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괴된 사나이>, <타이거! 타이거!>, <쿼런틴>, <인간을 넘어서>, <블러드 뮤직>, <네 인생의 이야기>의 내용 누설 있습니다.


종종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원작을 살리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텍스트는 상상력을 유도하는 쪽이고, 영상은 직접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쪽이죠. 매체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줄거리만 따라가면 혹평을 받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일부 장르 문학은 여기에 더해서 설정이란 게 들어갑니다. 그리고 텍스트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해서 설정을 묘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SF 세계관의 설정, 그러니까 초능력이나 이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여러 수법을 동원한다는 뜻입니다. 글자로 유희하거나, 모호한 묘사를 몇 페이지씩 늘어놓거나, 문법을 파괴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죠. SF만 그런 게 아니라 환상문학이면 왕왕 보이는 수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작품들은 하도 수법이 독특하기에 영화로는 도저히 재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설정 표현 방법을 아예 빼버리자니 작품의 핵심 요소라서 그럴 수도 없고요.



개인적으로 이런 걸 절실히 느낀 게 베스터 소설입니다. <파괴된 사나이> <타이거! 타이거!>를 읽으면서 그랬죠. 두 작품은 모두 초인이 주인공이며, 전자는 텔레파시 능력자가 다량으로 나옵니다. 후자는 존트라고 하는 텔레포트 능력을 다루죠. 그런데 작중의 초능력 묘사는 그저 단순한 서술이나 묘사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텔레파시의 경우, 생각이 서로 오가고 허공에 떠다니는 걸 강조하기 위해 문장 형식을 마구잡이로 파괴합니다. 문장을 백지에다가 쓰는가 하면, 몇 개 문구가 아무렇게나 뒤섞이기도 하죠. 초현실주의 산문시를 보는 것 같다고 할까요. 존트는 한술 더 뜹니다. 그나마 초~중반부에는 평범한 서술이 주류이지만, 막판 걸리버 포일이 능력 발휘할 때는 아예 글자로 그림을 그립니다. 타이포그라피를 몇 페이지에 걸쳐 늘어놓는데, 독자가 주인공을 따라 시공간을 뛰어넘는 느낌이에요. , 이런 걸 영상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렉 이건이 쓴 <쿼런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평행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특별한 기교나 문법 파괴까지 가진 않아요. 하지만 머릿속에 별별 모드가 다 들었다는 게 큰일이죠. 이 모드란 것은 대략 두뇌로 움직이는 컴퓨터인데, 단순한 유희용부터 일상 업무 처리를 거쳐 복잡한 연구용까지 종류도 무궁무진합니다. 사념으로 이루어지는 인터페이스를 영상으로 보여준다면 글쎄요. 그리 만만치 않은 작업일 듯합니다. 시각적인 서술도 일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쉽지만은 않겠죠. 무엇보다 모드를 이용한 확산-수축이 까다로울 겁니다. 사용자가 스스로 평행세계 중 하나를 고르는 행위입니다. 일반인은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지만, 선천적으로 가능한 인물도 있고, 모드를 써도 됩니다. 한꺼번에 수많은 세계가 분열되었다가 고의로 하나를 선택하고, 그게 압축되어서 하나만 남는 과정이라니, 생각만 해도 골이 지끈거리지 않습니까.



시어도어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도 꽤 골치 아픈 책이죠. 작중에는 여러 초인이 나오는데, 대개 사이킥 능력자입니다. 사람 정신을 조종하거나 어떠한 사념 속으로 빠져들거나 합니다. 그러면서 통합 정신체로 바뀌는데, 하도 서술이 오묘해서 글자만 읽어도 눈이 돌아갈 지경입니다. 그만큼 작가의 상상력은 뛰어나지만, 영상으로 옮기기는 힘들겠죠. 그렇다고 스크린에 글자를 좔좔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통합 정신체라고 하니, <블러드 뮤직>도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자기 몸에 주사한 인공 세포가 지성이 생겨 결국 세계를 녹이고 하나의 개체로 합친다는 내용입니다. 지성이 있는 세포의 교류를 나타내는 것도 관건이거니와 세계 통합을 무슨 수로 화면에 보여줄지 모르겠습니다. 이 바닥의 떡밥 대표 주자인 <에반게리온>이 해법이라는 의견도 있겠지만, <에반게리온>의 표현 방식으로 <인간을 넘어서>를 그려내긴 어렵지 않을까요.



테드 창이 쓴 <네 인생의 이야기>도 머리 싸매게 만듭니다. 외계인의 문장을 분석해 그들과 소통하는 줄거리인데, 문법이 참 괴악하죠. 우리는 좌우(혹은 상하) 방향으로 글을 읽습니다. 그래서 순차적인 방식에 익숙하고, 기본적인 사고 체계도 그러합니다. ‘과거-현재-미래가 항상 무의식 중에 박혔습니다. 하지만 작중에 나오는 외계인은 문장을 한번에 읽습니다. 빨리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동시에 본다는 뜻입니다. 이들의 사고 체계는 인간과 다르게 순차적인 게 아니라 동시성이 있고, 그래서 사건의 인과를 단숨에 인식합니다. 과거를 알아보고 미래를 예지한다고 하면 될까요. 덕분에 외계 문법을 연구하는 주인공마저 미래를 예지하는 초인으로 각성하기 이릅니다. 이 과정은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데, 만약 이걸 영상으로 만든다면 어찌해야 좋을지 상상이 안 가더군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한 <이해>는 거의 머리 터질 지경.



코멕 매카시가 쓴 <로드>도 영화화가 까다로운 소설이라고 봅니다. 이미 영상화가 되긴 했지만, 소설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영화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소설 특성이 독특해서 영화로 살려내기 힘든 거죠. 매카시는 희한하게도 이 작품에서 따옴표를 안 씁니다. 일반적인 소설에서 인물이 대화하거나 생각할 때는 따옴표나 괄호가 들어가기 마련인데, 그런 게 하나도 없어요. 덕분에 서술과 대화가 단절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흐른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런 효과는 작중 멸망한 세계의 고요함과 어울리고요. 하지만 문장부호 생략을 영화에서 재현할 수가 없으니, 그냥 대사 처리를 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원작의 중요한 특징이 묻혀버린 셈이죠. 영화도 미장센이나 배우 연기 등등 다 좋았고, 상당한 수작입니다만. 소설의 표현법을 영화라는 매체로 옮기는 것에는 미흡했습니다.



위에서 사례를 든 작품들은 대개 사변적이거나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사례로 들지 않았지만, 다른 사변 소설들도 비슷할 듯하네요. 추상적인 사고 방식을 표현하는 데는 직접 보여주는 영상보다 상상을 이끌어내는 텍스트가 낫죠. 그래서 사례로 든 작품이 영화화가 어려운 거 아닌가 싶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유고작 <골드>를 쓴 심정이 바로 그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