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만화, 소설, 다큐멘터리 등 모든 작품에 대한 이야기. 정보나 감상, 잡담.
슈퍼 로봇 이야기, 괴수/괴인/초인 이야기 외에... 다양한 작품과 장르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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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플롯 자체는 매우 간단하므로 스포일러라고 할 게 없을지 모르겠고, 중요한 건 영상미라고 생각하지만 떠오르는 대로 이런 저런 얘기를 쓴 거라 안 본 분들은 가급적 뒤로가길 눌러주시길 바랍니다.
0. 요즘 세상이 좋아지다보니 DVD나 영화 다운로드 같은 것들이 용이해져서, 뭔가 영화관에 가서만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아지는 듯 합니다. 물론 홈시어터 같은 것도 있긴 하지만 비싸니까...;; 거대한 화면, 어두컴컴하면서 넓음이 느껴지는 공간(불 끈 자취방이나 비좁은 DVD방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분이죠), 그리고 몸 속까지 울리는 사운드 같은, 큰 스케일을 이용한 볼거리라고 할까요? 근래 바빠서 시간 내기가 어려우니 그래비티도 굉장히 벼르고 벼르다가 용산 cgv아이맥스에서 봤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비싼 표값은 충분히 하는 볼거리였습니다.
1. 플롯은 별 거 없긴 하지만 그게 도리어 더 깔끔해서 적절합니다. 듣자하니 배급사에서 러시아가 미사일로 위성을 박살내는 씬 같은 것들을 넣으라고 요구했지만 다 차단했다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요즘 영화들을 보다보면 아니 겨우 2시간에 뭘 그리 우겨넣으려고 하는지 갑자기 주된 줄기와 별 관계 없는 로맨스는 왜 나오는지 등등 말 그대로 사족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잡다한 것들은 다 잘라내고 순전히 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만 보여주는 것이 무한하고 광막한 느낌, 우주 공간 한 복판에 버려진 자그마한 인간이 느낄 만한 그런 느낌을 살려내는데 기여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지상의 휴스턴과 교신하는 장면이 나온다든지, 마지막에 다시 신호가 잡힐 때 환호성을 지르면서 얼싸안고 박수치고... 이런 흔한 장면이 나왔으면 그 전의 분위기를 팍삭 깎아먹었을 겁니다.
2. 개인적으로는 아니 우주복 딸랑 입고 익스플로러->소유즈->텐궁으로 그렇게 쉽게 옮겨가는 게 말이 되나-_-...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안 그러면 정말로 살아남을 방법이 없으니까... 고도, 궤도, 각도, 거리 등등 하나하나 따지다보면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는 3차원에서 우주복도 없이 랑데부하는 건 말도 안 되고 그냥 궤도상에서 바둥거리다가 산소가 떨어져서 서서히 죽어갔다. 로 끝날테니 스토리를 이어가기 위해서라 치고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너무 고증 따지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선바이저를 한번도 안 내리는 것도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랬다간 표정 연기도 전혀 안 보일테니;
3. 처음 로봇 팔이 잘리고 우주공간으로 튕겨져 나가서 막 빙글빙글 돌아갈 때는 확실히 우주적인 공포 내지는 무한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감을 넘어선 공포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공수업시간에 배우기로는 사람 시각이 금방 적응하기 때문에 입체안경 같은 것으로 내는 3D효과는 영화가 상영될 수록 점점 못 느끼게 된다고 했는데, 아직 상영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오 진짜 튀어나오는 거 같아 이런 시점에서 빙글빙글 돌고 휙 튕겨나가고 하니까 등골이 오싹해지더군요. 사실 그 후야 계속 어찌어찌 살아가니까, 그래 최소한 죽지는 않겠지 뭔가 방법을 찾아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또 뭔가 일이 꼬일꺼야...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정도로 긴장되지는 않았는데 이 부분은 확실히 무시무시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뭘 하기는 커녕 지금 자기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지 위는 어디고 아래는 어딘지도 모르고 텅 빈 3차원 공간으로 내던져진 작디작은 인간의 공포. 거대하게 비쳐보이는 지구가 눈 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상황에서 빨리 자세를 잡지 않으면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튕겨나갈 건데 당장 허우적거리는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자세를 바로잡을 방법도 없죠.
약간 여담이긴 하지만 라이언 박사가 영화 내내 지르는 짤막한 비명이(으아! 내지는 므아!로 들리는...-_-;) 호머 심슨의 D'oh!같은 느낌도 나기도 했습니다만 다른 공포영화 같은데서 나오는 찢어지는 듯한 과장된 비명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느낌을 주면서 그래서 더 공감할 만한 지속적인 공포를 줍니다. 깜짝 놀래키거나 엄청 잔혹한 장면이 나오면서 관객을 긴장하게 만드는 순간적인 공포가 아니라 무력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깜짝 놀래키는 공포에 가까운 건 익스플로러 호로 돌아갔을 때 화성인 마빈 피규어가 지나간 다음 얼어붙은 시체와 얼굴이 마주칠 때 정도?
4. 라이언 박사가 소유즈에 막 들어가서 우주복을 휙 벗어버리고 웅크릴 때 배경의 늘어진 파이프가 겹치면서 탯줄이 달린 태아처럼 보이게 한 씬은 과하게 노골적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씬들에서처는 은근하고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것에 비해 조금 아쉬웠습니다. 대학 1학년 미학 교양 수업시간에 ppt 발표 자료에 넣기 좋은 장면이라고 할까... 영화평들을 보면 무중력 공간에서의 중력은 물체와 물체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며, 처음에는 딸을 잃고 허무에 빠진 채 주위와 단절되어 있던 라이언 박사가 이후 관계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그런 씬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별로 제가 동감이 가는 해석은 아니기 때문에; 물체와 물체 사이에서 생기는 중력 같은 얘기로 볼 만한 건덕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볼 거면 무중력 공간에서 관성으로 날아가다 부딪히고 잡아채는 순간 각운동량 보존법칙으로 홱 각도가 꺾여서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고... 등은 인간 관계에서 충돌이 발생하는 걸 나타낸다는 거냐 싶기도 하네요. 차라리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안정을 갈구할 때(중력이 그런 안정을 나타낼 수도 있겠네요)의 퇴행이라든가, 역시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프로이트 식의 자궁회귀욕망 같은 쪽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이 부분은 작위적인 느낌이 나는 바람에 몰입감을 좀 깨서 저한테는 마이너스.
5. 능글능글한 매트 코왈츠키는 조지 클루니가 참 잘 어울립니다. 둘다 죽지 않기 위해 손을 놓고 멀어져 간다든지, 이후에 환상으로 나타나서 한 얘기 같은 건 너무 뻔하기는 하죠. 라이언 박사의 딸 얘기도 좀 뻔하기는 하지만... 소유즈 모듈에서 자살하려고 산소를 열어놓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을 콩콩 두드리고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헐??? 설마??? 여태까지 진지해놓고 이제와서 지구 한 바퀴 돌아서 따라왔다거나 하는 식이면 화낼거야!! 하고 생각하는 순간 저산소증으로 환각을 본 게 밝혀져서 그나마 다행이긴 했습니다. 과연 여동생 손을 잡고 있던 털투성이 남자는 누구였는지 궁금하군요. 소유즈로 들어간 라이언 박사가 무전으로 호출할 때 틀림없이 살아 있었지만 자기 구하러 온다고 나올까봐 대답하지 않았다... 정도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6. 천궁까지 갈 때 소화기도 설마 저걸 써서 날아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정말 쓰는 걸 보니; 이건 월E가 떠올라서 좀 웃겼습니다. 그래 살아야지! 하고 결심한 다음 소화기로 날아가니... 소화기 하나에 가스가 얼마나 들었다고! 하는 식으로 고증을 꼬투리 잡는 게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쓰일 수 있겠지 싶긴 하면서도 월E를 그 전에 본 바람에 자연스럽게 먼저 연상이 되어버리네요.
7. 영화의 해석에 대해서. 어떤 친구는 이건 지구인은 우주로 기어나올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땅바닥에 발 붙이고 살아라, 송충이는 솔잎이나 먹어라, 집떠나면 개고생이라는 귀중한 교훈을 전달해준다(그러니 SPAAAAAAAACE!!!!는 꿈도 꾸지 마라)는 비관적인 입장이었고-_-; 다른 친구는 뭘 하든 다 ㅈ되는 상황을 봐라, 롱테이크 기법도 그렇고 거대한 우주와 보잘것없는 인간을 극도로 대비시켜서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거다, 영웅적으로 탐험을 나서고 자연을 정복하고 그런 거 없다, 채울 수 없이 광막하고 공허한 우주... 등등 마찬가지로 좀 비관적인 해석이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렇게까지 비관적이지는 않고, 관계가 어쩌고 사람과 사이의 인력이 어쩌고 하면서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해서 해석할 생각도 없습니다. 영화 전체에서 전개나 장면의 구도나 화면 이동 등에서 강조하는 것은 미약한 인간이 위아래 못 찾고 끝없이 허공으로 떨어져내리는, 광막하고 냉엄하고 자비를 모르는 압도적으로 거대한 우주입니다. 반면 마지막 장면에서 물가로 기어나온 라이언 박사가 얼굴을 땅에 댄 채로 흙을 움켜쥐면서 웃고, 휘청거리는 다리로 일어서면서 끝나는 것은 중력이 미치는 세계, 일상적이고 두 발 딛고 사는 세계로, 돌아올 집으로 귀환하는 걸 나타내죠. 제목인 gravity에 비해 라이언 박사가 죽어라 고생하는 우주공간은 무중력(+각운동량 보존 법칙)의 세계라서 어쩌면 zero gravity 같은 제목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까 4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극한 상황에서 갈구하게 되는 안정감을 상징하는 것이 중력이라고 봅니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플롯, 진부한 배경설정들, 최소화한 등장인물 수는 곁가지들을 쳐내고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내던져진 개인을 부각시켜서, 흔히 재난 영화가 전달하는 정서인 재난 이전으로의 회귀 욕구만을 극대화한 것이다... 라는 게 제 의견입니다. 그런 회귀욕구는 기본적이면서도 근원적이라서 사람을 깊은 뿌리에서 건드리고, 그게 이 영화가 주는 몰입감, 호소력이 아닌가 합니다.
8. 옆자리에 한 가족이 앉아 있었는데(그 덕에 이른바 명당 자리가 한 칸 비어서 재빨리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나니 애가 '영화 지루했다. 빨리 나가자'고 보챘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 아빠가 '숨도 크게 안 쉬고 바짝 긴장해서 봤으면서 지루했다니'라고 말하면서도 애가 나가자는 대로 나가더군요. 플롯이 단순한 탓에 분명히 지루하다는 평이 나올 수도 있지만, 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그걸 위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회를 먹을 때 초장을 많이 찍으면 본래 향을 가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전에 본 프로메테우스 같은 경우 분명 영상미가 훌륭했습니다만 에일리언 프리퀄+피조물과 창조주 관계의 중첩이라는 플롯 역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입니다. 다른 부분들이 극도로 자제하면서 영상을 통해서 전달하는 정서를 강하게 만드는거죠. 0에서 한 얘기를 덧붙이면, 그런 점에서 그래비티는 영화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0. 요즘 세상이 좋아지다보니 DVD나 영화 다운로드 같은 것들이 용이해져서, 뭔가 영화관에 가서만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아지는 듯 합니다. 물론 홈시어터 같은 것도 있긴 하지만 비싸니까...;; 거대한 화면, 어두컴컴하면서 넓음이 느껴지는 공간(불 끈 자취방이나 비좁은 DVD방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분이죠), 그리고 몸 속까지 울리는 사운드 같은, 큰 스케일을 이용한 볼거리라고 할까요? 근래 바빠서 시간 내기가 어려우니 그래비티도 굉장히 벼르고 벼르다가 용산 cgv아이맥스에서 봤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비싼 표값은 충분히 하는 볼거리였습니다.
1. 플롯은 별 거 없긴 하지만 그게 도리어 더 깔끔해서 적절합니다. 듣자하니 배급사에서 러시아가 미사일로 위성을 박살내는 씬 같은 것들을 넣으라고 요구했지만 다 차단했다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요즘 영화들을 보다보면 아니 겨우 2시간에 뭘 그리 우겨넣으려고 하는지 갑자기 주된 줄기와 별 관계 없는 로맨스는 왜 나오는지 등등 말 그대로 사족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잡다한 것들은 다 잘라내고 순전히 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만 보여주는 것이 무한하고 광막한 느낌, 우주 공간 한 복판에 버려진 자그마한 인간이 느낄 만한 그런 느낌을 살려내는데 기여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지상의 휴스턴과 교신하는 장면이 나온다든지, 마지막에 다시 신호가 잡힐 때 환호성을 지르면서 얼싸안고 박수치고... 이런 흔한 장면이 나왔으면 그 전의 분위기를 팍삭 깎아먹었을 겁니다.
2. 개인적으로는 아니 우주복 딸랑 입고 익스플로러->소유즈->텐궁으로 그렇게 쉽게 옮겨가는 게 말이 되나-_-...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안 그러면 정말로 살아남을 방법이 없으니까... 고도, 궤도, 각도, 거리 등등 하나하나 따지다보면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는 3차원에서 우주복도 없이 랑데부하는 건 말도 안 되고 그냥 궤도상에서 바둥거리다가 산소가 떨어져서 서서히 죽어갔다. 로 끝날테니 스토리를 이어가기 위해서라 치고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너무 고증 따지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선바이저를 한번도 안 내리는 것도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랬다간 표정 연기도 전혀 안 보일테니;
3. 처음 로봇 팔이 잘리고 우주공간으로 튕겨져 나가서 막 빙글빙글 돌아갈 때는 확실히 우주적인 공포 내지는 무한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감을 넘어선 공포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공수업시간에 배우기로는 사람 시각이 금방 적응하기 때문에 입체안경 같은 것으로 내는 3D효과는 영화가 상영될 수록 점점 못 느끼게 된다고 했는데, 아직 상영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오 진짜 튀어나오는 거 같아 이런 시점에서 빙글빙글 돌고 휙 튕겨나가고 하니까 등골이 오싹해지더군요. 사실 그 후야 계속 어찌어찌 살아가니까, 그래 최소한 죽지는 않겠지 뭔가 방법을 찾아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또 뭔가 일이 꼬일꺼야...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정도로 긴장되지는 않았는데 이 부분은 확실히 무시무시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뭘 하기는 커녕 지금 자기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지 위는 어디고 아래는 어딘지도 모르고 텅 빈 3차원 공간으로 내던져진 작디작은 인간의 공포. 거대하게 비쳐보이는 지구가 눈 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상황에서 빨리 자세를 잡지 않으면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튕겨나갈 건데 당장 허우적거리는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자세를 바로잡을 방법도 없죠.
약간 여담이긴 하지만 라이언 박사가 영화 내내 지르는 짤막한 비명이(으아! 내지는 므아!로 들리는...-_-;) 호머 심슨의 D'oh!같은 느낌도 나기도 했습니다만 다른 공포영화 같은데서 나오는 찢어지는 듯한 과장된 비명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느낌을 주면서 그래서 더 공감할 만한 지속적인 공포를 줍니다. 깜짝 놀래키거나 엄청 잔혹한 장면이 나오면서 관객을 긴장하게 만드는 순간적인 공포가 아니라 무력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깜짝 놀래키는 공포에 가까운 건 익스플로러 호로 돌아갔을 때 화성인 마빈 피규어가 지나간 다음 얼어붙은 시체와 얼굴이 마주칠 때 정도?
4. 라이언 박사가 소유즈에 막 들어가서 우주복을 휙 벗어버리고 웅크릴 때 배경의 늘어진 파이프가 겹치면서 탯줄이 달린 태아처럼 보이게 한 씬은 과하게 노골적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씬들에서처는 은근하고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것에 비해 조금 아쉬웠습니다. 대학 1학년 미학 교양 수업시간에 ppt 발표 자료에 넣기 좋은 장면이라고 할까... 영화평들을 보면 무중력 공간에서의 중력은 물체와 물체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며, 처음에는 딸을 잃고 허무에 빠진 채 주위와 단절되어 있던 라이언 박사가 이후 관계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그런 씬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별로 제가 동감이 가는 해석은 아니기 때문에; 물체와 물체 사이에서 생기는 중력 같은 얘기로 볼 만한 건덕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볼 거면 무중력 공간에서 관성으로 날아가다 부딪히고 잡아채는 순간 각운동량 보존법칙으로 홱 각도가 꺾여서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고... 등은 인간 관계에서 충돌이 발생하는 걸 나타낸다는 거냐 싶기도 하네요. 차라리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안정을 갈구할 때(중력이 그런 안정을 나타낼 수도 있겠네요)의 퇴행이라든가, 역시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프로이트 식의 자궁회귀욕망 같은 쪽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이 부분은 작위적인 느낌이 나는 바람에 몰입감을 좀 깨서 저한테는 마이너스.
5. 능글능글한 매트 코왈츠키는 조지 클루니가 참 잘 어울립니다. 둘다 죽지 않기 위해 손을 놓고 멀어져 간다든지, 이후에 환상으로 나타나서 한 얘기 같은 건 너무 뻔하기는 하죠. 라이언 박사의 딸 얘기도 좀 뻔하기는 하지만... 소유즈 모듈에서 자살하려고 산소를 열어놓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을 콩콩 두드리고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헐??? 설마??? 여태까지 진지해놓고 이제와서 지구 한 바퀴 돌아서 따라왔다거나 하는 식이면 화낼거야!! 하고 생각하는 순간 저산소증으로 환각을 본 게 밝혀져서 그나마 다행이긴 했습니다. 과연 여동생 손을 잡고 있던 털투성이 남자는 누구였는지 궁금하군요. 소유즈로 들어간 라이언 박사가 무전으로 호출할 때 틀림없이 살아 있었지만 자기 구하러 온다고 나올까봐 대답하지 않았다... 정도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6. 천궁까지 갈 때 소화기도 설마 저걸 써서 날아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정말 쓰는 걸 보니; 이건 월E가 떠올라서 좀 웃겼습니다. 그래 살아야지! 하고 결심한 다음 소화기로 날아가니... 소화기 하나에 가스가 얼마나 들었다고! 하는 식으로 고증을 꼬투리 잡는 게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쓰일 수 있겠지 싶긴 하면서도 월E를 그 전에 본 바람에 자연스럽게 먼저 연상이 되어버리네요.
7. 영화의 해석에 대해서. 어떤 친구는 이건 지구인은 우주로 기어나올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땅바닥에 발 붙이고 살아라, 송충이는 솔잎이나 먹어라, 집떠나면 개고생이라는 귀중한 교훈을 전달해준다(그러니 SPAAAAAAAACE!!!!는 꿈도 꾸지 마라)는 비관적인 입장이었고-_-; 다른 친구는 뭘 하든 다 ㅈ되는 상황을 봐라, 롱테이크 기법도 그렇고 거대한 우주와 보잘것없는 인간을 극도로 대비시켜서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거다, 영웅적으로 탐험을 나서고 자연을 정복하고 그런 거 없다, 채울 수 없이 광막하고 공허한 우주... 등등 마찬가지로 좀 비관적인 해석이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렇게까지 비관적이지는 않고, 관계가 어쩌고 사람과 사이의 인력이 어쩌고 하면서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해서 해석할 생각도 없습니다. 영화 전체에서 전개나 장면의 구도나 화면 이동 등에서 강조하는 것은 미약한 인간이 위아래 못 찾고 끝없이 허공으로 떨어져내리는, 광막하고 냉엄하고 자비를 모르는 압도적으로 거대한 우주입니다. 반면 마지막 장면에서 물가로 기어나온 라이언 박사가 얼굴을 땅에 댄 채로 흙을 움켜쥐면서 웃고, 휘청거리는 다리로 일어서면서 끝나는 것은 중력이 미치는 세계, 일상적이고 두 발 딛고 사는 세계로, 돌아올 집으로 귀환하는 걸 나타내죠. 제목인 gravity에 비해 라이언 박사가 죽어라 고생하는 우주공간은 무중력(+각운동량 보존 법칙)의 세계라서 어쩌면 zero gravity 같은 제목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까 4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극한 상황에서 갈구하게 되는 안정감을 상징하는 것이 중력이라고 봅니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플롯, 진부한 배경설정들, 최소화한 등장인물 수는 곁가지들을 쳐내고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내던져진 개인을 부각시켜서, 흔히 재난 영화가 전달하는 정서인 재난 이전으로의 회귀 욕구만을 극대화한 것이다... 라는 게 제 의견입니다. 그런 회귀욕구는 기본적이면서도 근원적이라서 사람을 깊은 뿌리에서 건드리고, 그게 이 영화가 주는 몰입감, 호소력이 아닌가 합니다.
8. 옆자리에 한 가족이 앉아 있었는데(그 덕에 이른바 명당 자리가 한 칸 비어서 재빨리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나니 애가 '영화 지루했다. 빨리 나가자'고 보챘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 아빠가 '숨도 크게 안 쉬고 바짝 긴장해서 봤으면서 지루했다니'라고 말하면서도 애가 나가자는 대로 나가더군요. 플롯이 단순한 탓에 분명히 지루하다는 평이 나올 수도 있지만, 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그걸 위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회를 먹을 때 초장을 많이 찍으면 본래 향을 가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전에 본 프로메테우스 같은 경우 분명 영상미가 훌륭했습니다만 에일리언 프리퀄+피조물과 창조주 관계의 중첩이라는 플롯 역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입니다. 다른 부분들이 극도로 자제하면서 영상을 통해서 전달하는 정서를 강하게 만드는거죠. 0에서 한 얘기를 덧붙이면, 그런 점에서 그래비티는 영화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티끌 같은 세상속에 작은 모래알 하나,
한바탕 미친 바람 불고 나면 그 간 곳을 모르온저
단순하지만 진짜로 단순한 영화는 아니죠. 소화기 씬만 해도 영화내에서 추진용으로 쓸 수 있다고 한 번 복선 깔아주고(ISS 내부에서 불 끄려는 장면) 다시 써먹는 거고...탯줄 장면을 살짝 노골적으로 틀어주는 것도 대중성을 위해서라고 이해했습니다.
영화 본게 그렇게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30여년 인생에서 손에 꼽을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배우의 캐스팅도 훌륭하고 영상은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죠. 특히 스토리에 대해서는 'Simple is the best' 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는데 공감합니다. SF 영화사에 손꼽을만하지 않을까 싶네요. 스페이스 오디세이, 아폴로 13호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올려놓아야겠어요.
이야기가 간단한 건 체험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방편이라고 봤습니다. 주인공의 위기에 최대한 몰입해야 하는데, 여기다 자질구레한 다른 이야기 끼워넣으면 곤란하니까요. 타란티노 같은 사람은 별별 곁가지를 다 집어넣지만, 이런 작품에서는 오히려 그게 해가 되겠죠. 고증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게 가뜩이나 담백한 플롯에다가 고증까지 지키려면 정말 무미건조해질 것 같습니다. 그런 거 좋아하는 소수 관객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감독이 대중성에 좀 더 손을 뻗은 느낌이더군요. 네드리님 말씀처럼 태아 이미지도 그렇고요.
우주적인 공포는 그 뭐랄까, 중립적인 물리 법칙이 이다지도 무서울 줄은 몰랐네요. 다른 의미로 코즈믹 호러라는 표현이 어울릴 듯. 과연 이걸 DVD/블루레이로 다시 보면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극장의 그 감성이 되살아날지, 아니면 그보다 못할지…. 어쨌든 4D나 아이맥스가 아니라도 꼭 극장 가서 봐야 할 작품입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