남군연이야. 요즘 북군연과 마찰이 좀 있었다는데, 현재 남군연 회원국의 영토 안에서 로봇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과연 이 전쟁에 관해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중요하겠지.”
내가 짧게 대답을 해도 데마이어는 신나서 이야기를 자꾸 풀어놓기 시작했다.
“하기야, 자기네 문제도 처리하느라 골치를 썩는데 이 전쟁에 개입을 하려고 하겠어? 남군연이 해방군 쪽에 붙으면 정말 세계 대전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몇 달 안 돼서 금방 끝날 지도 모르겠군.”
“헛소리 작작 하고, 빨리 우리 소대와 합류하자. 잡담하느라 늦어졌잖아.”
데마이어가 이야기 하는 것을 간단히 끊어버리자, 데마이어는 잠시 불만스런 표정이었다가 이내 '뭐 이녀석이 이렇지‘ 하고 납득하는 표정으로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라이너 로센버그- 지무 서부 외곽
내가 타고 있던 수송차는 지무에 들어선 후 속력을 조금 줄이더니 이내 어느정도 더 가다가 멈춰 버렸다. 수송차 지휘관이 뭔가 통신을 받더니 이내 매우 낭패를 본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대기한다. 방금 북군연이 우리가 24시간 내로 중앙국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그들도 우리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단 상부에서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공격을 더 갈 수 없으니, 비상시를 대비해 전투준비는 해놓도록.”
갑자기 수송차 안이 어수선해졌다. 어떤 병사들은 한숨을 쉬었고 어떤 병사들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긴장이 풀리는 듯 했고 어떤 이는 더욱 더 긴장하기도 했다. 이대로는 톤즈까지 가기는커녕 다시 후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내가 여태껏 해온 일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해방군이 이대로 밀어 붙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도 이대로 전쟁이 끝나게 되면 그저 며칠간 끔찍한 꿈을 꾸었다 생각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슈벨이 옆에서 총을 만지작 거리면서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기에, 말을 걸었다.
“너는 해방군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잘 모르겠어. 이대로 게속 싸우게 되면 북군연이 개입해서 우리가 훨씬 불리해 질테고, 그렇다고 다시 후퇴해 버리면 아무래도 중앙국 보다는 우리 쪽이 더 불리한 상황이 되겠지. 이유야 어떻든 먼저 공격을 한 건 해방군이니까.”
“어떻게 되든 간에, 일단 해방군에게는 불리하다는 이야기구나. 상황이 좋게 풀리면 좋을 텐데-”
“개인적으로, 계속 싸우게 된다면 남군연이 우리를 도와주면 좋겠어. 하지만 그쪽도 최근의 ‘로봇 사건’ 때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잘 쓰지 못할텐데- 걱정이다.”
슈벨이 한숨을 쉬고는 머리를 벽에 기댔다.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나 또한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중앙국은 대량 살상무기를 다시 개발하려고 했고, 그 때문에 해방군이 위험을 무릅쓰고 중앙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것인데 어째서 북군연은 중앙국을 도우려 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를 않았다. 중앙국이 강대국이기 때문에 눈치를 보려는 것일 수도 있었으나, 북군연이나 남군연이나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행동할 연합이 아니었다. 연합 수뇌부를 맡고 있는 지도자들 또한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서)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올바른 판단을 한다는 것 정도는 나도 방송에서 자주 접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북군연에서 해방군이 아닌 중앙국을 도우려 한다는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쯤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다시 내가 너무 깊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될까 두려워 생각을 멈추었다.
1선에서는 중앙군의 저항이 더 이상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부의 지시 때문에 아군은 1선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앞쪽에 온통 파편에 뒤덮이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지무 1선 기지의 폐허가 보였다. 종종 아군 전차들의 잔해도 보였다. 전투가 치열했던 모양이었다.
다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니 지쳤는지 몇몇은 졸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흘러가다가 차 안에서 그대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차량 안에서 지급되는 급식은 달랑 식량 튜브 하나 뿐이었다. 주먹 두 개 크기보다 조금 더 큰 튜브 안에 무엇을 넣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특별히 맛있는지 맛이 없는지조차 알기 힘든 반죽을 입 안에 짜넣고 우물거리다가 삼키는 일은 밥을 먹는다기 보다는 차라리 노동에 가까웠다. 지급된 식수도 얼마 되지 않아 아껴 마셔야 했다.
그렇게 점심을 해결하고 그냥 계속 수송차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그저 화장실이 급하다는 몇몇만 가끔씩 수송차 밖으로 나가곤 했다. 밖에는 벌써 간이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진 오헨- 테르 제 9 주민거주지
어느 정도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서 나와 페곤은 잠에서 깼다. 로봇들이 다시 공격을 시작한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병사들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져서 소대장에게 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드디어 로봇들이 다른 지역의 공장들에서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남군연에 가입한 나라들의 공장들만 골라서 크랙 당해서, 남군연 본부에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반연합 행위’로 규정한 모양이야. 이제 테르 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엄청난 규모의 정규군이 투입될 것이라고 하는군. 이쪽도 정규군이 훨씬 더 많이 지원을 올 것이라고 하니, 조금 안심해도 될 듯 하다.”
소대장의 말과는 정 반대로 나는 되려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크래커들의 능력이나 숫자나 모두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 듯 했다. 안그래도 북군연도 중앙국을 돕기로 했다고 하고, 이러다가 점점 더 문제가 뒤엉켜 엄청난 규모의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점점 더 걱정이 되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같이 듣던 페곤도 얼굴이 어두웠다.
-5월 25일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중앙국은 분명히 대량 살상무기를 다시 개발하려 했고 해방군의 중앙 전산망을 크랙하려 했다. 그들은 해방군의 지휘체계를 교란시키려 했고, 이때를 틈타 선제공격을 하려 했다. 이에 해방군은 해방연합 가입 국가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하여 전쟁을 선포했고, 이는 연합 가입국토 방위 행위에 해당되므로 국제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따라서 북군연은 중앙국에 협조하는 행위를 신속히 중지하고, 중앙국이 조속히 대량 살상무기 재개발에 대한 계획을 취소하고 이를 인정하며 주위 국가들에게 배상하도록 행동하기 바란다.- 해방연합력 17년 5월 25일 대륙 해방연합 총사령관 마티아스 카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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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로센버그- 헤인 동부 제 3지역
대부분의 전자 장비들이 터져 버려서, 안그래도 조용하던 기지 안은 정말 ‘지나치게’조용해졌다. 기지 안을 걸어다니는 발소리는 물론이고 움직일 때마다 군복이 내는 소리, 심지어는 옆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어쩌다 누군가 기침이라도 하면 온 기지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잔뜩 우울해져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나는 어젯밤에 굉장히 편안하게 잠을 잤다. 옆에서 전자장비들이 쉴새없이 작동하는, 작지만 은근히 거슬리는 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잠시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먼저 일어나서 숙소 밖으로 나갔던 슈벨이 돌아왔다. 표정이 비교적 밝았다.
“비상용 통신장치를 써서 본부와 교신은 했다더군. 이 근처에 있는 기지에서 오는 지원군과 함께 오늘 오전 11시에 다시 공격을 하러 간다고 했어. 비볼테를 거쳐서 톤즈 쪽으로 간다고- 그쪽을 점령하고 나면, 이곳 기지에서 쓸모가 없어져버린 저 컴퓨터들을 대신할 새 컴퓨터들이 온다고 했어. 기능이 몇 가지 없긴 해도 새로 헬멧을 가져오기 전까지는 그냥 저-기, 저기 창고에 보관되어있는 비상용 헬멧을 쓰라는군. 프로그램하고 전자장비만 좀 딸린다 뿐이지 장갑의 두께는 우리가 쓰던 것하고 똑같으니까 불안해하지는 말라고 장교가 그러더라.”
어차피 우리가 어제 바이러스의 습격을 받지 않았더라도 오늘 공격을 가는 것은 정해져 있던 일이었으니, 그다지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슈벨이 아까 자기가 가리켰던 창고로 가서 헬멧을 꺼내왔다. 그리고 부소대장이 누군가를 함께 데리고 왔다.
“이번에 새로 우리 소대를 맡으신 주니흐 에르 산나반 중위님이시다.”
어느새 모여있던 우리 소대 전체가 일제히 경례했고, 산나반 중위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우리에게 경례를 했다. 몸은 날렵해 보였으며 딱 벌어진 어깨와 단정하게 깎인 콧수염이 믿음직한 인상을 주었다.
“이 93번 소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 여러분을 책임지고 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몸 성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말투 또한 힘있으면서도 거칠지 않아서 누군가를 설득하기에는 딱 좋은 목소리였다. 다들 한창 우울해져 있다가 새 소대장이 오니 조금 안심이 되는지 표정들이 밝아졌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에 왔더니 어제 봤던 조르타반 야스히루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배식판을 들고 가서 그를 마주 보고 앉았다.
“어제, 굉장했지요? 내 헬멧도 터져버렸는데, 내가 조금만 늦게 벗었더라면 아마 내 얼굴도 성치 못했을 겁니다. 터지고 나서 헬멧 안쪽을 살짝 들여다 봤더니 온통 파편 투성이더라구요. 어찌나 소름이 끼치던지…….”
조르타반이 겁을 먹었으면서도 뭔가 신난 듯한 표정으로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 운 좋게도 미리 헬멧을 벗어두고 있었지요. 기계음이 없어서였는지, 덕분에 잠 하나는 잘 잤습니다.”
조르타반이 살짝 웃었다. 그는 이미 배식판을 깨끗이 비운 상태였다.
“그러면 저는 밥도 다 먹고 했으니, 이만 우리 소대 쪽으로 집합해야겠군요. 오늘 처음으로 싸우러 나간다고 생각하니까 굉장히 겁이 나는데요! 혹시 톤즈에서 만나게 되면 좀 지켜주십시오-”
농담을 던지면서 일어나는 조르타반에게 다시 인사했다. 슈벨처럼 활기찬 점이 좋았다. 어쩌면, 정말로 톤즈에서 만날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식사를 먹고 나서 다시 우리 소대 쪽으로 집합했다. 다들 진지한 표정이었고, 특히 새로 부임한 산나반 중위 덕분에 우리 소대 전체가 다들 산나반처럼 늠름하고 믿음직하게 보였다. 어제 일 때문으로 처음에 우리가 받았던 헬멧을 쓰고 있는 병사는 두 명 밖에 없었고 다른 병사들은 모두 이곳 창고에서 꺼낸 헬멧을 쓰고 있었는데 정작 쓰고 나니 그 모양새가 상당히 우스꽝스러워서 옆에 있던 슈벨이 픽 웃었다. 이윽고 산나반 중위가 임시 헬멧을 가진 병사들 중 나와 슈벨을 포함한 몇몇에게 통신장비를 주고서 임시용 헬멧의 안쪽에 부착하라고 했다. 아마도 임시용 헬멧은 통신장비의 성능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량기지 쪽으로 갔다. 아직 전투에는 쓰이지 않았던 듯한, 마치 새것같은 보병수송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전차 또한 굉장히 많은 수가 있었다. 우리가 타고 왔던 보병수송차들은 수리가 진행중이었고 (그마저도 어제 바이러스가 침투해 수리 로봇들이 죄다 고장난 모양이지만) 안쪽에 있던 피나 시체 등은 어느정도 수습이 되어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 차량기지는 무진장 넓구만. 이 안에서 축구 경기를 동시에 몇 개나 할 수 있을까나- 야아. 중앙군 녀석들이 어제 큰 건 하나 올린 셈이었겠군.”
슈벨이 옆에서 차량기지의 넓이에 감탄하며 말했다.
“모두 탑승한다! 총, 탄창, 헬멧-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한다! 통신 담당병들은 무전 상태를 확인하라!”
통신 시스템이 생각보다 빨리 복구되고 있었다. 이 기지는 이런 사태를 어느정도 예상해놓고 설계된 듯 했다. 어디에선가 수리 로봇들이 나타나서는 기지 여기저기를 바쁘게 손보고 있었다. 차량들도 상당수가 공격을 받았는지 운전수들 표정이 언짢아 보였다. 그들은 계기판을 만지작거리면서 뭔가를 조종하고 있었는데, 얼굴이 구겨졌다가도 어느정도 펴지기도 하는 것이 시스템 전체가 망가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윽고 보병수송차들부터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고 한 대씩 차량기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경전차가 그 뒤를 따랐고 중전차와 통신담당차, 지휘차와 대공 요격 차량이 그 뒤를 따랐다.
수송차 안에서의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오르지 못하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동안에, 수송차는 큰 흔들림 없이 헤인의 넓은 평지를 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렬로 따라오던 차량들이 뭔가 진형을 갖춘 모양이었지만, 수송차 안에서는 어떻게 배치가 되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보병수송차들이, 특히 내가 탄 이 수송차가 뒤쪽에 배치되어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저녁 늦게야 이멜반 쪽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에 중앙군이 재차 공격을 오지는 않았는지 저번에 떠날 때 남아있던 몇 명이 와서 우리를 반겼다. 그리고는 창고에 남아있던 ‘멀쩡한 편인’ 헬멧 몇 개와 총 몇정, 그리고 대전차 화기등을 어느정도 지원해 주었다.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병사들의 표정이 약간 시무룩한 듯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다시 쿠르젠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곳에도 역시 중앙군은 없었다. 어느정도 이동하다가, 엄청나게 큰 넓이의 까만 구덩이가 보였다. 물론 그 안의 나무들과 잔디 역시 재가 되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쿠르젠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기화폭탄의 공격을 받았던 곳임이 분명했다. 탱크들의 잔해도 수도 없이 많았다. 이번에는 대공 요격차량들이 우리와 함께 이동하니 어느 정도 걱정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송차 안에 탄 병사들은 가끔씩 소곤거리며 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말을 잘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표정이 긴장되었거나 어두운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헤인 기지에서의 ‘따분하지만 평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져서 생사를 걸고 싸우러 간다는 것이 실감이 잘 나지 않는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쿠르젠에서의 습격을 받았던 일이 생각나기 시작해서, 바깥 풍경을 보며 최대한 생각을 머리에서 없애버리려고 노력했다.
쿠르젠에 투입되었던 이후로 나는 계속 쿠르젠이나 헤인 같은 깨끗한 녹지대에서 있어왔다. 아무리 옛날에 비해서 대기 오염이 줄었다고는 해도 분명히 아인그 같은, 인구가 집중되어있는 도시와 이곳과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가족들과 함께 좀더 공기가 좋은 곳으로 이사갈 수 있게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줄곧 조수석에 앉아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던 수송차 지휘관이 우리 쪽을 돌아보고 입을 떼었다.
“야간에도 계속 이동해야 하니, 지금 자두도록. 지무 쪽 기지가 1선은 뚫렸다고 하지만 2선의 저항이 심하다고 한다. 우리의 목표는 3선까지 완전히 돌파하여 지무 기지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니 잠도 못 자고 이틀 동안 계속 싸워야 할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뭐, 자든 안 자든 그건 자네들 자유니까 싸울 때만 안 졸릴 자신 있으면 안 자도 돼.”
병사들이 잠시 투덜대더니 고개를 뒤로 약간 숙여 벽에 대고 졸기 시작했다. 수송차가 조금씩 흔들려서 자는 것이 영 불편했다. 하지만 점점 피곤해져서 나중에는 눈을 일부러 뜨려고 해도 조금씩 감겨왔다.
-5월 24일, 지무 서부 외곽
일어나 보니, 아직도 수송차가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지휘관이 우릴 깨웠다.
“지무에 들어섰다. 1선은 우리가 완전히 장악했고 2선을 향해서 갈 것이다. 다들 전투준비를 완전히 해놓도록. 2선 근방에 들어서서는 하차해서 이동한다."
-지난 5월 16일 전쟁을 선포하고 17일부터 중앙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한 해방 연합은, 지금도 불분명한 명분만을 가지고서 대대적인 침공을 중앙국에 가해오고 있다. 5월 17일 중앙국 국가원수 스틴페르 안토브가 다시 한 번 ‘오존층을 이용한 대량 살상무기 계획’ 관련 청산에 대한 해명을 했음에도 해방군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가해오고 있다. 이에 우리 국제 북부 군사 연합은 이런 해방군의 행동을 규탄하고, 만일 24시간 이내로 중앙국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중앙국 국경 밖으로 모든 병력을 철수시키며 다시는 중앙국 및 다른 국가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중앙국 및 다른 국가들과 맺지 않을 경우에는 국제 북부 군사연합 또한 중앙국에 대한 침략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해방군에 대해 엄중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알린다.-서기 2264년 5월 24일, 국제 북부 군사연합 총 회의단 대표 노민환.
모청- 지무 제 44 방어선기지
2선은 1선보다 훨씬 더 방어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간간히 날아오던 해방군의 야포 사격은 죄다 요격시스템에 의해서 아무 것도 맞추지 못하고 공중에서 허무하게 폭발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그것들을 두려워 하기보다도 오히려 불꽃놀이쯤이나 되는 것처럼 신난 얼굴로 구경하고는 했다. 해방군들이 우리의 야포사격을 막으면서 느꼈을 쾌감을 알겠다는 듯이 흐뭇한 얼굴들이었다.
잠시 기지 안의 차량기지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상관인 듯한 특수부대원 한 명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부대번호 383 소속이로군. 일단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환영하네. 나는 부대번호 253 소속인 특수 침투대 소대장 베렌 사딕이네. 이 곳에 자네 소대원들 중 살아남은 이들이 와 있으니, 그쪽과 합류해서 임무를 하달받도록. 다행히 자네들 소대장도 살아 있다고 하는군.”
까무잡잡한, 약간은 신뢰감이 떨어지는 얼굴에 반해서 그는 말을 조리있게 잘 하는 편이었다. 이내 사딕은 뭔가 불만스런 듯한 표정으로 다른 곳으로 가 버렸고, 데마이어와 나는 그가 기지 안을 안내해 주지 않은 것을 불평하며 아군 기지 안에서 레이더로 자기 소대를 찾아야 하는 매우 멍청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내 우리가 레이더로 우리 소대를 찾아 그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잠시 뒤돌아보니, 나와 데마이어가 데리고 왔던 57 방어선 기지쪽의 병사들이 우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데마이어가 픽 웃더니 그들에게 다가갔다.
“같이 차를 타고 온 병사들 중에 너희 소대원들이 있을 거다. 이제 더 이상은 우리들을 따라다니지 않아도 돼. 그러고 보니, 이 넓은 기지에서 너희 소대를 찾으려면 너희도 레이더를 써야겠군.”
이내 그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우리에게 경례를 한번 하고는 레이더를 쳐다보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데마이어와 나도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차량기지에서 본 기지 쪽으로 가는 긴 통로를 따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전체 강제 교신이 들어왔다.
“북군연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해방군이 24시간 내로 중앙국 영토를 떠나지 않으면 우리와 합세해 해방군에 대해 전면적인 공세를 펼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해방군은 현재 잠시 우리를 향한 진격을 멈춘 상태이니, 좀더 방어준비를 철저히 해놓도록! 운이 좋다면 그들이 이대로 돌아가겠지만, 계속 무모하게 공격을 해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 놓도록 한다! 이렇든 저렇든 우리에게 주어진 24시간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귀중하니 이 시간을 잘 활용해 중앙국을 침략자들로부터 지켜내는 데 쓰도록 한다!”
데마이어가 이게 웬일이냐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다른 곳에서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소리가 통로를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 데마이어가 만면에 희색을 띄며 입을 떼었다.
“경사 났네. 해방군 자식들이 저렇게 날뛰는데 왜 북군연이 가만히 있나 했어. 아주 잘 됐군! 우리가 가진 부담도 좀 덜어질 테고, 해방군이 이기기는 더욱 힘들어질 테지. 잘만 하면 우리가 반대로 해방연합을 ‘해방’시킬 수도 있겠는걸.”
내가 데마이어가 한 말을 듣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데마이어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세계 전쟁인가. 이쯤 되면 세계 3차대전이라고 불러도 되겠는걸. 그 옛날 위험했던 핵무기야 다 폐기했으니 누가 꼭꼭 숨겨놨던 걸 날리면 몰라도 웬만하면 안 쓰일 테고, 기껏해야 폭발 범위가 좁은 장거리 미사일 정도가 쓰이겠지. 그마저도 요격당할 위험이 크니까 그닥 쓰일 것 같지는 않고, 뭐 결국 세계 2차 대전때랑 별반 다를 것이 없겠군. 기껏해야 뭐, 크래커들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정도겠네.”
“문제는 남군연이야. 요즘 북군연과 마찰이 좀 있었다는데, 현재 남군연 회원국의 영토 안에서 로봇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과연 이 전쟁에 관해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중요하겠지.”
내가 짧게 대답을 해도 데마이어는 신나서 이야기를 자꾸 풀어놓기 시작했다.
“하기야, 자기네 문제도 처리하느라 골치를 썩는데 이 전쟁에 개입을 하려고 하겠어? 남군연이 해방군 쪽에 붙으면 정말 세계 대전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몇 달 안 돼서 금방 끝날 지도 모르겠군.”
“헛소리 작작 하고, 빨리 우리 소대와 합류하자. 잡담하느라 늦어졌잖아.”
데마이어가 이야기 하는 것을 간단히 끊어버리자, 데마이어는 잠시 불만스런 표정이었다가 이내 '뭐 이녀석이 이렇지‘ 하고 납득하는 표정으로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라이너 로센버그- 지무 서부 외곽
내가 타고 있던 수송차는 지무에 들어선 후 속력을 조금 줄이더니 이내 어느정도 더 가다가 멈춰 버렸다. 수송차 지휘관이 뭔가 통신을 받더니 이내 매우 낭패를 본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대기한다. 방금 북군연이 우리가 24시간 내로 중앙국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그들도 우리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단 상부에서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공격을 더 갈 수 없으니, 비상시를 대비해 전투준비는 해놓도록.”
갑자기 수송차 안이 어수선해졌다. 어떤 병사들은 한숨을 쉬었고 어떤 병사들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긴장이 풀리는 듯 했고 어떤 이는 더욱 더 긴장하기도 했다. 이대로는 톤즈까지 가기는커녕 다시 후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내가 여태껏 해온 일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해방군이 이대로 밀어 붙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도 이대로 전쟁이 끝나게 되면 그저 며칠간 끔찍한 꿈을 꾸었다 생각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슈벨이 옆에서 총을 만지작 거리면서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기에, 말을 걸었다.
“너는 해방군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잘 모르겠어. 이대로 게속 싸우게 되면 북군연이 개입해서 우리가 훨씬 불리해 질테고, 그렇다고 다시 후퇴해 버리면 아무래도 중앙국 보다는 우리 쪽이 더 불리한 상황이 되겠지. 이유야 어떻든 먼저 공격을 한 건 해방군이니까.”
“어떻게 되든 간에, 일단 해방군에게는 불리하다는 이야기구나. 상황이 좋게 풀리면 좋을 텐데-”
“개인적으로, 계속 싸우게 된다면 남군연이 우리를 도와주면 좋겠어. 하지만 그쪽도 최근의 ‘로봇 사건’ 때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잘 쓰지 못할텐데- 걱정이다.”
슈벨이 한숨을 쉬고는 머리를 벽에 기댔다.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나 또한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중앙국은 대량 살상무기를 다시 개발하려고 했고, 그 때문에 해방군이 위험을 무릅쓰고 중앙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것인데 어째서 북군연은 중앙국을 도우려 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를 않았다. 중앙국이 강대국이기 때문에 눈치를 보려는 것일 수도 있었으나, 북군연이나 남군연이나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행동할 연합이 아니었다. 연합 수뇌부를 맡고 있는 지도자들 또한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서)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올바른 판단을 한다는 것 정도는 나도 방송에서 자주 접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북군연에서 해방군이 아닌 중앙국을 도우려 한다는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쯤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다시 내가 너무 깊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될까 두려워 생각을 멈추었다.
1선에서는 중앙군의 저항이 더 이상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부의 지시 때문에 아군은 1선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앞쪽에 온통 파편에 뒤덮이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지무 1선 기지의 폐허가 보였다. 종종 아군 전차들의 잔해도 보였다. 전투가 치열했던 모양이었다.
다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니 지쳤는지 몇몇은 졸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흘러가다가 차 안에서 그대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차량 안에서 지급되는 급식은 달랑 식량 튜브 하나 뿐이었다. 주먹 두 개 크기보다 조금 더 큰 튜브 안에 무엇을 넣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특별히 맛있는지 맛이 없는지조차 알기 힘든 반죽을 입 안에 짜넣고 우물거리다가 삼키는 일은 밥을 먹는다기 보다는 차라리 노동에 가까웠다. 지급된 식수도 얼마 되지 않아 아껴 마셔야 했다.
그렇게 점심을 해결하고 그냥 계속 수송차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그저 화장실이 급하다는 몇몇만 가끔씩 수송차 밖으로 나가곤 했다. 밖에는 벌써 간이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진 오헨- 테르 제 9 주민거주지
어느 정도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서 나와 페곤은 잠에서 깼다. 로봇들이 다시 공격을 시작한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병사들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져서 소대장에게 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드디어 로봇들이 다른 지역의 공장들에서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남군연에 가입한 나라들의 공장들만 골라서 크랙 당해서, 남군연 본부에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반연합 행위’로 규정한 모양이야. 이제 테르 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엄청난 규모의 정규군이 투입될 것이라고 하는군. 이쪽도 정규군이 훨씬 더 많이 지원을 올 것이라고 하니, 조금 안심해도 될 듯 하다.”
소대장의 말과는 정 반대로 나는 되려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크래커들의 능력이나 숫자나 모두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 듯 했다. 안그래도 북군연도 중앙국을 돕기로 했다고 하고, 이러다가 점점 더 문제가 뒤엉켜 엄청난 규모의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점점 더 걱정이 되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같이 듣던 페곤도 얼굴이 어두웠다.
-5월 25일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중앙국은 분명히 대량 살상무기를 다시 개발하려 했고 해방군의 중앙 전산망을 크랙하려 했다. 그들은 해방군의 지휘체계를 교란시키려 했고, 이때를 틈타 선제공격을 하려 했다. 이에 해방군은 해방연합 가입 국가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하여 전쟁을 선포했고, 이는 연합 가입국토 방위 행위에 해당되므로 국제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따라서 북군연은 중앙국에 협조하는 행위를 신속히 중지하고, 중앙국이 조속히 대량 살상무기 재개발에 대한 계획을 취소하고 이를 인정하며 주위 국가들에게 배상하도록 행동하기 바란다.- 해방연합력 17년 5월 25일 대륙 해방연합 총사령관 마티아스 카하일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