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노르산맥 한 켠에 있는 마을은 작고 아담했지만 지나는 사람이 많았다. 산맥 틈으로 이어진 작은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해 오랜 여행에 지친 여행자들이 묵어가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상단이나 일거리를 찾아 떠나는 용병들, 순례길에 나선 성직자들이 꼭 들러 쉬는 곳이었다.
그만큼 소문도 많이 모이고 일거리도 많았다.
상단의 경호나 잡일도 여기까지로 계약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산맥을 넘어온 용병들이나 일꾼들은 평지를 맡은 다른 사람들과 교대하여
다음번 일이 있을때까지 머물기도 했다.
영주들의 영지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영주들의 보호를 받을 수는 없었던 마을은 상단과 용병단의 후원을 받아 암묵적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마을에서는 거들먹거리는 귀족들의 힘이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리하는 영주가 없는 곳 치곤 꽤 잘 관리되고 있었고 치안도 매우 양호한 수준이었다.
"여기인가? 과연 촌구석이군. 꽤 추워."
마을 초입에 말을 타고 들어선 일남 일녀는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의 행렬에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사막에서 자란 도련님께는 아무래도 이 기후는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도 사막에서 자라긴 마찬가지 잖아. 넌 왜 멀쩡한 건데?"
"저희는 임무를 위해 특수한 훈련을 받아 추위나 더위, 배고픔에 개의치 않습니다."
"게으르고 배에 기름만 찬 왕족 놈들을 데려다가 그 훈련을 받게 하면 좋겠군."
"고귀한 분들이 받을만한 훈련이 아닙니다."
여자는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사실 그 훈련을 받다가 죽어나가는 이들이 수없이 많았으니 왕족을 상대로 그런 훈련을 했다가는 교관의 목이 열개라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성문을 들어설 때 경비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그들을 제지했다.
"두 사람, 어디서 오는 길이오?"
"남쪽에서 온 상인으로 상로를 뚫으려는 목적이다."
경비병은 두사람을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경비는 쓸만해 보이는군. 만만치 않겠어."
낮은 성문을 지나며 남자가 감탄했다는 듯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네 도련님."
"저기 저 놈들 허술해 보였지만 엇갈리게 서 있었고 한 놈은 저쪽 벽에 손을 짚은 품이 여차하면 신호를 할 테세야. 습격을 해도 일격에 둘 다 죽이지 못한다면 안쪽에 소식이 전해지겠지. 아마 저 놈이 쥐고 있는 저기에 뭔가 문을 닫는 장치가 있을 것 같군. 여기 입구의 긴 통로도 뭔가 수상한데. 그림자들이 숨어드는 거라면 몰라도 정면 돌파는 무리겠어. 성벽도 꽤 견고해 보이고. 뚫자면 사람 한없이 죽어나가겠군. 공성병기 없이 소규모 군단으론 어림도 없겠어. 깡촌 치고는 제법인데."
"그 뿐이 아닙니다. 그림자로도 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발돋움을 할 곳은 발 디딤을 하지 못하게 해 놨군요. 거기까지 고려해서 쌓은 성입니다. 이 정도라면 여간한 소국의 왕궁보다도 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 거기까지는 못 봤군. 그럼 역시 여기에 있는 게 맞는 걸까."
"그럴 것 같습니다. 도련님."
두 사람은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곳곳에 마장이 있어 말들과 마차가 바삐 오가고 있었다. 마른 먼지가 풀풀 날렸다. 오래지 않아 대충 정한 숙소에서 짐을 푼 그들은 주점으로 향했다. 한 곳에 들러 잠시 술을 마시던 그들은 또 다른 장소로 옮겨서 술을 마셨다. 그러기를 수 차례, 그들이 한 주점에서 술을 주문했을 때 누군가가 그들의 테이블로 향했다.
"형씨들은 어디서 오는 길이오?"
술에 좀 취한 듯 보이는 건달같은 사내가 삐딱한 자세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예. 도련님."
말을 건 건달은 두 사람을 보며 기이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새 표정을 바꾸었다.
"이 새끼들이 말이 말 같지 않나!"
"무례는 용서치 않겠다."
건달이 막 화를 내면서 테이블을 내리치려는 순간 여자가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남자의 머릿채를 움켜쥐고는 목에 비수를 겨눈 채로 속삭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리 없이 움직여 다른 사람들이 미처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날랜 몸놀림이었다. 건달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시끄럽던 주점 안이 차츰 조용해지더니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한참 빠져 나갔을 즈음에 남자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야. 고만 하고 니들 대빵 데려와라."
"무.. 무슨 소리야. 이거 놔라!"
"다 알고 온 거니까 적당히 하고. 아니면 피를 봐야 입을 여는 건가? 나는 말로 하는 게 좋은데."
남자는 술을 홀짝 거리며 이야기했다.
"니들 뭐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건달은 당황한 듯 여자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머리채를 틀어쥔 여자의 손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목을 따 버려야 다음 놈이 나오려나 보다. 여기는 사람 목숨값이 싼 모양이군."
남자가 막 손짓을 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단검이 날아왔다. 건달의 머리를 틀어쥐고 있던 여자가 들고 있던 비수로 날아오던 단검을 쳐내고 다시 건달의 목을 겨누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은 어디론가 튕겨 날아갔다.
"인질을 잡고 있는데 단검을 던지다니. 이 동네는 왜 이 모양이야. 인질이 찔리면 어떻게 하려고."
"인질을 잘 잡아야지. 그런 놈을 잡으면 쓰나."
남자가 심드렁하게 하는 말을 한 중년이 받았다. 그는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얼굴로 씩 웃었다.
"얼굴 보기 힘들군. 여기 책임자?"
"일단 그 친구는 풀어주고 이야기 하도록 하자."
"신, 그렇게 해라"
"예 도련님."
여자는 잡고 있던 건달을 옆으로 던져버리듯 밀쳐 버리고는 남자의 뒤에 와서 섰다. 그 모습을 본 중년이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를 빼더니 자연스럽게 앉았다. 주점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들 하나 하나가 창문이나 문등을 막고 서 있어 아무도 빠져나가거나 들어오지 못할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막에서 이 추운 산맥까지는 어인 행차이신지?"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다는 거군?"
"그래. 다른 도시에서 워낙 소문이 쟁쟁해서 말이오. 왕자님. 도시마다 찾아다니며 용병단이란 용병단은 다 찾아가 무력으로 뭉개버리고는 다른 도시로 떠났다지?"
"그거 말고 좋은 소문은 안 났던가? 마을 아가씨들이 상사병에 걸렸다던가?"
"들어본 적 없어. 그런데 정말로 무슨 일로 이런 산골에?"
"찾을 사람이 있어서 왔어."
왕자는 손가락을 탁자 위에서 빙글 빙글 돌리며 이야기했다.
"이런 깡촌에서 찾을 사람이라니. 여기는 건달과 깡패들 정도 밖에 없어서 왕자님 같은 분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는데."
왕자는 주머니에서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인형을 꺼내어 내밀었다.
"이거 알아 보겠어?"
"흠. 이건 괴물인가? 상상속의 동물 같은데."
흉악한 얼굴 쭉 찢어진 귀, 날카로운 발톱은 인간과도 세상의 어느 맹수와도 닮아 있지 않았다. 조각가가 악의에 가득 차서 만들어낸 악귀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무를 거칠게 깎아 만든 인형은 묘한 불길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싶은데 여기 막고 서 있는 친구들이 다 들어도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어."
"비밀이 많으신가 보군. 상관 없어. 여긴 다 형제들이니까."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 보지. 그러니까. 한 여자가 있었어. 이 여자는 부잣집의 잘나가는 인재였는데,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하게 된 거지. 거기까지는 좋았어. 이 여자는 집안의 보물을 들고 가출해 버린 거야. 남자를 찾아갔지. 거기서 과거를 버리고 살기로 한 거야. 이대로 모두가 행복하면 좋았을텐데. 그 윗사람은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자기가 그 여자를 좋아했더란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그냥 잊으면 좀 좋아? 근데 그게 안 되었나 봐. 게다가 이 사람은 꽤 꼬이고 꼬인 인간이라 결국 자객을 보내서 여자를 끔찍하게 죽여 버리고 그 일족은 씨를 말려 버린 거야.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지.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 여자의 아들은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어. 그리고 그가 얻을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얻어내서 자신의 외가쪽으로 쳐들어갔지. 싹 다 박살을 내 버렸어. 우와. 끝내주는 복수극이지? 그런데 말이야. 그 와중에 잡아 죽이게 된 윗사람이 말이지. 좀 특별한 혈족이었던 거야. 나중에 복수를 마칠 즈음 그걸 알게 된 아들은 고민을 하지. 이걸 살리자니 복수가 안되고, 죽이자니 세상이 위태롭고. 결국 죽여. 뒷일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같은 속편한 생각을 했는지도 몰라. 단칼에 죽여버린 거야. 그러고 나서 백년쯤 지나서 싹 다 죽었지. 외갓집 식구들도 . 그를 도와준 친구와 동료들도. 그들이 세운 가업도 무너지고. 모든 것은 재로 돌아갔단 말야. 근데 그 막되먹은 윗사람이 하고 있던 일이 있었어. 이를테면 제사장 같은 일인데, 해야 할 일을 할 사람이 없게 되니까 세상이 뭔가 좀 어그러지기 시작했단 말야. 평화롭게 살던 우리 사막왕국에도 불똥이 튀기 시작하고. 이래저래 귀찮은 일들이 생겼어.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상황 파악을 하고 보니 이미 너무 늦었더란 말야. 그걸 해결하려니까 뭔가 필요한데 그게 이제 세상에 없어. 어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암만 찾아도 안 보인단 말이지. 그래서 그걸 알만한 사람들을 찾고 있는 중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군."
"좋아. 이렇게 말하지. 마신을 처리할 자를 찾고 있다."
"마신이라. 지금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 마신 말인가?"
"짐작하고 있겠지만 너희들 세상에서 구전되는 악마 말이다. 파마의 혈족을 찾고 있다. 너희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 했는데도 시치미를 뗀다면 나도 그냥 어수룩하게 당해줄 생각은 없어."
왕자가 말을 마치자 뒤에 서 있던 여인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았다. 사막의 왕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구부러진 칼이 아닌 막대기처럼 길고 얇은 칼날이었다.
"우리가 그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우리는 그냥 용병단에서 조직한 치안조직이야."
"아까 그 마신상을 봤을때 너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 마신상은 마신의 피를 묻힌 거야. 마신과 마주하고 그 피를 접해본 자가 아니면 공포에 사로잡혀 심령을 빼앗길 정도의 물건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지만 너는 마신을 마주한 적이 있단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이 이상 시치미를 떼겠다면 피로 한번 목욕 하고 나서 다시 물어보도록 하지."
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칼을 뽑아 들었다. 그의 칼은 긴 반달모양의 것이었다. 중년남은 턱수염을 벅벅 긁으며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어디 있는지 알려만 주면 되는 건가?"
"단장님!" 누군가의 당황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렇다고 여기 사람들을 다 죽일 수는 없어. 저 두 사람, 정말 강해. 열 셀 시간이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목이 떨어져 버릴 걸. 다른 도시에서 용병단을 뭉개 버릴땐 한 사람 밖에 나서지 않았어. 그것도 맨 주먹이었단 말야."
"잘 알고 있네."
왕자는 씩 웃으며 칼을 집어 넣었다.
"칼까지 뽑았다는 건 농담으로 할 이야기는 아닐 것 같고. 알려주는 정도야 괜찮겠지. 그 다음은 그 분들이 알아서 하실 거야."
"뭐야. 여기가 끝이 아니었어?"
"왕자, 왕자가 찾는 건 산 꼭데기에 있어. 거기에 성지가 있지. 군대를 데려가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혹시 그럴 생각이 있다면 포기하라고 말해주고 싶어. 거긴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어. 제기랄. 설마 산이라는 게 저기 저 산은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설산의 가장 높은 봉오리야."
"제발 농담이라고 해줘. 난 추운 곳은 딱 질색이라구."
하지만 누구의 얼굴에서도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왕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