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와 함께 영등포 역에서 내린 후 롯데 백화점 건너편 커피샵으로 들어갔다. 영등포 역 지하도로 들어가 퇴근 인파를 헤치며 그녀는 내게 이 동네에 와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재수할 때 이곳에 있는 학원에 다녔지만 지금은 학원이 고시원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영등포 역 건너편의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그녀는 블랙커피를, 나는 핫쵸코를 주문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머그 컵을 내려놓았다.

“어제 나를 협박한 당신과 오늘 기자 회견을 한 백유석이 모두 가짜라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백유석은 이미 죽은 거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쌍둥이...?”

“전혀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가짜들은 대역인가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너무 감쪽같았어요. 백유석은 TV에서 늘 보던 모습과 똑같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 사소한 몸짓도 완전히 같았어요. 이를테면 앞머리를 쓸어 올리거나 입 앞에 깍지를 끼는 모습까지... 전혀 의심하지 않았죠. 게다가 표정과 말투까지 신사적인 것도 그렇고요. 물론 대사는 아주 살벌했지만. 그래서 언젠가 뒤통수를 칠 거란 예감이 맞았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창밖으로 보이는 역 앞의 정류장에는 버스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승객을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었다.

“대역입니다. 백유석이야말로 대역이 필요할 수밖에 없죠. 사소한 버릇까지 이미 완벽하게 체득해둔 가짜일 겁니다.”

“그럼 당신은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당신도 백유석만큼 대역이 필요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뭔가 착각한 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두문불출했습니다.”

“절대로 아니에요. 착각할 리가 없어요. 내 몸 안으로 들어왔던 남자를 착각할 정도로 둔한 여자 아니에요.”

나는 그녀의 단언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 백유석의 죽음을 막으려 했던 이유가 뭐예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가요?”

“백유석은 잘 모르고 그 아내를 압니다. 내 친구였죠.”

그녀가 진지해졌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너머로 오른손을 내밀어 내 왼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지만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슬픔 때문에 이 여자의 품에 안겨 울었으면 좋겠다는 나약한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억눌렀다. 한동안 그녀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내가 어떡하면 될까요? 당신의 증언을 보도하면 되나요?”

“증거가 없습니다. 모두 제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당신도 반신반의하고 있잖아요.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기사를 쓸 수는 없겠죠?””

“당신이 받았다는 지령서와 자료가 있잖아요? 가지고 있죠?”

“그건 인터넷에서 떠도는 음모론 수준을 넘지 못한다고 데스크에서 잘릴 겁니다. 설령 데스크에서 제가 가진 정보가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면 더더욱 잘릴 확률이 높아지죠. 신문사와 편집장 자신의 안위를 위한다면.”

“이제부터 저보고 캐라는 거군요?”

“백유석에 관한 것만 부탁합니다.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 공유합시다. 그리고 앞으로 제가 당신을 보호하겠습니다.”

“당신의 보호는 기대하지도 않아요. 제 앞가림은 제가 해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박문기 의원 건부터 혼자 취재해왔으니까요.”

“하지만...”

“됐어요. 기자로서 한 건 할 때도 되었죠.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취재는 할 수 없어요. 바이크도 새로 사야하고요. 그것보다 당신은 어쩔 거죠?”

“친구가 죽었습니다. 회사에서는 내가 친구를 죽이길 원했습니다. 간단합니다. 제가 할 일은.”

진과 커피샵을 나오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따뜻한 시선으로 내 눈을 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 덕분에 뚜벅이 신세가 됐으니 지하철을 타야해요. 나, 바래다 줄래요?”

진은 내게 물었지만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황급히 자답했다.

“됐어요.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군요.”

내 표정에서 우울함이 묻어났던 것 같다. 그녀가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죽지 마세요.”

나는 우두커니 서서 영등포 역으로 향하는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은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등을 돌렸다. PSP를 꺼내 CD에서 추출한 ‘패트레이버 2’의 몽환적이고도 비장한 배경음악 ‘언내츄럴 시티’를 들으며 청과물 시장을 거쳐 재수 시절 다녔던 학원 쪽으로 걸었다. 9년 전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짝사랑했던 여자아이의 뒤를 먼발치에서 따라, 차가 드문 왕복 4차선 도로 한복판을 중앙선을 밟으며 걷곤 했다.

해가 저문 거리에는 인적도 드물어 을씨년스러웠다. 학원 앞은 재수 시절만 해도 허허벌판이었지만 지금은 잿빛 아파트 단지가 솟아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앞의 왕복 4차선 도로와 은행나무는 9년 전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 늘어나 그때처럼 한복판을 걸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날씨가 무덥고 가물어 은행나무는 화사한 단풍을 뽐내기는커녕 바싹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진을 최소한 영등포역까지 바래다 줬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모든 후회가 그렇듯 이미 늦었다. 진에 대한 나의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가와이 겐지의 음악은 언제나 그렇듯 나의 허무를 애써 어루만지거나 반대로 자극하지도 않고 관조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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