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기적이자 희망 인간의 아이

 

알폰소 쿠아론이 감독한 영화 <칠드런 오브 멘>은 멸종 직전에 몰린 인류의 암울함을 담은 작품입니다. 멸종 원인은 특이하게도 흔히 쓰이는 핵 전쟁이나 좀비 창궐이 아니라 바로 불임입니다. 핵 전쟁처럼 당장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아니고, 좀비 창궐처럼 괴물들이 싸돌아다니는 것도 아닙니다만. 대신 불임은 느리게 다가오는 공포입니다. 느리게 다가오는 만큼 혼돈이 번지는 기간도 그만큼 길고, 암울함도 길어지죠. 이유를 모르는 불임 때문에 전 세계 인류가 불임이 되었고, 무려 18년 동안이나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시대를 물려줄 후손이 없으니 현 인류가 늙어 죽으면 인간은 그야말로 끝장이 나는 거고, 이 때문에 전 세계는 극단적인 공항 상태에 휘말립니다. 폭동과 무차별 테러가 줄을 잇자 영화의 무대가 되는 영국에서는 전쟁 상황을 방불케 하는 강력한 정책들을 밀어붙이고, 이 와중에 불법 이민자들을 눈에 보이는 족족 추방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아예 사람 대접을 해주지도 않지요. 이 와중에 한 흑인 소녀가 기적적으로 임신에 성공하지만, 사태가 마냥 밝아보지만은 않습니다. 소녀가 불법 이민자라서 정부가 알았다간 아기를 빼앗아 영국 시민의 아이로 위장시킬 게 뻔하거든요.

 

영화는 임신한 소녀가 안전하게 아기를 낳기 위해 도피하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일련의 로드 무비처럼 도피 과정에서 만나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은 도움을 주기도 하고, 소녀를 위협하기도 합니다. 18년만의 임산부를 보고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려 온 몸을 바치는 이도 있고, 아기를 이용해 자신들의 사상을 홍보하려는 단체들도 있습니다.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떠돌이 거렁뱅이가, 단지 새 생명이 태어났다는 이유로 목숨까지 걸며 지켜주는 장면은 영화의 모든 걸 대변한다고 봅니다. 소녀가 도망치는 와중에 불법 이민자들 수용소를 지나면서 그 곳의 실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리고 현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도 합니다. 작품의 중반 부분 중 상당 분량을 이 이민자 수용소에 할애하는데, 차별 대우라는 잔인한 현장을 통해 생명을 이야기하고 싶었나 봅니다. 결국, 소녀는 도피하는 중, 이민자 수용소에서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 장면이 참 손에 땀을 쥐게 한다고 할까요. 아이가 나오는 과정을 가감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터라 좀 민망(가족들이 사이좋게 볼 장면은 아닙니다)하기도 하고, 발각되면 끝이라는 생각에 심장이 조마조마하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오히려 생명 탄생의 숭고함 등은 별로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기적이자 희망인 아이가 가는 길에 모든 사람들은 새 생명의 소중함에 잠시 발길을 멈춥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아이 하나를 보호하려고 군인들이 전투를 멈추는 부분. 생명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생명의 탄생에 넋이 나가는 모습이 아이러니했기 때문입니다.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정도로 치열하게 포탄을 주고 받던 정부군과 반정부 단체는 아기의 작은 울음소리 하나에 곧장 싸움을 멈춥니다. 목적이야 어찌 되었건 그 아기에겐 인류의 미래가 걸려있고, 게다가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여겼던 작은 생명을 보았으니 당장 눈 앞의 전투가 뭐 중요할까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는 정부군도, 반정부 단체도, 불법 이민자들도 모두 하나가 되어 소녀가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SF 작품에서 암울한 미래에 인류의 모든 것을 짊어진 단 하나의 희망 운운하는 거야 흔한 일입니다만. 그 대상이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이기에 그 감동이 배가 되더군요. 그게 만일 무슨 치료약이라든가, 장비 설계도라든가 하는 것이었다면 이만큼의 찐한 여운은 없었겠지요. (판타지에 흔히 나오는 마법반지나 마법보물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불임이라는 소재를 참 잘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소재를 풀어나가는 전개 방식도 괜찮았고요.

 

일말의 희망을 비추는 듯하더니 결말이 약간 갑작스럽게 끝나기에 좀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만. 영화 중반부와 후반부에서 이미 할 말을 다 하기 때문에 섭섭한 감은 없었습니다. 되려 갑작스러운 결말 때문에 엔딩 크레딧을 보며 작품을 한 번 더 곱씹어볼 여유가 있다고 할까요. 연출 이야기를 하자면, 알폰소 쿠아론 감독답게 촬영에 힘이 넘칩니다. 전투 장면은 여느 전쟁영화 못지않은 박진감을 자랑하고요. 주연배우인 줄리안 무어와 클라이브 오웬은 언제나 그렇듯 멋진 연기를 펼칩니다. 배경은 멀지 않은 미래인데, SF에서 흔히 보이는 최첨단 기술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차 운전석 유리창에 인터페이스가 나타나는 등 사소한 설정만이 깔려있을 뿐이지요. 불임의 이유도 결국 완전히 밝혀지지 않기에 소재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하드 SF적인 면도 없습니다. 그 소재로 비롯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전체적인 감상이라면 알폰소 쿠아론의 또 다른 수작이 나왔다는 느낌입니다. 불임이라는 색다른 소재로 디스토피아를 보고 싶으신 분에게 추천하며, 뭔가 볼만한 SF가 없나 궁금하신 분께도 권해 드립니다.

 


 

어이없는 운명의 날 둠즈데이

 

영화 <둠즈데이 : 지구 최후의 날>은 (SF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알 수 없는 질병이 퍼져 인류가 고생하자 그 치료약을 찾으러 가는 모험담을 그린 작품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치명적인 질병이 번지기 시작하고, 치료가 불가능해지자 영국 정부는 스코틀랜드를 완전한 격리 구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고, 나올 수도 없는 곳으로 막아버린 거죠. 그렇게 세월이 흘러 격리 구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만, 똑같은 질병이 런던에 만연하기 시작하자 특수부대를 격리 구역으로 파견하기에 이릅니다. 그 속에 생존자가 있다는 흔적을 찾았고, 그렇다면 그들은 분명히 치료약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설사 치료약이 없더라도 그들의 항체를 이용해 약을 만들면 되는 거고요. 그런지라 영화의 주된 내용은 특수부대가 격리 구역으로 들어가 얼마나 생고생을 하고, 어떤 모험을 겪는지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그 액션 모험이 볼만한 것이었냐 하면 흠, 글쎄요. 감독은 폐쇄된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극적으로 변해있는지 그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만. 화면에 나오는 건 그저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의 경험치가 되어주는 뒷골목 양아치들 밖에 없었습니다. 거기다 그 양아치들의 우두머리는 할 줄 아는 거라곤 괴성을 질러대는 것밖에 모르는 바보입니다. 아마 그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면 뭔가 카리스마가 풍길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아무리 봐도 바보 이상으로는 보이질 않습니다. 격리 구역에서는 두 집단이 전쟁을 벌이며 살아가는데, 양아치들의 상대 집단은 마치 중세 영국처럼 꾸미고 살아갑니다. 이왕 바깥 세계랑 단절된 거, 순수한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의미인 게지요. 덕분에 현대 화기로 무장한 특수부대가 장검을 휘두르는 기사와 상대하는 재미있는 연출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오히려 저 양아치들의 비중을 없애고, 이 중세 집단을 파고들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타임머신 없이 시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텐데요.

 

영화는 인간의 추레함이나 세기말적 암울함을 전달합니다만, 그렇게까지 와 닿지는 않습니다. 사실 주제를 전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는 모습도 안 보이고, 그저 액션에만 힘을 쏟은 것 같네요. 액션 장면은 음, 몇몇 장면은 속이 후련합니다만, 전체적으론 평이합니다. 독특함이 안 보이는 게 아쉬워요. 주연 배우인 로나 미트라는 배역을 맡을 때마다 풍만한 몸매로 남성 관객들을 사로잡곤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특수부대 리더라서 그런 관능적인 매력이 약간 덜합니다. 군복이란 군장이라는 게 풍만한 몸매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참, 지구 최후의 날이란 부제는 우리나라에서 붙인 건데, 별로 믿을만한 제목은 못 됩니다. 영화 배경은 철저하게 영국으로 한정되어 있거든요. 저 제목만 보고 영화를 골랐다가 섬나라 하나밖에 안 나오는 걸 알고 속은 듯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바이오 하자드>를 기대했다가 어설픈 <매드 맥스> 패러디를 본 기분이에요.

 

<칠드런 오브 멘>의 중대한 스포일러 하나!!

 

 

 

 

 

 

 

 

 

- 줄리안 무어가 이렇게 빨리 죽는 영화는 처음 봤습니다. 클라이브 오웬과 행복하게 사는 결말은 아니더라도 허무하게 가 버릴 줄은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