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무협 포럼
판타지, 무협... 그 자유로운 꿈의 이야기.
판타지, 무협 세계의 정보나 설정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그 다채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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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포함하는 기병...
로마가 고트족에 이어 훈족의 기마궁수들에게 큰 피해를 입고 겨우 물리쳤으나 결국 야만인들로 구성된 '로마'의 군대에 의해 서로마가 멸망하지요.
그결과 유럽은 궁기병의 전통이 빈약해졌읍니다.
중장기병이 유럽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되는 기반을 마련한 고트족은 남부러시아에서 중앙유럽을 거쳐 장기 이주하는 동안 훌룡한 기수로 성장해있었고, 등자를 보유하고 있었읍니다.
훈족은 고트족에 비해 말위에서 먹고자며 하루 150킬로미터 이상을 이동 가능한, 더욱 뛰어난 기수들이었고, 갑옷이나 방패 사용을 거의 하지 않고 혼합궁에 의존하는 궁기병이었는데, 중장기병의 고트족을 견뎌내지 못한 로마가 그들을 자신의 군대로 편입시킨 반면, 이 미덥지 못한 야만인 동료를 적절히 통제하기 위해서 훈족과 싸우게 만들었지요.
훈족은 분명 뛰어난 전사들이었지만 전술적, 전략적 능력은 보잘것 없었고 아무리 허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로마를 무너트릴만한 능력은 없었읍니다.
서로마가 무너지고 남은 비잔틴(동로마)제국은 주로 야만인 부족출신 용병을 기반으로 하는 중장기병대였읍니다. 중장보병은 소수만 남았지요.
그들의 정예 중장기병은 활과 가벼운창, 그리고 근접전을 위한 깃 달린 다트와 브로드소드를 능숙하게 다뤄야했읍니다. 작은 방패와 미늘갑옷을 두르고 기다란 가죽장화를 신었지요. (520년경입니다.)
하여튼 비잔틴제국이 서로마 부활시도가 실패한후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사라센인이 에스파니아를, 프랑크족이 프랑스땅에 자리잡고 앵글로-색슨족이 잉글랜드에 자리잡게 됍니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야만적이던 프랑크 왕국이 차츰 비잔틴제국과 비슷한 수순을 밟기 시작합니다.
보병위주에서 기병으로 차츰 변하기 시작했지요.
로마시대의 흉갑이 차츰 사라져가고 튜튼식의 쇠사슬갑옷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부자들만 말을 몰고다니며 대게 말은 수송용이었읍니다. 또한 말을 타고 전장에 투입된 이들도 전투시엔 말에서 내려서 싸웠지요.
그러나 프랑크왕국은 에스파니아 지방을 정복하고 북상하는 아랍인들을 보병만으로 막아냅니다. 비록 아랍인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원정을 나선것이 아니지만, 하여튼 막은건 막은것이니까...
보병들이 그토록 성공적으로 전투가 가능했던것은 적을 추적하지않고 전열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샤를마뉴에 이르러 중장기병은 프랑크왕국의 핵심이 됍니다. 수는 많지않았으나 질적으로 우수해졌읍니다. 봉건제의 발달로 "기사"가 발달하고 그들은 쇠미늘갑옷과 투구, 방패, 가벼운 창과 도끼를 갖추었읍니다.
이전에는 중장기병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비용문제 때문에 기병의 가치를 인정하고도 기병을 다수 보유하거나 높은 공격력을 얻어낼수가 없었읍니다.
프랑크왕국은 중장기병에게 보수를 지급할만큼 부유한 지배자가 아무도 없었읍니다.
하지만 이것은 봉건제의 발달로 해결됍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용감하고, 지휘관에대한 복종심이 결여됐던 프랑크 기사들은 결코 비잔틴제국을 이기지 못했읍니다.
후퇴하는걸 수치로 여겼던 그들은 물러서야 할때 말에 내려 등을 맞대고 저항했고, 그 기사들은 결국 비잔틴제국의 "굶기는 전술"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지요.
비잔틴제국은 그들과 맞대결하기보다 계속 괴롭히며 지연전을 펼치고 수송로를 끊어 굶겨버렸읍니다. 후퇴를 하지않는 그들은 몇일만 굶기면 애초 복종심이 결여돼 있던지라, 쉽게 군대로써의 조직을 상실해버렸고 지리멸열하게 무너져버렸지요.
샤를마뉴가 죽은후 마자르족과 바이킹에게 공격받기 시작한 9세기 유럽은 무질서해집니다.
사실 바이킹족에 대한 만족할만한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처음엔 약탈을 위한 원정이었다가 점차 정착으로 바뀌어가죠. 9세기에 북부와 동부잉글랜드가 바이킹에게 완전히 정복당하고, 노르만이라 불릴지역을 양여받게됍니다.
바이킹족은 처음 열악한 무장으로 기습을 위주로 하다가, 프랑크족으로부터 획득한 무기와 기술로 차츰 프랑크와 흡사한 무장을 갖추게 됍니다.
하여튼 그들은 기본적으로 보병이었읍니다. 기병을 상대해야 했기에 불가피하게 수비적인 방패벽을 이루는 전술로 싸워야 했읍니다. 기병이 있다지만, 대게 급하게 징병돼 훈련도 재대로 받지못한 적보병에 비해 강한 보병들이었으므로 쉽사리 이겨나갓지만, 프랑크인과 영국인들이 바보는 아니었죠.
프랑스에선...
혼란한 상황에도 봉건제는 평정을 되찾기시작했고, 대규모 기병을 유지할수 있게 돼었읍니다. 민첩하게 치고빠지는 바이킹족들을 추격하고, 그들의 방패벽을 돌파할수 있는건 기병들뿐 이었으니까요.
동시에 성으로 요새화 하기 시작합니다.
9세기를 기점으로 모든 프랑스인들은 보병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영국에선...
프랑크왕국과 같이 성으로 요새화 하기 시작했으나, 기병보다 중장보병으로 성공을 거두었읍니다. 또한 바이킹을 본떠 강력한 함대를 갖추었고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이후 천년이상 늘 믿음직한 함대를 갖추게됍니다.
드디어 유럽은 야만인의 기습으로부터 안정되기 시작합니다.
11세기에 이르러 과거 바이킹시절 보병으로써 유럽을 뒤흔들던 노르만인들이 기병으로써 다시금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노르만인은 광범위한 유럽지역을 정복했고, 영국을 넘보기 시작했읍니다. 그리고 결국 점령에 성공했지요.
영국군대는 기병이 없었읍니다. 그들은 찌르는창과 투창, 양날검과 도끼로 무장하고있었고, 이무렵 궁술은 인기있는 스포츠이긴 했으나 무기로 사용되진 않았읍니다. 부유한자들은 쇠미늘갑옷과 금속제투구를 사용했지요.
반면 노르만 기사들은 쇠미늘갑옷을 걸치고 코보호대가 딸린 투구를 착용했읍니다. 연모양 방패를 사용했으며 주무기는 가벼운창이었죠. 또한 장검을 사용했읍니다. 검은 11세기에 이미 충분히 발달해 있었지요.
이외에 도끼나 철퇴를 기사의 기호에 따라 사용했읍니다.
노르만의 부대에는 파이크병과 궁수가 포함돼 있었지요. 노르만 궁수의 활은 1.5미터쯤 되었고, 시위를 가슴까지 잔뜩 당겨야했지요.
11세기초에 노르만은 석궁을 사용하기 시작했읍니다.
영국군은 노르만의 기병에 대항해 단단한 방패벽을 구성하고 저항합니다. 노르만 기사들도 별다른 소득을 보지 못하고 도주하지만...
"궁수"들이 단단한 방패벽을 넘어 화살이 떨어지도록 수직에 가까운 사격을 하여 결국 영국군은 물리치는데 성공합니다.
12세기에 노르만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으나 13세기에 접어들어 프랑스영지를 잃고 영국에선 마그나 카르타에 강제 서명하게 됍니다.
(십자군 원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무거운 갑주로무장한 중장기병은 화살을 쏘며 도주하는 가벼운 경장 궁기병을 도저히 따라잡지 못했고, 궁기병도 중갑주의 기사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했읍니다. 결국 물과 식량이 공급이 끊어진체 과도한 추격으로 고립된 십자군들이 굶주림과 목마름을 견디지 못하고 무모한 돌격을 하다 자멸하게 되지요.
이를 타게하기위한 것으로 강력한 요새를 건축하고 그곳을 수비하는 보병에 의해 안전해진 범위내에서 작전을 하는 방법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만... 기사들은 과도하게 용감한탓에... 무모하게 똑같은 바보짓을 반복해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8회 원정중 가장 희극적인 콘스탄티노플 점령후 황제놀음과 가장 비극적인 12세이하 남녀어린이로 구성된 원정대 -엄청난 희생이 예상되지 않으신지?- 같은 경우는... 정말 할말없지요. )
13세기, 과거 비극적인 막을 내린 십자군 원정은 크나큰 교훈을 주지만 아직 유럽의 지휘관들은 그것을 깨닿지 못합니다. 그것은 보병과 기병의 공조체계는 그것이 각자 행동할때보다 훨씬 크다는것.
어느 주요한 전투에서도 보병은 사용되지 않았는데, 더욱 길어진 파이크와 더욱 강력해진 활과 석궁의 존재가 너무 쉽게 무시되었읍니다. 그 결과 순수하게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농부들을 징집하여 이루어진 보병대에게 대패하는 기막힌 상황도 연출되었읍니다.
13세기 무렵부터 쇠미늘갑옷에 팔뚝 보호대나 정강이 보호대를 추가하기 시작했고, 14세기에 드디어 판금갑옷이 등장합니다. 무거운 판급 갑옷을 다시금 개량한 기병용 흉갑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 갑옷의 약점을 노리는 레이피어와 같은 무기가 사용되게 됍니다.
13세기경엔 이미 봉건제도가 효력을 상실하고 있었읍니다. 봉건제의 농노들로 징집됀 병사들은 전투경험이 전혀없어 대다수가 무기를 다룰줄 몰랐고 그에 따라 용병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었읍니다.
14세기에 기사들과 기병의 무장이 표준화되면서 기사와 기병은 단지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용어로 바뀌게 됍니다.
경장기병은 소규모 접전과 정찰에만 사용되었고 필수적인 역활은 없었읍니다.
최고의 무장훈련은 토너먼트로 완전무장을 하고 실전에서 싸우는것처럼 똑같이 싸웠읍니다. 그중 다들 아시는 기사들간의 마상창경기 (Joust)는 기사 개인 대결로 각자 창을 들고 말을 전속력으로 달려 3번 격돌합니다. 어느쪽도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말에서 내려 다시 각자의 검이나 도끼, 철퇴로 3회에걸쳐 가격했읍니다. 마상경기(Tourmey)의 경우는 집단경기였읍니다.
시간이 지나고 삶이 안락해지고 토너먼트가 너무 심각한 부상을 초래하게되자 정교한 규칙이 마련되었읍니다. 15세기경엔 위험성이 크게 줄었고 전에 없던 대인기를 끌었읍니다. 그러나 16세기경까지 여전히 사망사고가 있었읍니다.
최후의 토너먼트는 19세기에 있었읍니다. 기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모여 경기를 시작했으나 대부분의 일정이 비 때문에 단축되었읍니다.
P.S = 쓸만한 핸드건이 사용된것은 16세기 입니다. 판금갑이 사용되기 시작한것은 14세기... 사실상 평화로웠던 13세기 이후 판금갑이 나타났으므로, 판금갑을 입고 전장에 나서는 기사의 모습은 다소 수정이 필요하지 않을지? 사슬갑이면 몰라도...
문장을 그려넣기 시작한것도 13세기무렵부터 입니다. 얼굴을 정교한 면갑으로 보호하기 시작하면서 신분을 나타낼 표식이 필요해졌지요.
12세기 무렵 십자군을 통해 기사를 신성화 하기 시작했고, 기사도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것은 13세기 입니다.
그러나 기사는 농노의 노동에 의존했고, 성모 마리아를 존경했다 쳐도 여성을 존경했다는 증거는 없읍니다. 확실한건 몸값을 낼수 없는 포로는 학살했다는것.
또한 기병이나 기사는 분명 빠르고 강력한 공격력을 가졌지만, 정교한 체계를 확보한 보병 방어진을 돌파할 능력은 없었읍니다. 전투경험이 별로 없던 보병들이 주력이던 시절엔 분명 기병은 공포스러웠지만, 전투경험이 확보된 병사가 많아지는 시기에 이르면 기병은 위력을 상실했읍니다.
로마가 고트족에 이어 훈족의 기마궁수들에게 큰 피해를 입고 겨우 물리쳤으나 결국 야만인들로 구성된 '로마'의 군대에 의해 서로마가 멸망하지요.
그결과 유럽은 궁기병의 전통이 빈약해졌읍니다.
중장기병이 유럽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되는 기반을 마련한 고트족은 남부러시아에서 중앙유럽을 거쳐 장기 이주하는 동안 훌룡한 기수로 성장해있었고, 등자를 보유하고 있었읍니다.
훈족은 고트족에 비해 말위에서 먹고자며 하루 150킬로미터 이상을 이동 가능한, 더욱 뛰어난 기수들이었고, 갑옷이나 방패 사용을 거의 하지 않고 혼합궁에 의존하는 궁기병이었는데, 중장기병의 고트족을 견뎌내지 못한 로마가 그들을 자신의 군대로 편입시킨 반면, 이 미덥지 못한 야만인 동료를 적절히 통제하기 위해서 훈족과 싸우게 만들었지요.
훈족은 분명 뛰어난 전사들이었지만 전술적, 전략적 능력은 보잘것 없었고 아무리 허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로마를 무너트릴만한 능력은 없었읍니다.
서로마가 무너지고 남은 비잔틴(동로마)제국은 주로 야만인 부족출신 용병을 기반으로 하는 중장기병대였읍니다. 중장보병은 소수만 남았지요.
그들의 정예 중장기병은 활과 가벼운창, 그리고 근접전을 위한 깃 달린 다트와 브로드소드를 능숙하게 다뤄야했읍니다. 작은 방패와 미늘갑옷을 두르고 기다란 가죽장화를 신었지요. (520년경입니다.)
하여튼 비잔틴제국이 서로마 부활시도가 실패한후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사라센인이 에스파니아를, 프랑크족이 프랑스땅에 자리잡고 앵글로-색슨족이 잉글랜드에 자리잡게 됍니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야만적이던 프랑크 왕국이 차츰 비잔틴제국과 비슷한 수순을 밟기 시작합니다.
보병위주에서 기병으로 차츰 변하기 시작했지요.
로마시대의 흉갑이 차츰 사라져가고 튜튼식의 쇠사슬갑옷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부자들만 말을 몰고다니며 대게 말은 수송용이었읍니다. 또한 말을 타고 전장에 투입된 이들도 전투시엔 말에서 내려서 싸웠지요.
그러나 프랑크왕국은 에스파니아 지방을 정복하고 북상하는 아랍인들을 보병만으로 막아냅니다. 비록 아랍인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원정을 나선것이 아니지만, 하여튼 막은건 막은것이니까...
보병들이 그토록 성공적으로 전투가 가능했던것은 적을 추적하지않고 전열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샤를마뉴에 이르러 중장기병은 프랑크왕국의 핵심이 됍니다. 수는 많지않았으나 질적으로 우수해졌읍니다. 봉건제의 발달로 "기사"가 발달하고 그들은 쇠미늘갑옷과 투구, 방패, 가벼운 창과 도끼를 갖추었읍니다.
이전에는 중장기병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비용문제 때문에 기병의 가치를 인정하고도 기병을 다수 보유하거나 높은 공격력을 얻어낼수가 없었읍니다.
프랑크왕국은 중장기병에게 보수를 지급할만큼 부유한 지배자가 아무도 없었읍니다.
하지만 이것은 봉건제의 발달로 해결됍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용감하고, 지휘관에대한 복종심이 결여됐던 프랑크 기사들은 결코 비잔틴제국을 이기지 못했읍니다.
후퇴하는걸 수치로 여겼던 그들은 물러서야 할때 말에 내려 등을 맞대고 저항했고, 그 기사들은 결국 비잔틴제국의 "굶기는 전술"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지요.
비잔틴제국은 그들과 맞대결하기보다 계속 괴롭히며 지연전을 펼치고 수송로를 끊어 굶겨버렸읍니다. 후퇴를 하지않는 그들은 몇일만 굶기면 애초 복종심이 결여돼 있던지라, 쉽게 군대로써의 조직을 상실해버렸고 지리멸열하게 무너져버렸지요.
샤를마뉴가 죽은후 마자르족과 바이킹에게 공격받기 시작한 9세기 유럽은 무질서해집니다.
사실 바이킹족에 대한 만족할만한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처음엔 약탈을 위한 원정이었다가 점차 정착으로 바뀌어가죠. 9세기에 북부와 동부잉글랜드가 바이킹에게 완전히 정복당하고, 노르만이라 불릴지역을 양여받게됍니다.
바이킹족은 처음 열악한 무장으로 기습을 위주로 하다가, 프랑크족으로부터 획득한 무기와 기술로 차츰 프랑크와 흡사한 무장을 갖추게 됍니다.
하여튼 그들은 기본적으로 보병이었읍니다. 기병을 상대해야 했기에 불가피하게 수비적인 방패벽을 이루는 전술로 싸워야 했읍니다. 기병이 있다지만, 대게 급하게 징병돼 훈련도 재대로 받지못한 적보병에 비해 강한 보병들이었으므로 쉽사리 이겨나갓지만, 프랑크인과 영국인들이 바보는 아니었죠.
프랑스에선...
혼란한 상황에도 봉건제는 평정을 되찾기시작했고, 대규모 기병을 유지할수 있게 돼었읍니다. 민첩하게 치고빠지는 바이킹족들을 추격하고, 그들의 방패벽을 돌파할수 있는건 기병들뿐 이었으니까요.
동시에 성으로 요새화 하기 시작합니다.
9세기를 기점으로 모든 프랑스인들은 보병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영국에선...
프랑크왕국과 같이 성으로 요새화 하기 시작했으나, 기병보다 중장보병으로 성공을 거두었읍니다. 또한 바이킹을 본떠 강력한 함대를 갖추었고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이후 천년이상 늘 믿음직한 함대를 갖추게됍니다.
드디어 유럽은 야만인의 기습으로부터 안정되기 시작합니다.
11세기에 이르러 과거 바이킹시절 보병으로써 유럽을 뒤흔들던 노르만인들이 기병으로써 다시금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노르만인은 광범위한 유럽지역을 정복했고, 영국을 넘보기 시작했읍니다. 그리고 결국 점령에 성공했지요.
영국군대는 기병이 없었읍니다. 그들은 찌르는창과 투창, 양날검과 도끼로 무장하고있었고, 이무렵 궁술은 인기있는 스포츠이긴 했으나 무기로 사용되진 않았읍니다. 부유한자들은 쇠미늘갑옷과 금속제투구를 사용했지요.
반면 노르만 기사들은 쇠미늘갑옷을 걸치고 코보호대가 딸린 투구를 착용했읍니다. 연모양 방패를 사용했으며 주무기는 가벼운창이었죠. 또한 장검을 사용했읍니다. 검은 11세기에 이미 충분히 발달해 있었지요.
이외에 도끼나 철퇴를 기사의 기호에 따라 사용했읍니다.
노르만의 부대에는 파이크병과 궁수가 포함돼 있었지요. 노르만 궁수의 활은 1.5미터쯤 되었고, 시위를 가슴까지 잔뜩 당겨야했지요.
11세기초에 노르만은 석궁을 사용하기 시작했읍니다.
영국군은 노르만의 기병에 대항해 단단한 방패벽을 구성하고 저항합니다. 노르만 기사들도 별다른 소득을 보지 못하고 도주하지만...
"궁수"들이 단단한 방패벽을 넘어 화살이 떨어지도록 수직에 가까운 사격을 하여 결국 영국군은 물리치는데 성공합니다.
12세기에 노르만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으나 13세기에 접어들어 프랑스영지를 잃고 영국에선 마그나 카르타에 강제 서명하게 됍니다.
(십자군 원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무거운 갑주로무장한 중장기병은 화살을 쏘며 도주하는 가벼운 경장 궁기병을 도저히 따라잡지 못했고, 궁기병도 중갑주의 기사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했읍니다. 결국 물과 식량이 공급이 끊어진체 과도한 추격으로 고립된 십자군들이 굶주림과 목마름을 견디지 못하고 무모한 돌격을 하다 자멸하게 되지요.
이를 타게하기위한 것으로 강력한 요새를 건축하고 그곳을 수비하는 보병에 의해 안전해진 범위내에서 작전을 하는 방법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만... 기사들은 과도하게 용감한탓에... 무모하게 똑같은 바보짓을 반복해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8회 원정중 가장 희극적인 콘스탄티노플 점령후 황제놀음과 가장 비극적인 12세이하 남녀어린이로 구성된 원정대 -엄청난 희생이 예상되지 않으신지?- 같은 경우는... 정말 할말없지요. )
13세기, 과거 비극적인 막을 내린 십자군 원정은 크나큰 교훈을 주지만 아직 유럽의 지휘관들은 그것을 깨닿지 못합니다. 그것은 보병과 기병의 공조체계는 그것이 각자 행동할때보다 훨씬 크다는것.
어느 주요한 전투에서도 보병은 사용되지 않았는데, 더욱 길어진 파이크와 더욱 강력해진 활과 석궁의 존재가 너무 쉽게 무시되었읍니다. 그 결과 순수하게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농부들을 징집하여 이루어진 보병대에게 대패하는 기막힌 상황도 연출되었읍니다.
13세기 무렵부터 쇠미늘갑옷에 팔뚝 보호대나 정강이 보호대를 추가하기 시작했고, 14세기에 드디어 판금갑옷이 등장합니다. 무거운 판급 갑옷을 다시금 개량한 기병용 흉갑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 갑옷의 약점을 노리는 레이피어와 같은 무기가 사용되게 됍니다.
13세기경엔 이미 봉건제도가 효력을 상실하고 있었읍니다. 봉건제의 농노들로 징집됀 병사들은 전투경험이 전혀없어 대다수가 무기를 다룰줄 몰랐고 그에 따라 용병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었읍니다.
14세기에 기사들과 기병의 무장이 표준화되면서 기사와 기병은 단지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용어로 바뀌게 됍니다.
경장기병은 소규모 접전과 정찰에만 사용되었고 필수적인 역활은 없었읍니다.
최고의 무장훈련은 토너먼트로 완전무장을 하고 실전에서 싸우는것처럼 똑같이 싸웠읍니다. 그중 다들 아시는 기사들간의 마상창경기 (Joust)는 기사 개인 대결로 각자 창을 들고 말을 전속력으로 달려 3번 격돌합니다. 어느쪽도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말에서 내려 다시 각자의 검이나 도끼, 철퇴로 3회에걸쳐 가격했읍니다. 마상경기(Tourmey)의 경우는 집단경기였읍니다.
시간이 지나고 삶이 안락해지고 토너먼트가 너무 심각한 부상을 초래하게되자 정교한 규칙이 마련되었읍니다. 15세기경엔 위험성이 크게 줄었고 전에 없던 대인기를 끌었읍니다. 그러나 16세기경까지 여전히 사망사고가 있었읍니다.
최후의 토너먼트는 19세기에 있었읍니다. 기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모여 경기를 시작했으나 대부분의 일정이 비 때문에 단축되었읍니다.
P.S = 쓸만한 핸드건이 사용된것은 16세기 입니다. 판금갑이 사용되기 시작한것은 14세기... 사실상 평화로웠던 13세기 이후 판금갑이 나타났으므로, 판금갑을 입고 전장에 나서는 기사의 모습은 다소 수정이 필요하지 않을지? 사슬갑이면 몰라도...
문장을 그려넣기 시작한것도 13세기무렵부터 입니다. 얼굴을 정교한 면갑으로 보호하기 시작하면서 신분을 나타낼 표식이 필요해졌지요.
12세기 무렵 십자군을 통해 기사를 신성화 하기 시작했고, 기사도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것은 13세기 입니다.
그러나 기사는 농노의 노동에 의존했고, 성모 마리아를 존경했다 쳐도 여성을 존경했다는 증거는 없읍니다. 확실한건 몸값을 낼수 없는 포로는 학살했다는것.
또한 기병이나 기사는 분명 빠르고 강력한 공격력을 가졌지만, 정교한 체계를 확보한 보병 방어진을 돌파할 능력은 없었읍니다. 전투경험이 별로 없던 보병들이 주력이던 시절엔 분명 기병은 공포스러웠지만, 전투경험이 확보된 병사가 많아지는 시기에 이르면 기병은 위력을 상실했읍니다.
여기 한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