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어떻게 한다라....흐음, 간단한 질문이군. 우리는 수원 정화 임무를 띄고 있기 때문에 이 임무를 그만두자는 이야기는 물론 아닐 것이다. 최소한 나는 아니다. 하퍼고 뭐고를 떠나서 저런 곳을 내버려두고 갈 생각은 양심에 찔려서라도 손톱만큼도 없다. 즉 과격한 방법이냐 아니면 안전한 방법이냐가 문제겠지.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토론은 자신없다. 그런 건 이네스 전공이지.


"뭐, 가서 두들겨볼까요? 자세한 방법은 지금 우리끼리 머리를 맞대야 나올 테고."

"......설마 준비해둔 게 없는 거니?"

"일상적인 준비 말고는 아무것도 안 되어 있죠. 우리는 이곳 영문을 잘 알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당신의 도움이 절대적인 거고."

"그래? 그러면 내가 보기에 넌 이미 결론을 냈구나. 나머지는 우리끼리 머리를 맞대봐야지."

"내가 원하는 게 그거에요."

"......"


에니시엔은 말문이 막힌 듯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날 쳐다보았다. 마치 기가 막힌다는 듯한 눈빛인데.


"책상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봐야 한계가 있겠지. 상대가 무슨 일을 벌일지 알기는커녕 낯조차 제대로  모르는 상황인데 토론을 뭐하러 해?"


이네스가 식탁을 두드리며 나에게 말했다. 사실 저 말이 맞지. 상대가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르는데 뭘 준비한단 말이야?

결국 우리가 머리를 맞대며 냈다는 '묘안'이라는 건 두 가지밖에 없었다. 일단 오늘 정오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에니시엔이 말한 수원을 향해 북상한다. 두 번째는 마을 경비대에 통고해서 며칠 동안 쓸 물을 확보하라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뿐이었다. 결국 보무도 당당하게 가서 두들겨준다는 단순한 결론이다.

그런 결론을 내린 우리 일행은 일단 마을 주민들이 사용할 물과 식량의 정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니시엔을 따라 시청에 갔다. 시청 경비병들은 에니시엔과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며 우리를 '카스텔라'에 데려갔다. 카스텔라가 뭔지 묻는 우리들에게 에니시엔은 저수조라고 대답해주었다. 흐응, 물을 저장해둔다라......고향과 신전에서는 도무지 못 보던 신기한 건물이다.

카스텔라, 그러니까 저수조는 꽤 어두침침한 건물이었고 그 큰 저수조 건물에 물이 저장되어 있었다. 물을 저장해두는 수통과는 다른 개념이라는데 겉으로 봐서는 뭔지 모르겠다. 좌우간 저수조에서 에니시엔이 몇 가지 의식을 치르며 수원에 약을 탐으로써 정화 작업은 끝났다. 에니시엔은 저수조 관리인에게 약을 몇 첩 더 주면서 일주일치라며 잘 보관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에니시엔은 정화제를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녀라면 관심이 많을 법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방향은 좀 다르다. 정화제가 있는데 왜 의식을 치른 거지? 치를 필요가 있나?

정화 작업을 끝낸 우리 일행은(우리 일행이 끝냈다기보다는 에니시엔이 끝낸 것이지만.) 이제 우리가 사용할 장비와 식료품을 구비하기 위해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장비라고 해봐야 우리 일행은 모두 무장을 갖추고 있으니까 화살을 사용하는 엘 말고는 대장간이나 활장이를 찾을 사람이 없었다. 에니시엔과 나, 노라는 시장으로 가고 엘은 대장간, 이네스는 화학약품을 구하기 위해 주변을 수소문해보기로 했다. 정오까지 여관에서 만나기로 한 건 물론이다.

시장까지 가는 동안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에니시엔이나 노라가 아니라 나에게로 쏠렸다. 사실 나에게는 별반 볼일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과 두 고스트와이즈 미녀가 같이 다니는지 궁금해서 바라보는 거겠지.

솔직히 두 여자는 눈에 띄이지 않으면 이상하다. 다른 종족이니 이해할 수는 있는 일이지만 일단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 비하면 우유에서 방금 전 꺼내온 것처럼 깨끗하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깨끗해서 더더욱 주목받는 거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두드러지는 이유는 에니시엔 때문이다.


"우욱, 이러지 말아요."

"흐응...벤 오빠 오늘따라 멋있다."

"아으윽!"


내가 여자와 사귄 경험이 없는 걸 아는지 에니시엔은 날 당황하게 하면서 내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저러니 참 난감하다. 에니시엔은 내 어깨 너머에 머리를 내밀고 콧소리까지 내었다.

사람들의 눈치를 견디지 못하고 내가 외쳤다.


"그, 그만해요!"


에니시엔은 실실 웃으며 내 옆에서 떨어졌지만 계속 웃기만 하는 저 얼굴이 무척 불안하게 느껴졌다. 으으.

에니시엔과 노라는 주로 짐을 들어주었고 물건을 사는 일은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노라는 자기는 시장과 친하지 않다며 에니시엔에게 떠맡겼고 에니시엔은 자신은 흥정에 익숙하지 않다며 노라에게 떠넘겨버렸다. 그러니 내가 할 수밖에. 쳇.

시장에는 주로 석영 제품이 많았다. 이 섬 특산물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석영에는 볼 일이 없어서 석영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식료품을 주로 사들였다. 에니시엔은 이상한 약초를 좀 사들였고 노라는 종이와 잉크를 사들였다. 양초는 이해하겠는데 종이와 잉크는 왜 산 거지?

푸줏간 앞을 지나칠 때 도축된 가축에서 흘러나왔을 피 냄새가 잠시 코를 스쳤다. 연이어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노라?"

"왜 그러시죠?"


내 부름에 노라는 몸을 돌렸다. 나보다 후각이 더 예민한 노라가 저 냄새를 맡지 않았을 리는 없겠지? 그런데 표정이 좀 시큰둥하군.


"우리 몸을 깨끗이 씻었잖아요. 다만 이런 비누 냄새는 맹수나 괴물들이 더 알아차리기 쉽지 않나요?"

"아아, 아뇨. 물론 비누 냄새는 맹수나 괴물들도 잘 맡겠지만 오랫동안 안 씻는다면 인간이나 고스트와이즈 특유의 체취가 강해져서 더 쉽사리 알아차릴 거에요. 그리고 겁이 많은 생물에게는 익숙치 않은 냄새가 공포심을 심어줄 수도 있고요."

"아아, 제 생각은......피나 동물의 체액, 가죽 같은 걸 이용해서 우리도 그런 냄새를 나게 하는 건 어떨까요?"


에니시엔도 흥미를 느끼고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지만 노라와 에니시엔은 곧 날 이상한 놈 보는 듯한 눈으로 날 보기 시작했다.


"저, 안 되나요?"


에니시엔이 호르르 한숨을 내쉬며 대답해주었다.


"언데드는 후각이 없거나 예민한데 뭐하러 그런 짓을 해. 어떤 냄새가 나든 언데드들은 우리의 존재를 쉽사리 파악할걸? 그리고 같은 언데드의 냄새가 아니라면 더더욱 위험하고.

그리고 언데드는 본능적으로 같은 언데드를 알아보거든. 그게 아니라면 제대로 된 지능도 없는 좀비들은 시술자만 사라진다면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잖아."

"으윽......그렇군요. 그러고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고스트와이즈들도 안 씻으면......그러니까......"


호기심은 한도 끝도 없지만 여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실례군. 다행히 노라가 대답해주었다.


"악취 말인가요? 저희들은 저희 종족 특유의 향기로운 체취가 있어서 그렇게 지독한 냄새는 나지 않아요. 그래도 기름이 번들거리는 여자들을 좋아할 사람은 없겠죠. 특히 저희 종족은 깨끗할수록 특유의 체취가 잘 발현되서 고스트와이즈들은 누구나 자신의 위생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요."

"흐음, 그렇군요.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그야 그렇게 강한 냄새가 아니라서 그런 거죠. 의식하지 않으면 잘 맡기 힘든 냄새거든요."


에니시엔이 키득거리며 덧붙였다.


"아니면 더러운 고스트와이즈라던가."


돌아오는 길에는 에니시엔과 노라가 짐을 분담하여 들어줬기에 부담이 많이 줄어들었다. 특히 노라에게는 언제나 신세를 많이 지는 것 같다.

여관에 돌아오자마자 홀에 있던 이네스와 엘이 반겨주었다. 이네스와 엘은 이미 무장을 끝낸 상태였다. 이네스는 무장이라고 해봐야 그저 옷이나 좀 껴입고 단검이나 하나 소지하는 정도다. 그외에는 약품이나 넉넉히 마련해두는 정도지. 원래 그녀에게는 물리적인 전투력을 기대하지 않는다.

믿을 만한 건 오히려 엘이다. 그는 시미터를 허리춤에 찬 칼집에 넣어두고(내 칼집 이상으로 비싼 것이다. 시미터는 곡도라 제대로 된 칼집을 구하기에는 다소 힘들 테니.) 가죽 갑옷을 상의 위에 걸쳐입은 모습이다. 허리춤에 매어둔 장궁과 화살통이 눈에 들어왔다. 으음, 언데드 괴물을 상대로 활은 그리 안 좋을 거 같은데 말이야.


"돌아왔니?"


이네스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며 내가 갖추어야 할 무구들을 내 앞에 내놓았다. 그래봐야 갑옷뿐이다. 난 내 검을 늘 가지고 다니니까.

이네스는 생긋 웃으며 내 윗옷 위에 가죽갑옷을 입혀주었다. 그런 다음 그 하얀 손가락으로 리벳 안으로 끈을 꿰어주었다. 흐응, 이러니 참 부끄럽군.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사이 노라와 에니시엔도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노라는 예의 지팡이와 쇼트 소드를 갖추었고 별도로 여러 자루의 단도도 갖추었다. 나이프 정도의 길이지만 양쪽에 날이 있는 무기다. 노라는 마치 보라는 듯 그 단도를 이용해 종이를 몇 장 갈라보였다. 무딘 칼이라면 종이 같은 걸 가르기 힘들겠지. 흐음.

에니시엔은 의외의 무장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꺼내든 것은 가히 3피트 가까이 되어보이는 길이에 내 머리만한 추를 가진 엄청난 메이스였다.


"그, 그걸 당신이 들 수는 있어요?"

"흐응, 여관만 아니라면 바람개비 돌리듯 휘두를 수도."


그렇게 말한 에니시엔은 정말 장작개비 들어올리듯 가볍게 메이스를 들어올려보였다. 한 대 맞으면 내 머리가 멀쩡하지 않겠는걸?

에니시엔이든 노라든 갑옷을 갖추지 않은 건 똑같았다. 노라야 민첩성으로 승부하는 전사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에니시엔은 왜 아무 것도 안 입지?


"저......에니시엔?"

"왜?"

"노라는 민첩한 전사니까 갑주를 걸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에니시엔 당신은 그런 무거운 무기를 사용하는데......"

"어머, 후광의 예언자에게 갑옷이 필요해? 처음 알았네."

"어? 안 입어도 돼요?"


내 궁금증은 옆에 있던 노라가 풀어주었다.


"후광의 예언자인 에니시엔 언니는 의례상 갑주를 입지 않아요. 에니시엔 언니가 쓰는 저 메이스도 본래는 에니시엔 언니의 무기가 아니라 에니시엔 언니 곁에 있는 한 유령이 애용하는 무기일 거에요. 에니시엔 언니는 저런 무기를 쓰지 못하거든요."

"그러면 유령의 힘을 이용하여 사용하는 건가요?"

"네. 저 체격에 저런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죠. 에니시엔 언니는 랜스나 핼버드도 휘두를 수 있을걸요?"

"사실 자세히 설명하면 유령의 힘과 재능을 덧씌우는 거지."


대, 대단한 기술이다. 이론상으로는 세상 모든 무기를 다 쓸 수도 있겠는걸?

에니시엔이 다시 덧붙이듯 말했다.


"흐응, 사실은 말이야아, 후광의 예언자라고 해서 모두 나 같은 영매는 아니야. 고스트와이즈 예언자만큼 다양한 계층이 뭉친 집단도 드물걸?"


메이스를 집어든 에니시엔은 또 이상한 수통을 우리에게 두 통씩 건네주었다. 휴대용 수통 정도로 적당한 크기지만 하얀색을 띄고 있었다. 만져본 다음에야 수통의 재질이 가죽인 걸 알 정도였다. 하얀색 가죽은 드무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지.

에니시엔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열어봐."


가죽 수통을 막은 코르크를 뽑자 은은한 빛을 내는 녹색 액체가 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어디에 쓰는 거지?

난 고개를 들어 에니시엔을 쳐다보았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일종의 약인데 심한 부상을 입으면 마시도록 해. 아, 감염이나 질병에는 별 효과가 없는, 인간의 자체적인 재생 속도만 빠르게하는 약이란 점을 명심해. 비슷한 맥락으로 팔다리가 잘린다는 식의 큰 상처에는 별 효과가 없을 거야."

"으응? 이런 약은 본래 유리병에......"

"이런 귀한 약을 유리병에 담아두었다가 깨지면 어쩌니? 그래서 유니콘이나 페가서스의 가죽을 벗겨서......이런 좋은 약을 보관할 수 있는 수통을 만드는 거지. 지나치게 큰 부상이나 감염, 질병에는 효과가 미미하지만 칼에 찔린 정도는 쉽게 회복해줄......"

"유, 유니콘 가죽!"


에니시엔은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처녀가 유니콘의 가죽을 벗긴다는 생각을 하니 영 이상했지만 유니콘의 가죽을 벗길 정도의 용사가 있긴 있나?

에니시엔이 나에게 보여준 건 또 있었다. 피비린내가 나는 가죽포대였다.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 모양새로 보아 안에 든 게 액체인 건 확실한데.


"이건 뭐에요?"

"살짝 열어봐."


난 조심스럽게 끈을 끌렀고 내용물이 눈에 들어온 순간 가죽포대를 떨어뜨릴 뻔했다.

안에 가득 들어가 있는 액체는 바로 피였다. 무언가를 첨가했는지 응고되지도 않고 아직도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는 섬뜩할 정도로 붉은 피였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에니시엔이 말했다.


"내 피야. 대규모 강신술에 매우 유용한 시약이거든."


굳어진 내 얼굴을 바라본 에니시엔은 싱글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러면 갈까?"


난 말 잘 듣는 소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