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역사 포럼
밀리터리, 군사 과학, 그리고 역사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한 게시판.
역사 속의, 또는 현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들과 관련한 뉴스 이외에 국내 정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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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정치얘깁니다만
남의 나라 정치 얘기니 괜찮겠죠? (괜찮을 겁니다.)
미국 정치는 명과 암이 너무나 뚜렷합니다.
얼마 전에 이곳에 적은 미디어의 활약 같은 것들이 미국 정치의 밝은 부분이라면,
오늘 적으려는 이야기는 아주아주 어두운 부분입니다.
ALEC(American Legislative Exchange Council)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아마 들어본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사실은 미국에서도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 아니면 거의 모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조직은 은밀성이 생명입니다.
대중들의 눈에 드러나면 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불법적인 조직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합법이라서 문제인 조직이죠. 바로 법을 만드는 단체니까요.
ALEC은 멤버쉽에 의해 운영되는데 멤버는 크게 두 종류입니다.
첫번째는 기업입니다. 미국 내의 수많은 거대 기업들이 멤버로 참여해왔습니다.
두번째는 바로 미국 내 50개 주의 주의회 의원들입니다.
ALEC은 정기적으로 총회를 열고 멤버들의 투표를 통해 아젠다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결정된 아젠다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법률가들을 동원해서 법안의 초안을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안은 의원들에 의해 각 주의 의회에 상정됩니다.
사실 ALEC이 아니더라도 미국에는 정치가들이 각 분야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갖는 모임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저 유명한 유태계 정치압력단체인 AIPAC도 따져보면 ALEC과 거의 흡사한 성격을 갖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ALEC이 단순히 모임을 갖고 서로 의견을 개진하는데서 끝난다면 순수성을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ALEC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의회에 상정될 법안을 직접 만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단체는 기업들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ALEC 총회에서 기업들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ALEC 내부에 이견이 발생해서 정치가들이 단합하여 특정 아젠다를 밀어붙인다 해도,
기업들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간단히 막혀버립니다.
ALEC의 목적은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정치에 기업의 의도를 주입하는 겁니다.
그것도 아주아주 끔찍할 만큼 효율적인 방식으로 말이죠.
중앙과 지방정치가 이원화된 미국 정치 특성상,
워싱턴의 연방정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쉽게 미디어의 집중조명을 받지만,
지방정부, 그러니까 주의회나 주정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잘 이슈가 되지 않습니다.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절대 허용되지 않을 일들도 주정부를 통하면 쉽게 관철시킬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연방정부에서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에 대해 제제를 가하려고 해도, 주정부에서 그걸 막아버리면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그게 ALEC이 주 정부, 즉 지역 정치를 공략하는 이유죠.
두번째로, 법안을 만드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헌법을 해석하고 기존 사례들을 수집해서 문제가 될 소지들을 모두 감안한 뒤
그것을 가장 효율적인 법률 용어로 작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ALEC은 주의회의 의원들을 대신해서 바로 그 법안의 초안을 작성해주는 겁니다.
연방의회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만 주의회 의원들은 그야말로 각계각층에서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법률에는 문외한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거기다 임기도 짧아서 법률을 배워볼 시간도 별로 없습니다.
결국 ALEC의 초엘리트 법률가들이 작성해준 법안을 그대로 갖다 쓸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표면상, ALEC은 정치적인 로비를 전혀 하지 않는 비영리기구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로비스트보다도 강력하고 노골적입니다.
왜냐면 법안의 문구 하나하나를 직접 만드니까요.
ALEC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법안들을 정치계에 주입해왔는지는 사실상 알기 어렵습니다.
현재 드러난 것들을 보고 대략 그 수준이 얼마만큼인지 짐작만 할 따름이죠.
최저임금을 낮은 수준으로 묶어두기 위한 법안들,
농업의 산업화와 관련된 법안들,
친환경 규제를 저지하는 법안,
총기자유화 등등등..
딱 보기만 해도 기업의 입맛에 알맞는 수 많은 아젠다들이 ALEC을 거쳐 법제화됐습니다.
그 중에도 제일 악질은 빈곤층의 투표를 방해하는 법안입니다.
2012년을 전후해서 몇몇 보수적인 주에서 빈곤층의 투표를 방해하는 법안들이 등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선거할 때 사진이 첨부된 신분증 제시를 의무화 한다거나, 선거 시간을 단축시키는 등의 내용입니다.
저게 왜 악질이냐면, 미국에는 주민등록증이 따로 없기 때문에 사진이 들어간 신분증을 구할 곳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신분증으로 널리 쓰이는 것이 운전면허증인데, 자동차가 없는 빈곤층은 운전면허증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안 자체로 보면 별로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실제로는 일부 빈곤층의 투표권을 아예 박탈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선거 시간 단축은 두말할 필요없이 늦게까지 일하는 서민층의 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거죠.
이 법안이 바로 ALEC에 의해 디자인된 겁니다.
ALEC에 의해 초안이 작성된 뒤 동시다발적으로 몇 개의 주 의회에 상정됐죠.
그리고 통과됐습니다.
존나게 나쁜 놈들이죠.
그런데 이쯤 되면 한가지 의문이 떠오를 겁니다.
저런 활동들이 다 드러났는데도 미국 사람들이 ALEC을 그냥 놔둔단 말인가?
미국인들은 머저리들인가?
그럴 리가 없죠.
ALEC은 현재 사실상 거의 활동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바로 저 유명한 "조지 짐머만" 사건 때문입니다.
2013년, 그러니까 올해 7월, 플로리다 주 법원은 살인을 저지른 조지 짐머만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남미계 청년 짐머만은 자경단 활동 도중 골목에서 마주친 흑인 소년을 총으로 쏴죽였습니다.
당시 흑인소년은 비무장 상태였고, 짐머만에게 심각한 위협을 가했는지 여부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개인의 총기에 의한 자위권을 극단적으로 확대한 Stand your ground 법안 때문에
짐머만은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엄청난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대체 왜 이런 법안이 통과되었는지에 관한 관심을 촉발시켰습니다.
불과 몇년 사이에 미국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26개주가 플로리다와 같은 법안을 통과시킨 상태였고
그 배후에는 NRA 그리고 ALEC이 있었습니다.
총기협회 NRA야 워낙 악명높은 단체지만 ALEC은 베일에 가려져있던 조직입니다.
당연히 미디어의 집중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어둠 속에 감춰져있던 ALEC의 활동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기업들이 발빠르게 꼬리를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 12월 현재 코카콜라, 맥도날드, 월마트, 아마존 등등 ALEC의 주요 멤버 기업들이 모두 ALEC을 탈퇴한 상태입니다.
일단 노출된 이상 ALEC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심각한 대중의 분노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미국 기업들은 그걸 무시할 만큼 멍청하지 않습니다.
기업들의 연쇄 이탈로 ALEC의 장래는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아마 해체되거나 유명무실해질 겁니다.
하지만 악당들은 언제나 돌아옵니다.
영화 본아이덴티티의 에필로그에서
CIA 간부인 애봇이 트레드스톤 프로젝트가 폐기됐다고 보고하자 윗사람들이 묻습니다. "Ok, what's next?"
그러자 애봇은 태연하게 다음 프로젝트를 펼쳐듭니다.
ALEC은 이름만 바뀌어서 돌아올 겁니다.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수많은 다른 ALEC들이 어둠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는 거겠죠.
그게 미국이라는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 방식이니까요.
^^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 간섭을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저런 식으로 활동했다니, 솔직히 모골이 좀 송연합니다. 차라리 로비 펼치는 건 쇼맨쉽으로 보일 정도네요. 거대 기업들이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사회 체계를 어떻게 움직이고 영향을 미치는지 상상이 안 가기도 합니다. 원래 의미는 그런 게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란 표현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근본적인 원인은 현재 입법부의 구조나 역량 자체가 지금같이 복잡해지는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에 있겠지요. 의원들이 왜 멍청하게 자기 역할에 대한 주도권을 눈 뜨고 빼앗기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해당 기술을 운용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투자도 하고 있을 기업들에 비하면 어느 누가 상대가 되어도 정보 격차가 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정치적으로 휘둘리지 않기를 기대하기가 어렵지요.
악당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말자는 제안 정도로는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가 제대로 터지기 전에는 누가 어느 시점부터 악의를 가지고 횡포를 부렸는지 구분조차 어려울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구조적으로 누구가의 악의가 개입할 여지를 사전에 차단할 방안에 대해서 더 고민해봐야 합니다.
엥, 이 글을 올리고 혹시나 해서 검색해보니 바로 며칠 전에
SBS에서 "최후의 권력"이라는 제목의 기획특집을 방영하면서 거기에서 ALEC을 집중적으로 다뤘더군요.
요약된 텍스트를 보니 몇가지 조금 핀트가 어긋난 부분도 있는 것 같지만 대체로 좋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SBS가 열심히 일하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