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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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은 할 말을 잃은 채 한 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방의 중앙에 안젤라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목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마루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혹시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콜린은 안젤라에게로 달려가서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보았다. 심장 뛰는 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칼에 목을 심하게 베인데다가 오래 방치된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콜린은 안젤라를 두 손에 안은 채 자작을 노려보았다. 자작의 옷은 안젤라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게 자작의 소행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얘야. 이게 어찌된 일이냐.”
뒤 따라 들어온 장인어른이 안젤라를 발견하고 오열했다. 그리고는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자작 쪽을 노려보았다. 그는 자작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당신이 얘를 죽였어. 당신이 죽인 거라고.”
콜린은 자작에게 다가갔다. 이젠 영주고 뭐고 없었다. 아내의 원수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 이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광기에 찬 콜린의 눈을 보는 자작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오해야. 난 죽이지 않았어.”
“거짓말하지 마.”
콜린은 자작에게 다그쳤다.
“난 절대 이 여자를 해칠 생각이 없었어. 해치지도 않았고.”
“그럼 대체 누구야.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여자 스스로 자기 목을 찔렀어.”
“뭐라고?”
“날 믿지 못 하겠으면 한 번 봐봐. 오른 손을.”
자작의 말대로 안젤라의 오른손을 펴보았다. 그 안에는 단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손잡이가 나무로 된 조잡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 여인의 목을 가르는 데는 충분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내가 이 여잘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왜 일부러 그런 단검을 썼겠어?”
그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안젤라의 손에는 단검을 세게 쥐느라 생긴 자국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콜린은 자작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안젤라가 자살을 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콜린은 혼란에 빠졌다. 그 틈을 타서 자작이 슬금슬금 문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콜린은 그가 나가지 못 하도록 막아섰다.
“당신이 그렇게 당당했다면 어째서 방 안에 숨어서 나오지 않은 거지? 빗장까지 걸고서 말이야.”
“그건......”
“당신 스스로 뭔가 찝찝한 게 있어서 그런 것 아니었나?”
“그건 내 실수였어. 난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나오면 모두가 날 의심할까봐. 전지전능하신 신에 걸고 맹세할 수 있어. 난 죽이지 않았어.”
“당신 말을 믿기엔 너무 의심스러운 것이 많아.”
그렇다면 물어볼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바로 주교였다. 그는 떨리는 눈동자로 주변 돌아가는 사정을 살피고 있었다.
“주교시여. 당신만이 이 수수께끼를 풀 열쇠입니다. 당신이 본 것을 말씀해 주시죠. 본 것만을 말입니다.”
콜린의 말에 주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의 말대로 이 여자는 스스로 목을 찔렀네.”
“어째서 말입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것은...”
주교는 자작 쪽을 흘낏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나중에 말하면 안 되겠나? 먼저 가엾은 이 여자의 시신부터 수습해야 하지 않겠나.”
시간을 끌려는 수작임을 모를 콜린이 아니었다.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남으로써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하겠지. 이 사람들은 무고한 자를 범죄자로, 범죄자를 무고한 자로 바꿀 만한 권력과 인맥이 있었다. 내일만 되도 이 자들에게 편한 식으로 진실은 묻혀버릴 게 틀림없었다.
“여기서 말해주십쇼. 주교님은 진실을 알고 계시죠. 또한 신께서는 거짓말을 싫어하신다는 것 또한 잘 아실 겁니다.”
콜린은 주교에게 위협하듯 말했다.
주교는 다시 한 번 자작 쪽을 흘낏 보았다가 포기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작. 미안하네. 나는 신을 섬기는 몸이야. 차마 거짓말을 할 순 없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가. 그 자리에 오른 게 누구 덕분인지 알고 있나?”
자작은 주교를 노려보며 외쳤다. 주교는 냉담한 시선으로 대꾸했다.
“나를 이 자리에 앉힌 건 자네 아버지인 백작이지. 자네 덕분은 아닐세. 자. 그럼 얘기하지. 자작은 이 가엾은 여인의 처녀성을 빼앗으려 했네. 그리고 이 여인은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걸세.”
“윌리엄 이 자식.”
콜린은 안젤라의 손에 쥐어져 있던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작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자작은 뒷걸음질 치면서 애원했다.
“아니야. 주교의 말은 사실이 아닐세.”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건가? 네 범죄를?”
“주교의 말 중 일부는 사실이야. 그건 인정해. 하지만... 처녀성을 빼앗으려 한 건 사실이 아니야.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처녀가 아니었거든.”
“그건 무슨 말이야.”“방앗간 집 노인에게 물어봐. 그라면 잘 알고 있으니까.”
그 말을 듣고 콜린은 장인어른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콜린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 하고 있었다. 온몸에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콜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안젤라가 처녀가 아니었다니 무슨 말입니까.”
“......미안하네. 차마 자네한테 얘기할 순 없었네.”
“무엇을 말입니까. 대답을 해주십시오.”
장인어른은 주저하다가 콜린이 다그치자 비로소 입을 열어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작이 방앗간에 가끔 시찰을 오곤 했다는 얘기를 했었지. 사실은 말일세... 자작은 방앗간에 와서 시찰만 하고 간 것은 아니었네.”
“그럴 수가...”
큰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 하는 콜린에게 자작은 발악하듯 외쳤다.
“이 여자는 그저 더러운 계집일 뿐이야! 콜린 너는 그 계집에게 속아 결혼한 거지. 그러니 날 그냥 보내주게. 이런 계집 하나 때문에 날 죽이고 너 자신을 파멸에 이끌 텐가?”
자작의 말은 틀렸다. 안젤라는 결코 더러운 여자가 아니었다. 자작에게 해꼬지를 당할까봐 차마 거절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초야 의식을 그리 두려워했던 것은 자작이 혹시 이런 짓을 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안젤라는 그런 두려움을 안고서도 콜린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진실을 숨겼다.
콜린은 결혼식 전 성으로 오는 마차 안에서 안젤라에게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혹시 영주가 이상한 짓을 할라치면 내 이름을 불러. 기다리고 있다가 곧바로 내가 문 열고 들어가서 그 놈을 혼내줄 테니.]
잠결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떠올랐다. 설마 그녀가 자기를 구해달라고 부르짖는 소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 했었다. 결혼식 날 영주에게 범해져야 하는 굴욕감은 어떤 거이었을까. 믿었던 남편이 약속을 저버린 것을 알고 그녀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그 절망감이야말로 그녀의 목을 벤 단검보다도 고통스러운 것 아니었을까.
콜린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단검을 든 채 자작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자작에게 손을 대면 남는 것은 자신의 파멸뿐이었다. 콜린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은 안젤라에게 속죄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었다.
“이 자가 나를 해하려 한다. 어서 나를 지켜라!”
자작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자작의 외침에 두 명의 보초병은 칼을 빼내어 들고 콜린을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콜린은 단검을 들고 그들과 대치했다. 보초병 하나가 기합을 내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전쟁 경험 없는 어린 병사였다. 3년이 지났다고 해도 콜린은 오크와의 전투로 단련된 베테랑이었다. 그는 병사의 검을 피한 후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병사의 검이 땅에 떨어지며 쨍하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다른 병사가 콜린을 향해 돌진해왔다. 그가 검을 높이 들었을 때 콜린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다음 순간 그 병사는 베인 손목을 잡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콜린은 한 손에는 병사의 장검을 다른 손에는 안젤라의 단검을 들고 자작에게 점점 다가갔다. “살려주시오. 제발.”
자작은 자기 한 목숨 구하고자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었다. 참 아이러니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높은 의자에 앉아 자기를 가축 보듯 내려다보던 그가, 지금은 무릎을 꿇고 자비를 청하고 있었다.
“결혼식 전 나는 안젤라와 약속을 했었지.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달려와 구해주겠다고. 자작이 이상한 짓을 하면 그 놈을 혼내주겠다고 말이야.”
“겨우 그 계집 때문에 모든 걸 망칠 셈인가? 날 죽이면 넌 끝장이야. 당장 교수형을 당하게 될 거야.”
“상관없어. 그러면 안젤라를 보다 일찍 만날 수 있을 테니.”
콜린은 그 말을 마치고 단검으로 자작의 목을 찔렀다.
헉헉 다음편! 다음편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