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의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했다. 평일 오전의 고즈넉한 주택가 골목 안에는 인기척이 드물었다. 골목에 주차되어있는 차들과 노란 정화조가 얹힌 옥상을 확인했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작은 빗방울이 손등을 때렸다.

대학가가 가까워서인지 그녀의 집은 4층짜리 원룸 건물의 3층에 위치했다. 나는 건물 입구에서 그녀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낸 다음 오른손을 권총이 있는 허리춤에 넣고 뒤꿈치를 들고 뛰어 올라갔다. 허리와 엉덩이, 늘씬한 다리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난 스키니진을 입은 맨발의 진이 문을 열고 나를 맞이했다.

“괜찮아요?”

“예, 다행히 지금까지는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런 건 아닌데...”

“오늘 출근 안하셨어요?”

“그냥 쉬겠다고 했어요. 몸이 안 좋다고 했어요. 사실 몸이 무거워요. 생리가 와서. 도대체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혼란스러워요.”

나는 그녀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지금 내가 그런 기분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해한다는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방 안의 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묘한 자극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럴 기분은 아니었다. 문득 류나 원에게서는 이런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그저께 분명 당신 아니었죠?”

“예. 분명히 아닙니다. 어제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저는 며칠동안 정신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집안을 치우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지만 내 집보다 깔끔하지는 않았다. 싱글 베드 위의 핑크색 침구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다운 취향이다.

“그럼 그 대역이란 건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모르겠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하면 3류 SF 소설이 되고 맙니다. 21세기 초반의 과학 기술 수준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뭔가 백유석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활개를 치고 다니면 기분이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 걸 생각할 여유는 없습니다. 첫째는 살아남는 것이고 둘째는 친구를 위해서...”

권중호를 처리하러 갔다 사람이 녹아내렸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쩌면 ‘대역’이라는 단어는 적당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말끝을 흐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스키니 진 위에 커다란 핑크색 하트 마크가 그려진 꼭 끼는 반팔 스판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탄력 넘치는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싶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죠? 그것도 딱딱한 어투. 제게 조금만 더 친밀하게 대해주면 안되나요?”

그녀의 싱글 베드 위에는 커다란 테디 베어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앞에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타는 듯한 그 시선은 부담스러웠다.

“우리 사귈래요?”

“이게 급한 일이었습니까?”

“난 당신이 좋아요. 그냥 편해요. 자신을 드러내는 타입은 아니지만 안정감이 있어요. 진실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제가 뒤통수 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미소 지으며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래서 삐졌군요?”

내 입술에 그녀의 입술이 포개졌다. 그녀는 속눈썹이 긴 쌍꺼풀을 닫으며 눈을 감았지만 나는 눈을 뜨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가 입술을 떼자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우리 안 될까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귀는 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내 자신이 싫었다.

“제가 덜렁거리는 것 같아서 그런가요? 저 잘할 수 있어요.”

“그런 게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먼저 고백해본 건 처음이에요. 항상 고백을 받는 편이었는데... 그냥 당신을 만난 후 내내 당신 생각이 났어요. 그림자가 엷어 보였어요.”

“당신은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그러니 저 같은 남자에게 이럴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나약함을 그녀에게 매달려 호소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등을 돌리고 하늘색 아디다스 스니커즈에 발을 넣었다.

“까칠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제 주변의 사람들 중에서는 제가 가장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나는 제이와 노인, 그리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 여의사 때문인가요? 그 여자 사랑했어요?”

입술만 달싹였을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 것을 대답할 수는 없었다. 등 뒤에서 철컹, 하고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가슴을 후벼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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