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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s a silent guardian, a watchful protector. A dark knight.]



※ 영화 <다크 나이트>의 결말 누설이 있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주의 바랍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다크 나이트>는 여러 모로 초인 영웅 영화에 큰 획을 그은 작품입니다. 조커라는 걸출한 캐릭터를 만든 것도 큰 의미가 있고, 만화적인 과장을 최대한 줄여서 현실적인 분위기로 쇄신한 것도 신선했으며, 배트맨이란 인물을 그저 슈퍼 영웅이 아닌 자경단 탐정으로 전환시킨 것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관객들이 이 작품에 열광한 이유는 (아마도 초인 영웅 영화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초인 영웅의 한계를 짚어나갔기 때문일 겁니다. 영화 속 배트맨은 고담시에서 범죄자들을 때려 잡겠다고 이리저리 설치지만, 결국 제대로 해낸 것은 거의 없습니다. 조커에게 잡힌 수많은 인질을 구한 건 대단한 일이지만, 사실상 배트맨은 조커와 대결해서 거의 패배를 거듭했죠. 고담의 희망이자 등불이었던 하비 덴트가 극단적으로 선을 추구한 만큼 악으로 빠져든 건 가장 처참한 패배였고요. 결국 배트맨은 자신의 이미지를 희생해서라도 고담 시민에게 희망이 살아있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아니, 알아주기는 커녕 욕하고 내쫓는다 해도 묵묵히 지킬 것을 지켜나가겠다는 결심이었죠. 경찰인 고든은 배트맨이 이처럼 자신을 실추시키면서 고담을 지킨다는 뜻으로, 또한 모두에게 칭송 받는 영웅이었던 백기사 하비 덴트와 대비된다는 뜻으로 흑기사란 별명을 붙입니다. <배트맨 비긴즈>부터 <다크 나이트> 마지막 장면까지 배트맨은 일반적인 영웅이었습니다만, 고든의 한마디와 함께 흑기사로 떨어지며 막을 내립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눈물겨운 결말입니다. 범죄 좀 몰아내겠다고 목숨 걸고 분투하는데, 알아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실낱 같은 희망마저 무너졌습니다. 고대 영웅 신화에 나왔던 영웅의 타락만큼은 아니지만, 여하튼 배트맨이 벼랑 끝에 몰리면서까지 사투한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그 모든 짐을 짊어지고 끝까지 나가는 모습은 사람들, 특히 남성들의 눈시울을 적시기 충분합니다. 카타르시스 대신 로망을 가져다준다는 차이점이 있으나 이 정도면 현대 초인 영웅 영화에서 드물게 고대 신화 영웅의 타락을 비슷하게 따라가는 셈이죠. 혹여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팠다, 결국 초인 영웅이란 그런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배트맨이 제아무리 범죄와 싸우는 탐정이라고 하나 공권력이 있는 경찰은 아니었고, 설사 공권력이 있다고 해도 공적인 선을 넘어서서 수사를 한 게 문제입니다. 얼굴을 가린 채 무시무시한 상징만 남기고 사라졌으니 결국 그런 풍조 속에서 조커가 태어났고, 똑같은 방식으로 응수하는 범죄자를 저지할 도리가 없었던 거죠. 한계선을 넘어서면서까지 수사를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이 영화의 결말, 즉 '흑기사'가 구석에 몰리면서도 끝까지 자기 갈 길을 고수하는 배트맨을 찬미하는 것인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벽에 부딪힌 슈퍼 영웅을 비판하는 것인지는 관객들 판가름에 달렸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 그러니까 배트맨의 한계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쪽에 가깝다고 봅니다만. 배트포드를 타고 어둠 속으로 질주하는 뒷모습에 '어둠의 기사'란 대사가 깔렸을 때는 마음이 뭉클하긴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말없는 감시자이자 묵묵한 수호자, 그리고 어둠의 기사"란 장면을 몇 번이나 되돌려보며 혼자 감상에 젖곤 하니까요.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다크 나이트, 그러니까 '흑기사'가 원래 예전부터 배트맨의 별명이었다는 겁니다. 미국 만화 속 초인 영웅들은 자신을 대표하는 이름 외에도 별명이 몇 가지 있습니다. 특히, 슈퍼맨이 그런 별명이 많은데, 슈퍼맨의 경우 막강하다는 의미로 강철인간(the Man of Steel), 먼 미래에나 나올 법한 초인이기에 미래인간(the Man of Tomorrow), 그리고 크립톤 행성 마지막 생존자로서 크립톤 최후의 아들(the Last Son of Krypton) 등으로 불립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크립톤 행성 생존자가 한둘이 아니라서 빛이 바랜 별명이지만…) 가끔씩 배트맨은 슈퍼맨이 워낙 교과서적으로 굴기 때문에 파란 보이스카웃(big blue Boy Scout)이라고 하며, 악당들도 '빅 블루'란 별명을 모욕적으로 사용합니다. 배트맨의 별명으로는 검은 옷을 입고 음지에서 활동한다는 뜻의 흑기사(the Dark Knight)가 가장 유명합니다. 이 밖에 망토 두른 십자군(the Caped Crusader)으로도 불리는데, 흑기사만큼 유명하지는 않죠. 동료들은 워낙 배트맨이 명석하고 수사력을 월등하여 '역시 명탐정이야.(Always detective.)'라고 하기도 합니다. 슈퍼맨이나 배트맨 코믹스를 보면 저런 식의 별명을 활용한 제목들도 많습니다. 저 위대한 코믹스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널리 알려졌죠. 따라서 이전부터 배트맨을 알았던 일반 관객이 영화 <다크 나이트> 예고편을 봤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을 겁니다. 이전과 달리 배트맨이라는 공식 명칭이 아니라 별명을 사용해서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죠. 개인적으로도 그랬고요.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단순한 별명으로 알았던 그 단어가 결국 배트맨의 한계 혹은 몰락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이었죠. 그러니 흑기사란 별명을 즐겨 부르던 팬들 또는 일반 관객에게는 <다크 나이트>의 결말이 남달랐을 겁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노리고 제목을 그렇게 지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의도적이었겠죠. 코믹스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정직한 제목이라면, 영화 '다크 나이트'는 뒷통수를 때리는 제목이랄까요.

본래 이런 부류의 영화가 원작을 아는 사람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다크 나이트'는 그 중에서도 참 뜻밖이었습니다. 가끔 심심하면 고든의 마지막 대사를 읊조리는데, 원래 명대사이기도 하지만 저런 연유가 있어서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건 소문이긴 한데, 영제를 몰랐던 국내 관객들 중 다수는 다크 나이트를 dark night 즉, 배트맨이 활동하는 밤 시간대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두운 고담의 밤거리를 활보하니까 저런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그럴 듯한 해석이긴 합니다만, 영화 마지막에 '어둠의 기사'란 대사가 떴을 때 관객들이 느낀 당혹감을 생각하면 좀 웃기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