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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혼합물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것도 아주 잘 정제된 혼합물입니다]

좀비를 상대로 벌이는 세계대전을 그린 소설 <세계대전 Z>. 이 책은 각국에서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겪는 짤막한 이야기들이 모여 세계대전이라는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단편을 연이어 읽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 그 중 인상 깊은 것 중 하나가 중국 잠수함 이야기였습니다. 내용인 즉, 육지에 대량으로 좀비가 퍼지고 생존이 다급해지자 배를 타고 바다로 도피한다는 식입니다. 당시 중국 해군 잠수함장이던 천 함장은 시체가 좀비로 일어서고, 그 좀비가 인간을 공격하고, 인간이 좀비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난생 처음으로 중국 국민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지도부에서는 제대로 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육군은 젊은이들을 총알받이로 내몰며 (그 총알받이들이 다시 좀비로 되돌아오는) 비효율적인 전투만 계속 했죠. 이러다간 중국 전역에 좀비들이 들끓을 게 뻔한 일. 그래서 천 함장은 극단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바다로 도피하는 거죠.

 

천 함장은 수하의 수병들을 이끌고 바다로 피하기 위해 중국 최고의 원자력 잠수함이라는 정화 기함을 훔칩니다. 물론 중국 해군이 알면 길길이 날뛸 일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그냥 좀비한테 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를 악물고 탈영을 합니다. 그러나 바다로 나왔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는 일. 무단탈영 함선이, 그것도 막강한 카드가 될 수 있는 원자력 잠수함이 함부로 다른 국가에 정박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입니다. 만일 다른 국가의 선박과 마주친다면 그 쪽 해군에서 어떻게 나올지야 뻔한 일이고, 정화 원잠의 위치가 중국 해군의 정보망에 들어간다면 쫓기고 쫓는 추격전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법은 단 한 가지. 바다 속으로 깊이 들어가 세상과 단절한 채 좀비들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정화함은 갖가지 고초를 겪고, 더 나가 해저의 좀비라는 상상도 못할 위기를 맞이합니다. 바다 속이라고 결코 안전한 도피처가 아니었던 거죠.

 

작품의 전체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톰 클랜시가 쓴 <붉은 10월호>와 잭 스나이더가 찍은 <새벽의 저주>를 짬뽕한 느낌입니다. 갑작스럽게 불어나 인류를 고립 상태로 몰고 가는 좀비 바이러스는 전형적인 좀비물 <새벽의 저주>를, 최고의 원자력 잠수함을 타고 모국 해군에 쫓기며 바다를 떠돈다는 부분은 <붉은 10월호>를 닮았습니다. (조지 로메로를 놔두고 굳이 잭 스나이더를 언급한 이유는 여기 좀비들이 최신 유행에 걸맞게 튀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두 가지 요소가 따로 놀지 않고, 적절하게 섞여 있어 좀비물과 잠수함물의 시너지를 잘 살려 내었습니다. 후반부에는 잠수함물의 비중이 늘어나지만, 그렇다고 좀비물이 아예 희석되는 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좋아하는 데다가 좀비 이야기에 잠수함이 나오는 건 처음 보는지라 꽤나 신선했습니다. 아마 베스트셀러 혹은 스터디셀러로 알려진 좀비 작품 중에 해저에서 잠수함을 타고 다니는 건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할 듯하군요. 일반적으로 좀비라고 하면 육지에서 돌아다니는 걸 떠올리기 때문에 잠수함과 연관 지을 생각은 하지 못하죠.

 

그리고 보면 이 이야기만이 아니라 <세계대전 Z> 전체에 걸쳐 바다 좀비가 꽤 빈번하게 나오는 편입니다.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격리를 피하기 위해 해상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그만 배 위에서 좀비로 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 발병 초기,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들은 배 위에서 무방비로 좀비의 습격을 받았고, 결국엔 탑승자 전원이 좀비로 변하는 사태까지 심심치 않게 벌어집니다. 그러다가 배가 태풍을 만나거나 하면 좀비들이 바다로 떨어지게 되고, 마침내 전세계 바다에 이런 바다 좀비들이 판을 치게 되는 거죠. 작가는 이런 바다 좀비가 해저에서 썩지 않고, 질식하지도 않기 때문에 걷고 또 걸어 마침내 육지에 나간다고 설정해 놓았습니다. 솔직히 질식하지 않거나 썩지 않는다고 해도 해저라는 극히 위험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긴 합니다만. 좀비 무대를 육지로만 한정하지 않고 바다로까지 확대한 건 매우 참신한 설정입니다.

 

소설 <세계대전 Z>에는 기억에 나는 명장면이 참 많지만, 잠수함전 특유의 숨바꼭질과 독특한 설정으로 전개한 정화 잠수함 이야기가 참 와 닿았습니다. 솔직히 이걸 단편으로만 끝낼 게 아니라 외전을 따로 내면 더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했어요. 만일 이 작품이 영화로 나온다면, 이 부분을 꼭 빼지 말고 영상화했으면 좋겠습니다.

※ 저 에피소드를 읽고 나니 갑자기 <붉은 10월호>가 읽고 싶어지네요. 이거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어렵다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