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END - 작가 : 레가드(kasi)
글 수 80
하지만 마냥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었다. 이어폰을 넘어 자동차 경적 소리가 귀를 때렸다. 뒤를 돌아보니 진보라색 BMW가 서 있었고 운전석에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내게 우아하게 손짓했다. 나는 차안에 노인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타게.”
차는 네온사인을 밝힌 문래동 홈플러스 앞을 출발해 여의도로 향했다. 멀리 국회의사당 건물이 보였다. 저 건물 본회의장의 299명 중 한 명을 내가 죽였다.
“문래동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네. 자넨 문래동에서 1년 동안 생활했었지?”
“예.”
“내가 다 알고 있다는 거, 자네도 알고 있지?”
“예.”
“문래동에서 생활한 후 2년 후에 그 친구를 만난 거구만. 여의사 말일세.”
“... 그렇습니다.”
“안됐네. 상투적인 말이지만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있네. 그걸 깨닫고 나면 이미 늙어버리지. 만시지탄일세.”
노인의 운전하는 모습도 우아했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여유롭게 핸들을 돌렸는데 나의 국산 소형차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핸들의 움직임이 부드러워보였다. 노인의 차 주변에는 다른 차들이 접근하지 않아 넉넉한 차간거리가 유지되었다. 값비싼 외제차라 접촉사고만 나도 몇 백 만원은 족히 날아가기 때문이었다. 노인의 세단은 크기로 주변을 압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날렵한 모양와 스타일리시한 색감으로 시선을 끌었다. 사이드 브레이크 아래의 먼지 하나 없는 콘솔에는 작은 성냥갑이 있었다.
차는 여의도를 지나 올림픽대로 하남 시 방면을 올라탔다. 의외로 정체는 심하지 않았다. 노인은 이미 이런 것까지 확인해둔 것일까. 차 안에 네비게이션은 없었지만 노인에게는 애당초 그런 것 따위는 필요 없어 보였다.
“나이가 든다는 건 해도 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줄 알게 된다는 걸세. 젊었을 때에는 안 될 일도 될 줄 알고 들이대고 실패하곤 했지만, 나이를 먹으면 할 수 없는 건 해보기도 전에 대번에 알게 되네. 그래서 지루함도 참을 줄 알게 되고. 지루함을 견디는 것도 해야 할 일임을 깨닫게 되니까. 사실 나이가 든다고 지루한 것을 지루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네. 누구나 지루한 것을 보면 못 견뎌 좀이 쑤시기 마련이지. 하지만 지루함에 익숙해지면 괜찮아.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도 익숙해지면 견딜 만 하지. 게다가 늙으면 시간도 잘 가네.”
노인이 멋대로 지껄이는 말의 의미를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7년 전만 해도 나는 지나치게 평범하고 안온해 지루하기까지 했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프랑스 문화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보고 교보문고에 서성거리던 나날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런 안온함과 너무나 동떨어진 시공간에 있었다. 목숨을 담보로 실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적과 싸우고 있다. 나는 패할 것이다.
“누구나 인간은 배신을 당하네. 나이가 들면 배신당한 회수도 누적되지. 처음 배신을 당하면 견딜 수가 없어. 특히 어릴수록 인간관계가 좁으니 주변의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할 확률이 높지 않겠나. 부모나 첫사랑이 될 확률이 높지. 친구나 동료도 될 수 있고.”
“친구에게 배신당한 적이 있으십니까?”
“사적인 질문을 할 때도 있군. 난 안했던 것 같은데? 호오, 부조리하다는 그 표정. 맞아. 하긴, 그렇지. 이미 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서 자네에게 질문할 필요가 없었네.”
노인의 BMW는 동작대교를 거쳐 반포대교로 향했다. 올림픽대로의 차들은 모두 안개등을 전조등으로 바꾸었다.
“배신당하는 자도 배신하고, 배신하는 자도 결국 당하는 법이야. 동시에 서로를 배신하지. 하지만 인간의 기억 체계는 워낙 편리해서 자신이 배신한 것은 잊고 배신당한 것만 생각하는 법이지.
결국 모든 것이 씁쓸해지지. 배신하고 배신당함으로 얼룩지는 인생. 이제 슬슬 정리할 시점이 왔어. 솔직히 후회가 되네. 언젠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나락으로 구르는 건 순간이었어.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노인의 BMW는 잠실 철교를 지나 올림픽 대교로 빠져나왔다.
“아, 묻지 않았는데 집에 오는 길 맞았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아시지 않습니까?”
“후후. 다 왔네. 오늘은 기사 노릇 좀 했네.”
나는 노인이 내게 뭔가 할 말이 있거나 줄 것이 있어 데리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 친구는 유도일세.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덩치 큰 친구.”
노인은 사자가 그려진 성냥갑을 오른손으로 들고 만지작거렸다.
“그 친구는 최골세. 자신의 일을 즐길 줄 알지. 자네도 기억하고 있을 걸세. 그 친구의 미소를”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미소 위에 고통스러워하며 죽는 표정이 겹쳐지도록 해야 한다.
“참. 이거 줌세.”
노인은 내게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진실. 그걸 받아들이게.”
노인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천호대교 쪽으로 차를 몰아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그 사진을 보았다. 사진에는 낯익은 두 사내의 상반신이 찍혀있었다. 물론 둘은 자신들이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무표정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사진 오른쪽의 사내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흰색 정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머리모양은 달랐지만 표정은 익숙했다. 살이 없이 각진 턱과 작은 입. 그건 나였다. 아니, 내가 아니라 대역이었다. 흰색 정장 따위는 없고 앞으로도 사고 싶지 않다. 나이트 클럽 MC에게나 어울릴 옷을 살 바에는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보는 나이키의 트레이닝 상의를 하나 사는 편이 낫다. 아마 이 녀석이 어제 진을 위협했던 것 같다.
문제는 왼쪽의 사내였다. 45도 돌린 옆얼굴이 드러났는데 선글라스 같은 것은 끼지 않았고 눈과 키가 작았다. 엉거주춤 서 있는 자세가 상반신만 봐도 다리가 불편한 것 같았다. 오늘 오후에 내게 피자를 배달한 사내였다.
더 볼 필요가 없었다. 사진을 책상 서랍 속에 집어넣다가 일기가 눈에 띄었다. 저 일기는 도대체 얼마 동안 쓰지 않았을까. 원과 매일 같이 만나 영화를 보고 피자와 스파게티를 먹으러 다니던 달콤한 일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일기.
나는 일기를 손에 쥐고 책장을 펼치려다 포기했다. 이 일기에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더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타게.”
차는 네온사인을 밝힌 문래동 홈플러스 앞을 출발해 여의도로 향했다. 멀리 국회의사당 건물이 보였다. 저 건물 본회의장의 299명 중 한 명을 내가 죽였다.
“문래동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네. 자넨 문래동에서 1년 동안 생활했었지?”
“예.”
“내가 다 알고 있다는 거, 자네도 알고 있지?”
“예.”
“문래동에서 생활한 후 2년 후에 그 친구를 만난 거구만. 여의사 말일세.”
“... 그렇습니다.”
“안됐네. 상투적인 말이지만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있네. 그걸 깨닫고 나면 이미 늙어버리지. 만시지탄일세.”
노인의 운전하는 모습도 우아했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여유롭게 핸들을 돌렸는데 나의 국산 소형차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핸들의 움직임이 부드러워보였다. 노인의 차 주변에는 다른 차들이 접근하지 않아 넉넉한 차간거리가 유지되었다. 값비싼 외제차라 접촉사고만 나도 몇 백 만원은 족히 날아가기 때문이었다. 노인의 세단은 크기로 주변을 압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날렵한 모양와 스타일리시한 색감으로 시선을 끌었다. 사이드 브레이크 아래의 먼지 하나 없는 콘솔에는 작은 성냥갑이 있었다.
차는 여의도를 지나 올림픽대로 하남 시 방면을 올라탔다. 의외로 정체는 심하지 않았다. 노인은 이미 이런 것까지 확인해둔 것일까. 차 안에 네비게이션은 없었지만 노인에게는 애당초 그런 것 따위는 필요 없어 보였다.
“나이가 든다는 건 해도 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줄 알게 된다는 걸세. 젊었을 때에는 안 될 일도 될 줄 알고 들이대고 실패하곤 했지만, 나이를 먹으면 할 수 없는 건 해보기도 전에 대번에 알게 되네. 그래서 지루함도 참을 줄 알게 되고. 지루함을 견디는 것도 해야 할 일임을 깨닫게 되니까. 사실 나이가 든다고 지루한 것을 지루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네. 누구나 지루한 것을 보면 못 견뎌 좀이 쑤시기 마련이지. 하지만 지루함에 익숙해지면 괜찮아.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도 익숙해지면 견딜 만 하지. 게다가 늙으면 시간도 잘 가네.”
노인이 멋대로 지껄이는 말의 의미를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7년 전만 해도 나는 지나치게 평범하고 안온해 지루하기까지 했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프랑스 문화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보고 교보문고에 서성거리던 나날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런 안온함과 너무나 동떨어진 시공간에 있었다. 목숨을 담보로 실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적과 싸우고 있다. 나는 패할 것이다.
“누구나 인간은 배신을 당하네. 나이가 들면 배신당한 회수도 누적되지. 처음 배신을 당하면 견딜 수가 없어. 특히 어릴수록 인간관계가 좁으니 주변의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할 확률이 높지 않겠나. 부모나 첫사랑이 될 확률이 높지. 친구나 동료도 될 수 있고.”
“친구에게 배신당한 적이 있으십니까?”
“사적인 질문을 할 때도 있군. 난 안했던 것 같은데? 호오, 부조리하다는 그 표정. 맞아. 하긴, 그렇지. 이미 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서 자네에게 질문할 필요가 없었네.”
노인의 BMW는 동작대교를 거쳐 반포대교로 향했다. 올림픽대로의 차들은 모두 안개등을 전조등으로 바꾸었다.
“배신당하는 자도 배신하고, 배신하는 자도 결국 당하는 법이야. 동시에 서로를 배신하지. 하지만 인간의 기억 체계는 워낙 편리해서 자신이 배신한 것은 잊고 배신당한 것만 생각하는 법이지.
결국 모든 것이 씁쓸해지지. 배신하고 배신당함으로 얼룩지는 인생. 이제 슬슬 정리할 시점이 왔어. 솔직히 후회가 되네. 언젠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나락으로 구르는 건 순간이었어.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노인의 BMW는 잠실 철교를 지나 올림픽 대교로 빠져나왔다.
“아, 묻지 않았는데 집에 오는 길 맞았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아시지 않습니까?”
“후후. 다 왔네. 오늘은 기사 노릇 좀 했네.”
나는 노인이 내게 뭔가 할 말이 있거나 줄 것이 있어 데리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 친구는 유도일세.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덩치 큰 친구.”
노인은 사자가 그려진 성냥갑을 오른손으로 들고 만지작거렸다.
“그 친구는 최골세. 자신의 일을 즐길 줄 알지. 자네도 기억하고 있을 걸세. 그 친구의 미소를”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미소 위에 고통스러워하며 죽는 표정이 겹쳐지도록 해야 한다.
“참. 이거 줌세.”
노인은 내게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진실. 그걸 받아들이게.”
노인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천호대교 쪽으로 차를 몰아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그 사진을 보았다. 사진에는 낯익은 두 사내의 상반신이 찍혀있었다. 물론 둘은 자신들이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무표정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사진 오른쪽의 사내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흰색 정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머리모양은 달랐지만 표정은 익숙했다. 살이 없이 각진 턱과 작은 입. 그건 나였다. 아니, 내가 아니라 대역이었다. 흰색 정장 따위는 없고 앞으로도 사고 싶지 않다. 나이트 클럽 MC에게나 어울릴 옷을 살 바에는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보는 나이키의 트레이닝 상의를 하나 사는 편이 낫다. 아마 이 녀석이 어제 진을 위협했던 것 같다.
문제는 왼쪽의 사내였다. 45도 돌린 옆얼굴이 드러났는데 선글라스 같은 것은 끼지 않았고 눈과 키가 작았다. 엉거주춤 서 있는 자세가 상반신만 봐도 다리가 불편한 것 같았다. 오늘 오후에 내게 피자를 배달한 사내였다.
더 볼 필요가 없었다. 사진을 책상 서랍 속에 집어넣다가 일기가 눈에 띄었다. 저 일기는 도대체 얼마 동안 쓰지 않았을까. 원과 매일 같이 만나 영화를 보고 피자와 스파게티를 먹으러 다니던 달콤한 일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일기.
나는 일기를 손에 쥐고 책장을 펼치려다 포기했다. 이 일기에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더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안녕하십니까? SF 소설을 즐겨 읽고 습작으로 쓰고 있는 연재할 곳을 찾아 가입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