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슈퍼 로봇 이야기, 괴수/괴인/초인 이야기 외에... 다양한 작품과 장르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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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한 <인터스텔라>는 우주탐험물입니다. 그 중에서도
경이적인 우주탐험물에 속하겠죠. 설정이나 발상 자체는 꽤나 전형적입니다. 아마 우주탐험물 좀 읽어본 관객이라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할
거에요. 우주탐험물 별로 안 좋아하는 저도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예상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니 여기서 아서 클라크나 론 하버드, 폴 앤더슨 뺨치는
원대한 상상력을 기대하면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재앙을 해결하는 과정은 약간 시시하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중반부까지 상당히 몰입해서 봤지만,
후반부 전개는 흥미가 하강 곡선을 그리더군요. 솔직히 감독이 진짜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은 저런 우주적인 경이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보다 미지의
장소를 찾아가는 인류의 도전 정신과 뚝심을 그리려고 했던 듯합니다. 극한 환경으로 향하는 여정이라면 우주만한 것도 없죠. 지구를 벗어난다는 이미지
때문에 탐험계의 최종보스나 다름없으니까요.
인류의 역사는 탐험의 역사라고 할만합니다. 고대부터 사람들은 전세계로 멀리, 더
멀리 퍼졌습니다. 처음에는 두 다리로 걸었고,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고, 배를 지어서 바다까지 넘어갔죠.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누비고, 극지방과
고산지대까지 목숨을 무릅쓰고 돌진했습니다. 지금도 깊은 바다로 내려가서 기이한 생태계를 조사하는가 하면, 화성에 로봇을 보내 붉은 풍경을 관찰하죠.
비록 무인이지만, 태양계를 돌파(!)한 탐사선도 있고요. <인터스텔라>에 담긴 정서는 이러한 온갖 탐험의 로망과 상통합니다.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아도, 가면 죽을 가능성이 높아 보여도, 끝내 멈추지 않고 지평선 너머로 떠나는 정신 말입니다. 예로부터 탐험은 인간 승리를 찍기
위한 소재로 각광 받았고, 우주처럼 극한의 장소라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보금자리였던 지구를 떠나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리를 날아가니까요. 웜홀까지
통과하니 아예 다른 세계로 넘어갑니다. 세상에 이만큼 극적인 탐험 이야기가 또 있을까요.
탐험물로서 <인터스텔라>는 매번 새로운 경지에 다다릅니다. 요람 같은
고향별을 떠나고, 태양계 행성을 지나고, 마침내 웜홀에 돌입하고, 낯선 행성에 도착하고…. 각각의 순간들은 짜릿한 호기심을 자극하며, 미지로 향하는
설렘이 가득합니다. 지금은 사라진, 과거 80년대 꿈꿨던 우주적인 낭만이랄까요. 그런 게 작중에 흘러 넘칩니다. 80년대 감성을 21세기 블록버스터에
도입하다니, 감독이 무슨 생각인지 알만합니다. 그런 만큼, 우주선이나 행성을 보여주는 기법도 고전적입니다. 일부러 낡은 느낌이 들게 만들었죠.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를 찍으면서 옛날 가족 영화를 언급했는데, 딱 그런 감성입니다.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도 한몫 합니다. 그렇다고 죄다 구닥다리인 건 아닙니다. 모던하고 세려된 느낌을
아예 내치지 않습니다. 비율을 따지자면, 고전적인 느낌이 많이 난다는 뜻이에요. 비단 화면만 그런 게 아니라 영화에 담긴 정서나 이야기 구조,
갈등 관계 역시 아련한 추억을 상기시킵니다. 다소 신파극으로 흘러갈 우려도 있지만, 배우들의 열연과 진중한 연출 덕분에 엄숙함을 잃지 않습니다.
특히 탐험의 동기는 생존과 가족(연인)입니다. 인류의 미래라는 거창한 목적과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개인적인 이유가 결합하고 또한 충돌합니다. 당연히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해도 순조로운 여정일 리 없죠. 대의명분을 품고 출발했지만, 우주선
승무원 또한 사람인 것을 어쩌겠습니까.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는가 하면, 이기심을 내비치기도 하죠. 불가능한 여정인 데다가 서로 의견 차이까지 발생하니,
매 순간이 고비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별에 두고 온 승무원들도 그렇지만, 지구에 남은 사람들도 다를 바 없습니다. 어제까지 함께 하던
가족이 보이지 않는 창공으로 날아갔잖아요. 어디에 있는지, 무사히 잘 지내는지, 탐험은 어떻게 되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영화는 이처럼
우주를 넘어선 사랑과 그리움, 미련을 시공간까지 거스르며 보여줍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는 매튜 매커너히의 연기가 빛납니다. 남우주연상도 모자라지
않을 듯. 감독이 시간 뒤섞기에 전문이라 그런지, 다소 복잡한 상황도 능숙하게 풀어나가네요.
놀란 감독의 플롯 연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봅니다. 참신하고 현란하게 전개하느냐,
아니면 우직하고 꾸준히 전진하느냐. 이 중에서 <인터스텔라>는 후자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극적인 완성도를 향해 한 걸음씩 나갑니다.
어떤 대목은 너무 느리게 흘러가느라 약간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장면조차 함부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손길이 느껴집니다. 압도적인
영상미와 섬세한 디테일 때문이겠죠. 뭔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밀고 나가기보다 기존 우주탐험물의 공식이나 설정을 끌어와서 결합합니다. 익숙한 대신
그걸 생생한 영상으로 구현하는 데 치중합니다. 아무리 참신한 발상이라도 글로 읽고 상상하는 것에는 일종의 한계가 있잖아요. 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인
만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죠. 감독은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을 위해 성대하고 웅장한 볼거리를 내놓습니다. 이것 때문이라도
극장 관람을 놓치면 안 되겠죠. (웜홀이나 우주 풍경보다는 우주선이나 로봇 디자인이 훨씬 좋았습니다.)
언뜻 하드 SF처럼 보이지만, 웜홀을 통과하고 시간의 상대성을 적용하는 과정은 그리 하드한 것 같지 않습니다. 물리학 지식이 부족한지라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기가 힘드네요. 과학적이고 기발한 발상으로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하드 SF의 분위기와 구성을 따라가는 쪽에 가깝습니다. 다만, 우주탐험물에 관심 없는 일반 관객에게는 꽤나 골머리 아프겠죠. 아무리 간략하게 넘어가도 상대성 이론은 쉬운 게 아니잖아요. 특히 웜홀을 통과하며, 시간이 벌어지는 과정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듯. 이야기 흐름이 둔중한데다 이렇게 복잡한 이론까지 적용하니, 하품 나온다는 소리가 쉽게 나오겠네요. <라마와의 랑데부>나 <타우 제로>, <투 더 스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영화 초반부터 꾸벅꾸벅 졸 겁니다. 저런 작품들보다 그래도 대중적인 쪽에 치우치긴 했지만, 딱딱한 건 마찬가지죠. 호불호를 떠나서 애초에 하드 SF 우주여행물은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이 영화를 <그래비티>랑 비교하는 관객이 많더군요. 하지만 애초에 방향성과
주제부터 다르지 않나 싶습니다. 한쪽은 탐험물, 한쪽은 표류물이잖아요. 물론 가장 최근에 나온 우주 영화들 중에 <그래비티>가 큰 인기를
끌긴 했습니다만. 이 영화에는 낯선 곳에 도전하는 로망이 부족하죠. <인터스텔라>는 주인공부터 창공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는 인물입니다.
SF보다 테크노 스릴러에 가깝지만, 차라리 <아폴로 13>이나 <스페이스 카우보이> 같은 물건이 비교하기 적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차피 <그래비티>도 근미래 SF니까요. 놀란은 자기 영화의 모티브로 <필사의 도전>을 꼽기도 했죠. 저는 제일 비슷하게
떠오른 작품이 위에서 언급한 <투 더 스타>였습니다. 이건 영화가 아니라 소설이지만, 시간의 상대성을 적용한 작품이기에 자꾸 생각났어요.
특히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머나먼 여행을 떠나는 설정은, 크아~. (승무원들도 울고, 관객도 울고….)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탐험의 아픔과 함께 로봇이었습니다. 보조 로봇을
데려가는데, 구조가 꽤나 독특하더군요. 일견 단순한 모양 같지만,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심부름꾼입니다. 여타 등장인물 못지않게 비중이 큰 터라
이 녀석의 대사나 행동거지를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모름지기 극한 환경 탐험이라면, 로봇(인공지능)이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지할 곳
없는 우주에서 언제나 인간을 지지해주는 존재는 든든하고 정겹죠. 그게 비록 기계일지라도 말입니다. 극단적인 위기가 닥쳤을 때,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임무도 실행할 수 있고요. 인간이 잠든 사이에 홀로 우주선을 지키는 모습이나 위험이 코 앞에 닥쳤는데도 인간을 구하러 뛰어드는 모습, 자기 안위를
돌보지 않고 기꺼이 임무를 완수하는 모습 등은 언제나 뭉클합니다. 플롯에 좀 더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까지 중요한 캐릭터는
아니라서 아쉽네요.
반면,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블랙홀 관련요소였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익숙한
공식이라서 그런 것 같네요. 게다가 초~중반의 인간적인 도전 과정이 이것 때문에 허물어지는 감도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들의 땀과 눈물을 그릴 거라면,
그냥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게 좋았을 텐데…. 꼭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야 했느냐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막판 결말은 마음에 들었지만.
<인터스텔라>는 우주탐험물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작품입니다. 혹여 그런 낭만을 잊었다면 이걸 보고 다시 되살릴 수 있겠죠. 클라크나 앤더슨처럼 전설로 남을만한 작품이냐고 물으면, 좀 애매합니다만. 해당 장르를 좋아한다면, 분명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표값이 아깝지는 않을 것 같네요.
늘 그렇듯이 쓸데없이 긴 글을 써서 제 불만을 표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