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에니시엔은 내 턱을 염려하여 이 격전지에서 조금만 앞에 가서 쉬자고 말했다. 난 갈 길이 멀다며 사양했지만 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조금 전진하고 쉬게 되었다. 나도 겉으로는 사양했지만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물론 턱이 아프기도 하다. 에니시엔이 내가 누울 자리를 펴주었고 난 그 위에 앉았다.

내 턱은 아까부터 세 여자들의 걱정을 사고 있었다. 노라는 음식을 만들면서 나에게 계속 시선을 주며 한 눈을 피운 대가로 손을 데이고 말았다. 그 덕분에 이네스와 에니시엔의 주의가 잠시 노라에게 쏠리기도 했다. 우리들 대신 보초를 서고 있는 엘도 간간히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턱 괜찮아?"

"그냥 한번 돌아간 것뿐이에요. 괜찮아요, 이네....으윽!"

"전혀 괜찮아보이지 않은걸."


이네스는 배시시 웃으며 축 늘어진 내 손목을 모포 위에 올려주었다. 물론 그 손목은 좀비가 뒤틀어서 반 병신이 된 손목인 만큼......


"그으으아아! 커헉!"


바보같기는. 난 소리를 지르면 자연히 턱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턱을 다쳤으니 입을 열면 당연히 아프지. 덕분에 신음도 제대로 못 낸다. 젠장.

아니, 정정하자. 내 손목을 이네스가 만지는 순간 난 도무지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지경이었으니까 턱을 다쳤다는 사실은 의식하던 말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사이 노라가 내 몫으로 특별히 준비한 수프와 그녀의 가방에서 꺼낸 부드러운 빵을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빵을 본 내 코끝이 시큰해졌다.

여행용 식료품은 대개 건조식품이다. 인간들이 여행 중에 야외에서 먹는 빵도 아주 딱딱하게 구운 빵이나 비스켓에 불과하다. 저렇게 진짜 빵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며칠을 방치해도 곰팡이 하나 피지 않은 빵을 생산하는 곳은 고스트와이즈들의 고향뿐이다. 즉 인간들의 도시에서는 볼 수도 없는......


"고, 마워요, 노라."

"턱을 다치셨는데 어떻게 딱딱한 음식을 먹어요. 괜찮아요."


발음마저 정확하지 않은 내 감사의 말에 노라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별 베품도 아니라는 것처럼 미소까지 지으니 내 마음이 더 아려왔다. 저번에 노라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한 게 더욱 마음에 걸렸다.

노라는 내가 오른손목을 다쳤기 때문에 손목을 쓰지 못하는 걸 보고 내 숟가락을 잡으려다가 이내 손을 물렸다. 참, 소심한 아가씨야. 노라가 나에게 음식을 먹여주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겠지.

대신 에니시엔이 내 숟가락을 잡았다. 그러더니 나에게 말했다.


"먹여줄게."

"아, 괘, 괜찮은......"

"사양하지 말고 제대로 받아먹어. 턱하고 오른손을 모두 다쳤으니 받아먹기도 힘들 텐데 뭔 고집을 부리니."


난 결국 그녀에게 입을 벌렸다. 에니시엔은 해맑게 웃으며 숟가락으로 수프를 뜨더니 호호 불며 내 입에 넣어주었다. 마치 누군가의 어머니처럼.

물론 내 엄마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제길, 오늘 아침에 일으킨 스캔들은 내 인생에 영원한 오점으로 남을 거야. 아무리 야영 중이고 제삼자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처녀하고 같이 잔데다가 내가 에니시엔와 서로를 껴안고 심지어 에니시엔의 가슴을 만진 걸 본 사람은 셋이나 된다. 이네스나 노라나 엘 중 아무나 입만 뻥긋하면 난 낯가죽이 두꺼워지지라도 않으면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제길. 빌어먹을 잠버릇.

하여간 에니시엔은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어울리는 사람 같다. 그리고 에니시엔의 남편이나 그녀의 아이는 참 행복해지겠지. 외설적인 농담을 좋아하긴 해도 마음은 고운 사람......


"벤, 빵을 입에 넣어주었으면 씹어야하지 않겠니?"


......또 다시 얼간이가 되었다. 난 언제나 누군가의 웃음거리로 남아야하나? 헤헷, 그 누군가가 내 사랑이라면 용서해줄 만도 하겠지. 아, 물론......그녀는 아닐 것이다.

난 간신히 턱을 움직여서 빵을 씹었다. 턱이 오지게 아팠지만 다행히 부드러운 빵 덕분에 이빨에 가해지는 힘은 빵을 찧고 찢을 힘 정도면 충분했다. 단단한 빵이었으면 좀 더 턱에 힘을 주어야했겠지.

이네스는 내 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턱뼈가 부서진 것 같지는 않아. 뼈에 손상이 간 것 같지도 않네. 다행이야."


난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아픈 턱으로 빵을 씹고 있는 마당에 대답까지 해낼 재주는 나에게 없었다.

에니시엔이 가벼운 어조로 이네스에게 물었다.


"어떤 거 같은데?"

"그냥 타박상 같아요. 뼈는 멀쩡해보이고 근육도 손상된 것 같지는 않아요. 턱에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니 괜찮을 거에요. 손목도 마찬가지고."


에니시엔은 배시시 웃으며 나에게 빵을 찢어주었다. 난 빵을 먹으려고 했지만 에니시엔은 빵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빼냈다. 난 그녀에게 일부러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내 얼굴을 본 그녀는 이내 빵에 수프까지 적셔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고마워라.







#56







턱이 시려오는 바람에 눈을 뜨니 아직 밤이었다. 턱은 아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아프긴 아팠다. 손목은 완전히 괜찮아졌다. 자기 전에 내 손목과 턱에 고약을 바르고 약을 먹인 이네스 덕분이겠지.

그녀는 세 여자들과 함께 뒤엉켜 단잠을 즐기고 있었다. 난 자고있는 그녀에게 감사의 표시로 윙크했다.

그때, 뒤에서 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턱은 어떠냐?"


나도 입을 열었다. 턱이 아프긴 해도 확실히 나아졌다.


"이제....좀 나아졌네요. 말하는 것도 좀 자연스러워졌고."

"이런 날씨에 뼈가 다치면 골치아픈데 괜찮다니 다행이네."

"뼈가 다치면 골치가 아프다라. 미묘한 언어 조합이네요."

"내가 말하는 골치는 뼈가 아니라 뇌야."

"하여간요."


엘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다시 어둠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빛에 익숙해지면 어둠 속을 보기 힘드니까 일부러 시선을 돌린 것이다.

우리가 야영하고 있는 곳은 숲 같은 잠입 가능 요소가 상당히 배제된 개울가다. 우리가 숨을 수도 없지만 상대는 자신들을 아낄 줄 모르는 언데드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늦겨울이라 당연히 불을 피우고 있고 언데드들은 빛이 없어도 상대를 못 보지는 않지. 반면 우리는 빛이 없으면 상대를 볼 수 없다. 따라서 숨기는 힘들지만 적도 숨을 수 없는 처지. 물론 개울가니까 엄폐 요소도 없고 고지라서 오지게 춥다.

엘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눈을 감고 이네스를 열렬히 끌어안은 채 잠을 청하고 있는 에니시엔에게 그윽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를 본 내가 말문을 열자 엘이 기겁했다. 아마 내가 못 봤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에니시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어떤 부분에 대해서?"

"그녀에 대해서."

"......질문은 구체적으로. 난 몽상가 자질이 엿보이는 학자 아가씨나 외설 농담을 좋아하는 바드가 아니란 말이야. 난 전사야. 확고한 목표와 실재하는 것만 보는 전사."


구체적이라......글쎄에.


"그냥. 엘 당신이 에니시엔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관적인 견해 말이에요."

"까다롭지만 그래도 대답할 수는 있는 질문이네."


엘은 잠시 말문을 멈추고서 뜸을 들였다. 참, 사람 조바심나게 하네. 나야 이상한 심술이 생겨서 난처한 질문을 던진 입장이지만 엘 때문에 조바심이 나는 건 내가 되버렸다.

엘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여자."

"켁!"

"농담이지만 사실인걸. 그녀는 나에게 많은 교훈과 가르침을 주었지. 정확히 보면 그녀의 행동거지를 보고 내가 배웠다고나 할까. 그녀가 날 가르친 적은 없어. 내가 보고 배우고 모방한 거지."

"어떤 걸요?"


엘의 목소리가 진지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을 사는 법을. 난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좀 과장해서 길거리에 내놓은 건달에 불과했지."

"자신을 너무 비하하진 말아요."

"사실인걸. 좋게 말하면 거친 사나이였고, 나쁘게 말하면 깡패였지.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통제할 수 없는 골칫덩이였고."


엘은 품을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그는 품에서 이상한 개비를 꺼내들었다. 호프 제사장을 찾아온 손님들이 가끔 피우던 시가처럼 생겼는데. 아니, 같은 걸까?

그는 거기에 불을 붙이더니 이내 입에 물었다. 그는 시가의 연기를 잠시 들이마시고 내뿜느리 시간을 소모하고서는 나에게 말했다.


"그녀도 이걸 좋아해."

"호오, 에니시엔이 시가를 좋아한다고요?"

"응. 술도 좋아하고 예전에는 도박사나 해적 두목도 해본 경험이 있는 여자야.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는 깡패나 갱들 두목도 해봤으니까 정말 대단한 여자지."

"그래서 에니시엔이 그렇게 힘이 셌던 거군요...."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시가의 연기를 들이마시며 자신의 목구멍을 기쁘게 해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시가도 에니시엔에게 배운 거야. 그녀는 참......인생을 즐길 줄 알지."

"무슨 말인가요?"

"모든 면에서 즐길 줄 알아. 짧은 삶에 무엇을 할지 시간을 배정하는 것에서부터 남의 인생마저 즐겁게 해줄 줄 아는 좋은 여자야. 인생을 활용할 줄 아는 그녀 덕에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갈피를 못 잡던 난 많은 걸 배웠지...."


엘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엘과 그의 일행들이 모험을 하고 있을 무렵(엘 자신도 무엇 때문에 시작하게 된 모험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애당초 목적 따위가 없었는지도 모르고. 엘의 모험은 엘의 인생과 함께 성장하며 구체적으로 변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에니시엔은 오랜만에 돌아온 고스트와이즈들의 고향에서 수십 년째 인생을 만끽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인생의 3분의 1가량을 외지에서 보낸 여자라 그 기간도 그리 길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엘 일행과 에니시엔의 첫 만남은 고스트와이즈들의 공연장에서 펼쳐졌다. 수 년간 가수 겸 연출자로 활동한 에니시엔답게 엘 일행이 보러 온 공연에서도 기존의 통념을 깨는 노래와 실력으로 엘의 눈을 사로잡은 게 첫 만남이었다.

그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마치 세이렌이나 서큐버스가 내 눈 앞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지. 그건 천사의 자태가 아니었어. 무엇이든 현혹시키고 유혹하는 달콤한 악마의 자태였지. 마시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결국 마시게 되는 금단의 음료라고나 할까."

"신랄하면서도 생생한 감상평이군요."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돼. 그녀는 아주 뇌쇄적이고 멋있는 여자지. 헤에....그때는 그녀가 영매인 줄도 몰랐고 그저 훌륭한 가수인 줄만 알았어. 난 가끔 루소가 꼬셔서 공연을 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가무가 뛰어나고....몸매가 좋은 여자는 처음 봤지. 흐음. 그녀가 왜 아직도 결혼을 못했는지 너무 궁금한걸. 결혼하기 싫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은데 말이지."


난 눈짓으로 계속하라고 말했고, 엘은 그녀와의 뇌쇄적인 첫 만남을 읊기 시작했다. 요즘 보이는 몇몇 저질스러운 스트리퍼와는 달리 의상 센스도 뛰어난듯 성적 매력을 잘 살렸다며 그는 평가를 마무리지었다.


"하여간 첫 공연은....멋졌지. 하지만 그녀가 너무 아름답고 유혹적이다보니 공연 내용도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좌우간 우리 일행 중 홍일점이었던 루소가 먼저 그녀에게 뻑 가버렸어. 그래서 무작정 에니시엔과 만났고....그렇게 우리의 만남이 시작된 거야."

"계속 이야기를 해주세요."


갑자기 엘은 고개를 저었다.


"에니시엔에게 배운 나쁜 버릇 중 하나지만 나 역시 한꺼번에 이야기를 다하지 않아. 나중에 우려먹으려면 잘 가지고 있어야겠지. 그리고......지금은 말할 때가 아닌 중대한 일들도 있었고."


난 몇 번이고 졸라댔지만 엘은 막무가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56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순간이다.

에니시엔이 선물이라며 나에게 준 가죽장갑은 이미 땀으로 가득 찼다. 장갑 안의 손이 번들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장갑을 벗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지금 산 속에 있는 납골당 정문으로 들어온 참이다. 나와 엘이 앞에 서고 에니시엔과 이네스가 중간에, 그리고 노라가 우리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에니시엔은 오늘 아침에 맨손으로 검을 휘두르면 불편할 거라며 나에게 가죽장갑을 내주었다. 건틀릿이라면 모를까 가죽장갑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난 고맙게 받아들었다. 흐응, 그런데 남성들이 쓰는 장갑을 그녀가 왜 가지고 있을까?

에니시엔이 말문을 열었다.


"전형적인 고대 고스트와이즈식 납골당이네. 고스트와이즈들은 요즘은 가족납골당이나 정원 묘지를 주로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저렇게 지상 실외는 묘지로 사용하고 지하 실내를 납골당으로 사용하곤 했지. 지상에 위치한 건물은 제례를 지내는 곳이고."

"그런데 왜 고스트와이즈 납골당이 여기에 있죠? 여기들은 인간들의 섬인데."

"그건 인간들이 건축술은 물론이고 장례 의식과 그 문화도 고스트와이즈에게서 배워갔기 때문이야."


괜히 고심했네. 쳇.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적인 고민'이 사라진 건 아니다. 나와 엘은 여전히 무기를 움켜쥐고 사방을 경계하며 마치 밧줄 위에서 곡예를 부리는 광대처럼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