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처음 가입한 기념으로 글 올립니다.

의외로 고전적 SF에 대한 글들이 적군요. 제가 올리는 글은 H.G 웰즈를 이어 영국 SF 문단을 대표한 작가로 꼽히는 존 윈덤 (John Wyndham)의 대표작 중 하나인 트리피드의 날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아동용 문고판 SF 로 소개가 되었는데요, 아이디어 회관에 작품 등록이 되어 있더군요.

일본식 SF나 스페이스 오페라에 익숙해지신 분들에게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모 할수도 있겠습니다만, SF라는 장르가 결국은 미래에 대한 대안소설 (Alternative Novel) 또는 유토피아 노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할때,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중 단연 백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존 윈덤은 아시모프나 론 허버드처럼 우주를 무대로 한 작품은 거의 집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날 우연히' 닥친 재해때문에 인간 문명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 과정을 그리며 문명의 덧없음과 미래에 대한 경고를 한 것으로 유명한 작가인데요. 무대, 즉 재해(재앙)이 닥치는 무대는 전 세계라는 큰 스케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사람의 시점을 통해, 참상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즉, 재앙이 닥친 무너진 세계의 평범한 한 생존자의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트리피드 뿐 아니라, 역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심해에서의 공포 (원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역시 아이디어 회관에 나와 있으니 한번 읽어 보실것을 권해 드립니다)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접한것은 초등학교 5학년으로 기억됩니다. 하드커버로 되어있는, 중간중간 유치한 삽화가 들어있는 (계림출판사 판이었습니다) 아동용 문고판 SF 였는데요, 제목은 '괴기식물 트리피드'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유치찬란한 제목이지요. 소설의 분위기나 내용을 묘사하는데, 원제인 트리피드의 날이 훨씬 어울리죠) 어렸을때 읽고 한동안 않 읽다가, 얼마전 방 정리를 하면서 발견해가지고 읽게 되었습니다. 옛 향수를 느낄 의도에서 읽었는데, 읽다보니 저도 모르게 몰입해서,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진흙속에서 진주를 찾은 느낌이랄까요.

워낙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들이 많기에 스토리나 설정 측면에서는 참신하다고 할수많은 없습니다. '트리피드'라는 걸어 다니는 식물이 발견되는데, 어떻게 발견 되었는지는 소설속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이놈은 키가 2m~3m 까지 자라는데, 나무라고 하기도 힘들고, 풀이라고 하기도 힘드네요. 일종의 식충 식물인데, 덩치가 있다보니, 음식을 가리지 않습니다. 벌레에서 동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양식으로 삼습니다. 머리 (식물이라 머리라고 하기는 힘들고...윗부분이라 해야 하나요) 부분에 채찍 모양의 덩굴을 달고 다니는데, 무서운 독을 담고 있습니다. 이 덩굴로 사람이나 동물을 쳐서 쓰러트린 후 시체가 썩기를 기다립니다. 시체가 썩어서 고기가 부드러워지면 그 고기를 그 덩굴로 조금씩 찍어서 깔데기 모양의 통발(식물이니 통발이라고 해야 하겠죠)로 옮깁니다. 3개의 다리 모양의 뿌리가 있는데, 이 3개의 뿌리를 이용해서 걸어다닙니다. 소설 속에서는 목발짚은 사람이 움직이는 모양으로 묘사가 되어 있지요. 소설 속에서는 보다 자세한 묘사를 위해 덩굴이라고 보다는 채찍으로 묘사가 되는데요, 이 무서운 독채찍으로 본능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의 머리 부분을 쳐서 쓰러뜨립니다. 백발백중에 가깝고요, 치명적인 독 때문에 얼굴에 맞으면 즉사합니다. 운이 좋으면 장님이 되고요. 상당히 끔찍한 설정이지요.
처음에는 이 독의 치명성 때문에, 보는 즉시 없에버리지만, 이 식물에게서 질이 좋은 식용유가 나오고, 찌꺼기도 가축 사료로 만점이며, 독채찍만 잘라내면 큰 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식용/ 관상용으로 널리 퍼지게 됩니다. 설정 상 독채찍은 한번 자르면 2년이 되어야 다시 자란다고 하지요. 특히  소설속의 지구는 폭발적인 인구때문에 식량문제의 해결이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는 세계입니다. 트리피드는 식량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해 줄 뿐 아니라, 걸어다닌다는 신기함 때문에 번창을 하게 됩니다.
소설 속 트리피드는 식물보다는 동물같은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때로는 에이리언같은 느낌도 줍니다. 우선 번식력이 무섭고요, (식물은 동물과는 달리 씨로 자라니까요. 트리피드 역시 식물이며, 풍매화이기 때문에 바람에 날린 씨가 땅에만 떨어지면 금방금방 자란다고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육식'을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정도면 큰 위협거리가 되지는 못하죠. 동물처럼 날카로운 발톱달린 다리가 달린것도 아니고, 유일한 공격수단은 채찍 뿐이니까요. 그런데 소설 초반에 큰 파국이 일어납니다. 어느날 갑자기 떨어진 유성우...역사상 처음 있었다는 멋진 우주 쇼였죠...에 의해서, 그 유성을 본 사람들이 모조리 눈이 멀어버린겁니다. '역사상 처음'정도의 유성우이니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유성우를 보았을 터이고... 모두 눈이 멀어버립니다. 주인공인 빌 메이슨은 마침 눈이 다쳐서 그 유성우를 못 보게 되고 (정말 우연이죠), 이후 대부분의 인간들이 눈이 멀어버린 상황에서, 메이슨은 갖은 역경을 해쳐 나갑니다. 동반자인 조젤러라는 여성과 함께요. 그리고 눈이 먼 사람들은....통제에서 벗어난 트리피드의 밥이 되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어가지요. 인간의 오만한 문명도 이와 함께 무너져 버립니다.

소설에서는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가장 큰 화두는 '트리피드'와 함께 '눈(시력)'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명은 사물을 보는 '눈'을 기초로 이루어 졌고, 이 '눈' 이라는 감각을 잃었을때 인간은 얼마나 비참해지고 약해지는가. 끝없는 어둠이 닥치면 인간은 어둠을 이겨낼 용기를 상실합니다. 끝없는 공포에 못이겨 자살하는 사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눈 뜬 사람을 자신의 지휘자 (또는 노예)로 삼으려는 장님들. 우연히 화를 피해서 장님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공동체를 조직하여, 자신들과 장님들의 생존을 꾀합니다. 자신들의 이념에 의거하여 움직이는 공동체들과 그들간의 상호 투쟁. 다른 공동체를 쓰러뜨리고 그들의 식량을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이성보다는 본능을 우선하는 약육강식의 사회. 전염병에 죽어가는 인간들과, 눈을 잃은 후 통제에 벗어난 트리피드에게 공격을 받아 학살되는 인간들. 끔찍한 지옥도가 순식간에 비범해진 (시력을 잃지 않았으므로) 한 평범한 사람의 담담한 시각에서 그려집니다.

소설은 서사의 문학이자 묘사의 문학입니다. 순식간에 무너지는 문명을 묘사하는 윈덤의 역량은 놀랍습니다. 특히, 사고가 난 지 6년 후, 모든 문명이 붕괴된 상태에서 소설속의 배경인 영국, 런던의 허물어진 모습을 '담담'하게 그리는 윈덤의 묘사는 오히려 그 끔찍성을 배가시킵니다.

소설의 마지막. 결국 이 모든 파국은 인간에 의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대기권 위에 떠다니는 수많은 위성병기들. 그중 하나의 사고로, 인간에게 시신경만 태워버리는 유성우가 내렸으며, 위험한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관상과 식량을 목적으로 재배하다가, 즉 '식량'으로 삼으려는 존재들에게 '식량'이 되어 버리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이야기하며, 결국 모든 화의 근원은 인간이며, 인간은 천재가 아닌 인재에 의해 멸망될 것임을 암시하지요.

그리 긴 분량의 소설은 아니므로, 읽으시는데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게다가 공개가 된 상태이고요. 너무 공상적이고, 황당한 소설들에 지치신 분들에게 근미래를 그렸고, 비교적 현실적인 시각에서 그린 트리피드의 날을 추천하고 싶네요.

We shall know no f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