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취천루 건너편 명동의 인파 한복판에서 제이는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제이를 확인한 후 조가 다가가며 최대한 제이에게서 표정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조가 앞에 다가섰을 때 제이는 담배를 아스팔트 바닥에 떨구었다. 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괜찮냐?”

“응.”

둘의 대화는 조의 물음으로 건조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조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좀 걷자.”

조와 제이는 명동 성당 쪽으로 걸었다. 조는 골든 컬러의 야구 점퍼와 브라운 카고 바지에 단화차림이었고 제이는 옅은 네이비 블루의 윈드 브레이커와 그에 잘 어울리는 낙낙한 스트레이트 블루진 차림이었다. 제이는 다시 던힐을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음, 장례식은...”

“그런 건 없어. 원래 이 바닥이 그래.”

“그렇군.”

“누가 저지른 일인지 알겠지?”

“팀장이겠지?”

“맞아. 회사는 최근에 계획을 하나 수립하고 있었지. 이제 전쟁은 군인의 쪽수가 아니라 스위치나 눌러대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첩보전에서만큼은 여전히 요원의 중요성은 감소하지 않았어. 뭐 좀 먹을래?”

“아니, 괜찮아.”

“문제는 요원의 임무 수행 중 사망으로 인한 손실은 메우기 힘들다는 것이야. 보수와 진보 언론 양 쪽에서 두 눈을 시퍼렇게 부릅뜨고 특종을 찾는 데다 인터넷은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보와 루머를 뒤섞어 양산하고 있지.
몇 년 전 대선과정의 흑금성 사건이 대표적인데 군사정권 시절이었다면 절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을 사건이 개나 소가 다 알 정도가 되었어. 내년 초에 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질 텐데 결코 유리하지 않을 거야. 사실 흑금성 사건의 전말도 극히 일부만 보도된 것이고 그 와중에는 요원들의 희생이 따랐어.
유능한 요원을 키우는 것도 힘이 들고 희생되면 뒤처리도 힘들기 때문에 - 이젠 유가족들도 가만있지 않거든. - 회사 일각에서는 첨단 유전공학을 도입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어. 바로 클론을 만드는 것이야.”

“클론? SF 소설 같군.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미국보다 우리나라가 연구하기 더 자유롭지. 미국은 복제에 관련된 보수적인 법안과 종교계의 반발 때문에 음지에서 국가만이 행하고 있지만 우리는 양지에서도 이루어지고 있고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어. 그 성과 중 언론에 공개된 것은 극히 일부인데 미국의 압력이나 종교 단체 등의 반발과 기술 유출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숨기고 있었지. 하지만 최근에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괄목할 만한, 아니 대박이 터졌어.”

어느새 둘은 명동 성당 앞에 도달했다. 제이는 언덕을 올라 명동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 저녁의 명동 성당에는 미사를 보러 온 사람들 외에는 많지 않았다. 둘은 미사가 끝난 성당 안으로 들어가 중간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엉덩이와 발바닥이 시렸다.

“대박?”

“응, 인간 복제에 성공한 거야.”

“대단한데.”

“하지만 문제가 있어. 뭐일 것 같아?”

“지금 복제해봤자 최소 20년은 지나야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이지. 자라서 어른이 되어야 하니까.”

“역시 넌 영리해. 맞아. 그래서 회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어. 10년 후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남아 있을지도 알 수 없는데 20년 후를 보고, 난관에 부딪힌 프로젝트에 투자를 하기는 어렵지. 비용도 만만치 않고. 그런데 연구진은 자신감을 내보였어. 4년만 주면 어떻게든 해결을 보겠다고. 하지만 노인네는 거기서 연구 중단을 지시했지. 노인네는 현실적인 인간이라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견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거든.
하지만 4년 안에 해결을 보겠다는데 혹한 세력이 있었어. 바로 연말 대선에서 정권을 잡을 것이 확실시되는 여당의 한 계파의 신실세가 관심을 보인 거야. 그리고 계획에 반대하는 노인네를 제거하고 싶어 했지. 회사에 34년째 근속하고 있는 노인네를 추종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아서 노인네를 몰아낼 경우에는 군대를 동원해 회사와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여당 내에서 퍼졌어.”

“신실세라면...?”

“박문기 의원.”

“설마? 박문기 의원은 여당 내 소수파잖아? 게다가 박 의원은 인지도나 나이 면에서 대선에 출마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 하지만 이번에 여당은 국민 경선을 하잖아. 박 의원은 국민 경선을 보고 킹메이커가 될 생각인 것이지.”

“그러니까 박 의원과, 친구에게 한직으로 밀려난 팀장이 손을 잡았군?”

“그렇지. 현대통령의 아들들이 구속되는 레임덕 상황에서 노인네는 이미 힘을 잃었지만 자각하지 못했고 신실세와 민간 연구진을 등에 업은 팀장은 노인네를 처리한 거야. 그게 3시간 전의 일이지. 팀장이 새아버지가 되었어.”

성당 안에는 조와 제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군데군데 여섯 명의 중년과 노년의 부인들이 미사보를 쓰고 묵주를 손에 쥔 채 소리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조는 혹시 그들이 회사에나온 것은 아닌가 신경 쓰면서 제이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쩌겠어. 팀장을 처리해야지.”

“혼자서?”

제이는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같이 가자.”

조의 제안에 제이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약속했잖아. 네 손에는 피 안 묻히게 해주겠다고. 게다가 넌 신조가...”

“아니, 현상황은 선택의 단계를 넘어섰어. 너 혼자의 복수가 무리인 것도 있지만 문제는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거야. 팀장은, 아니 새아버지는 우리를 처리할 거야. 내 옷이 내 피로 범벅이 되고 싶지 않으면 녀석들의 선지를 묻혀야한다는 것이지. 너나 나나 실패해서 죽을 지도 몰라. 하지만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총이라도 신나게 갈기다 죽어야 되지 않겠어? 총은 잔뜩 있지?”

“당연하지.”

제이는 미소 지어 보였다. 성당 안에서는 장엄한 파이프오르간 연주가 장송곡처럼 울려 퍼졌다.
안녕하십니까? SF 소설을 즐겨 읽고 습작으로 쓰고 있는 연재할 곳을 찾아 가입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