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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쳐 하나로 저 희대의 저격 장면을 설명하지 못함이 통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영화 <원티드>에 관한 약간의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영화 <원티드>는 목표물을 저격하는 암살자들의 활약을 화끈한 연출로 담은 작품입니다. 티무르 베크맘베토브가 감독을 맡았으며, 모건 프리먼, 안젤리나 졸리, 제임스 맥아보이 등이 감각 있는 암살자들을 연기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를 꼽으라면,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상대를 저격하는 암살 과정일 겁니다. <원티드>는 암살 영화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초인물로도 볼 수 있는데 등장인물들이 일반인과는 다르게 반사신경이 과다하게 빠르며 감각이 뛰어나다고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이들은 주몽이 화살로 파리를 쏜 것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정밀한 사격을 하며, 제아무리 빨리 움직이는 물체도 잡아낼 수 있고, 심지어는 총알의 궤적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 어떤 상처도 치유할 수 있는 비법까지 있으니 그저 그런 킬러라곤 볼 수 없죠.

 

설정상 어떻게 저런 인류가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초인물이라면, 초인들의 기원을 조금이나마 설명해줄 법도 한데 그런 친절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대사 한 마디로 당신은 민첩하고 감각적이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하는 게 전부입니다. 이 영화는 원작만화가 있다고도 하는데, 원작에서는 설정이 어찌되는지 모르겠군요. 여하튼 영화는 최소한의 (최소한으로) 초인이 있다는 기본 배경만 깔아두고 그 초인들의 액션으로 짜릿하게 시작합니다. 애초에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은 초인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나 뭐, 그런 주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듯합니다. 그보다 그 초인들이 어떻게 해야 더 멋지고 놀랍게 보일까에 무게를 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상영 시간 내내 두 눈이 즐겁기는 합니다만, 초인물의 기원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살짝 아쉬웠습니다. 돌연변이라든가 누군가의 실험이라든가 외계인(이건 좀 심했나)이라든가 하여간 설명이 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런 작품을 감상하고 난 뒤에는 설정놀이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니까요.

 

하지만 액션만큼은 절대적인 즐거움을 보장합니다. 요즘 암살자들이 죄다 닌자 흉내나 내며 칼을 휘두르는 추세와 다르게 <원티드>에 나온 암살단원들은 철저하게 저격 위주로 행동합니다. 탄약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맨손 격투나 나이프 싸움도 배우기는 합니다만, 주요 전술은 저격이죠. 그러나 이 암살단원들은 위장그물을 두르고 몇 시간 동안 숲 속에서 매복을 하거나 위조서류로 철통경비를 뚫는 등의 작전과는 거리가 멉니다. 초인이라면 초인처럼 암살해야 하겠죠. 대신 이들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거나(!) 혹은 고속철도 위에서 대기하거나(!) 하는 와중에 목표를 포착하는 순간 회심의 일격을 한 방 날립니다. 만일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장애물이 있어 목표를 쓰러뜨릴 수 없는 경우, 아예 총알의 각도를 휘어잡는 묘기까지 선사하죠. 만일 이런 암살단원끼리 싸움이 나면 어떨까요. 넵, 앞서 이야기한 기상천외한 묘기들의 향연이 벌어집니다. 관객의 입에서 영화가 아니라 마치 만화를 보는 것 같다는 핑계 섞인 탄성을 여지없이 뽑아낼 장면들만 줄을 잇습니다.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이 연출이야말로 <원티드>의 가장 큰 장점이며 승부수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 구도가 아예 삼천리로 빠지는 건 아닌지라 나름대로 생각해 볼 만한 주제를 질문하기도 하고, 주인공의 다음 방향이 어디가 될지 관객을 몰입시키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서 행동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총격전만 벌이다 허무하게 끝나는 영화는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그 주제, 암살단원의 신조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그 주제는 질문만 나온 채 해답을 얻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결국 그 때문에 주인공은 온갖 죽을 위기를 거치고 쓰라린 아픔까지 겪습니다만, 거하게 질문만 했지 답변은 그 누구에게도 나오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도 좀 아쉬웠는데, 주제를 조금 더 깊게 파고 들어갔다면 한층 그럴듯한 영화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렇게 되었다면 혹여 암살자들이 곡예 살인을 하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암살 목표를 심판하는 것이 누구이며, 과연 그러한 심판이 정당한가도 한 번쯤 대답이 나왔어야 했다고 봅니다. 하긴 그 심판에 관한 설정도 없었으니 결국 설정이 부족해 주제도 좀 빈곤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요.

 

배우들이 다 취향이었는지라 보는 내내 기분이 흡족하기도 했습니다. 모건 프리먼이야 언제나처럼 안정적인 연기로 관객을 평안하게 만듭니다. 사실 연기를 굳이 안 해도 그 목소리만 듣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라앉지요. 후반부에는 그렇게 쌓은 연기 이미지를 좀 깨려는 듯한 시도도 합니다만. 하도 연기 방식이 고정적이었는지라 좀 어색한 면도 있더군요. 안젤리나 졸리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예전의 풍만한 섹시함이 많이 사라졌으나 여전히 매혹적입니다. 연기를 참 당당하게 한다고 할까요. 토머스 크레츠먼은 <피아니스트>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뒤로 여기저기 얼굴을 많이 비추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맡은 역은 대개 로망이 깃들기도 하죠. 이번에는 대사도 별로 없었으나 역시 멋진 배우에 멋진 역할이었다고 봅니다. 제임스 맥아보이는 <듄의 아이들>에서 신황제 레토로 나왔길래 눈에 익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꽤 귀여운 사람이네요.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귀여운 인상입니다. 제일 놀랐던 건 테렌스 스탬프. 저 얼굴과 목소리, 특히 목소리가 상당히 익숙하다고 생각했더니만, <슈퍼맨 2>에서는 슈퍼맨의 적 조드 장군으로, <스몰빌>에서는 슈퍼맨의 아버지 조엘로 연기했던 배우였습니다. (역시 초인들의 설정은 외계인이었다는 게 정설인가…)

 

일반적인 공식에서는 좀 멀지만, 초인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꽤 재미있게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감각적인 액션을 찾는 사람이라면 꽤 시원한 청량음료 같을 거고요. 딱히 볼만한 영화가 없을 때 골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독특한 암살 영화라고 들었는데, 암살인지 아닌지야 모르겠으나 기똥찬 저격 장면이 마음에 들어 꽤나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DVD나 블루레이 등에는 영화에 나오지 못한 대체 오프닝 장면이 들어있으니 한 번 구경해 보시기를. 저는 그걸 보니까 중세를 무대로 한 중세판 <원티드>가 속편으로 나왔으면, 싶더군요. 장검을 안 쓰고 순전히 활이나 십자궁만 쏴대는 중세 판타지물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뭐, 곡선 레이저를 쏘는 미래 SF물이나 투창을 우회해서 던지는 고대 전쟁물도 어울릴 테고요. 인류가 저격을 하는 이상, 소재는 무궁무진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그 치유물질은 도대체 뭐길래 어떤 상처도 거뜬히 낫게 하는 걸까요. 일반인에게도 통하는 걸로 보아 초인들의 능력은 아닌 듯한데. (설정이 너무 부족해요)

 

 

※ 내용누설 하나!

 

 

 

 

 

 

아마 모건 프리먼이 악당으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일 듯. 그 동안 쌓은 이미지가 있어서 악당 역할은 별로 안 어울리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