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그건 지난 수요일, 그러니까 매우 화창한 날 오후였습니다. 저는 평소처럼 길을 가고 있었죠. 은행에 볼일이 있어 가는 길이었거든요. 아내가 돈을 좀 찾아다 달라고 해서 돈을 찾으러 갔습니다. 네. 뭐 별 일 아니었어요. 생활비가 떨어졌다고 하는 거였죠. 그래서 은행에 가서.. 네. 줄이 좀 길더군요. 한참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경비원이 82XX번 차주를 찾는 겁니다. 왜 찾을까 하고 있었는데 한참이 지나도 계속 찾고 있더군요. 저는 차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막 돈을 찾은 뒤 밖으로 나오는데 뭔가 몹시 시끄럽더군요. 나가 보니 은행 앞 주차장이 꽉 차있었고 차들이 나가야 하는 그 위치에는 한 비싸보이는 외제차가 서 있었어요. 네. 저는 차를 잘 모릅니다만 아주 비싼 차 같았어요. 그리고 그 차 앞에 선 남자는 양복을 입은 말쑥한 중년의 노신사였지요. 차주인 듯 했어요. 그는 막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그 외제차가 82XX 번이더군요.
그 노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차를 안 뺄테니까 니들이 마음대로 해 봐라. 경찰을 부르던 뭐를 하든, 대신 내 차에 흠집 하나라도 나는 날엔 너희 집 팔아도 답이 안 나올 거다.' 그 앞에 서 있던 키 큰 남자는 계속해서 차를 빼달라고 말하고 있었고 그 옆의 파란 점퍼를 입은 남자는 당장이라도 한대 칠 듯한 기세였어요. 이 노신사는 은행의 주요한 고객이었는지 은행 직원들도 쩔쩔맬 뿐 어떤 조치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있었죠. 그저 사람들 사이를 가로 막고 진정하십시오 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어요.
아마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차들이 나가지 못하게 은행 주차장 앞에 차를 대 놓고는 아무리 찾아도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이제 나타나서는 뻔뻔스럽게 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욕설을 하자 그럼 나는 이 차 안 빼겠다고 배짱을 부린 거죠. 사람들은 화가 나서 욕설을 하기도 하고 주먹을 휘두르거나 전화로 경찰에 신고도 하곤 했습니다.
꽤 돈도 많고 사회적으로 영향력도 있어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아주 유치하게 행동했던 겁니다. 뭐 그거야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데 그 뒤에 서 있는 한 음침한 남자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정말 그래도 되겠소? 당신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라도?'
그 남자의 눈은 죽은 것 처럼 탁 풀려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뭔가 알수 없는 광기가 서려 있는 것 같았어요.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했죠.
하지만 노신사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대신 어딘가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죠. 조금 무서웠을지도 몰라요. 제가 다 무섭더라니까요.
생각해 봐도 차를 30분이나 막아두었다면 큰 난리가 났을텐데 저렇게 행동하는 건 참 예의가 없는 짓이지요. 하지만 이 고집장이 신사는 전혀 미안하다는 말이나 양보를 할 생각이 없었어요.
만약 그 노신사의 말처럼 그가 큰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경찰이 와도 함부로 하지는 못하겠죠. 비싼 변호사를 고용하고 있다고 하면 여간해선 처벌받는 일도 없을테구요. 그의 재력이라면 거기 있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고 어쩌면 사람들을 죽이고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건 그냥 그 노신사가 자신이 가진 권력을 휘두르는 횡포일 뿐이었습니다. 차후에 경찰이 와서 노신사를 연행해 가거나 차를 견인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잠시 뒤엔 검은밴이 그 노변에 와서 서더니 양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몇 차 주위로 몰려들어 다가오는 사람들을 노려보았어요. 얼핏 보면 조폭 같기도 하고 다시 보면 보디가드 같기도 했어요. 안쪽 주머니엔 총인지 칼인지 뭔가 걸 수 있는 걸 달고 있었죠.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어요. 아까처럼 함부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었죠. 그 뒤에 경찰이 왔어요. 순식간에 경찰차가 여러대 왔죠. 아까는 그렇게 불러도 오지 않더니 말이죠. 그 경찰은 노신사의 차 주위에 서있던 남자들과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위압적으로 다가갔어요. 그리고는 그들을 차례 차례 연행해 갔죠. 주위에서 구경꾼들이 경찰을 막 욕했습니다. 잘못된 건 이 사람들이 아니라 저 노신사라고 이야기 해도 굳은 표정으로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빨리 해산하라고 윽박지르기 시작했어요. 뭐 그 경찰들도 좋아서 한 일은 아닐 거에요. 경찰들도 정의감만으로 일하는 건 아닐테니까요.
저는 더 이상 그 모습을 보고 그 즈음에서 다시 길을 가기 시작했죠. 조만간 노신사가 화가 풀린다면 차를 빼 줄 것이고 그때까지 사람들은 권력과 폭력 그리고 돈에 의해 나눠진 신분의 격차 속에서 무력한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을 가지게 되겠죠. 씁쓸했습니다. 권력과 금력 앞에 이 나라의 정의 같은 건 순간 짓밟혀 버린다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질서나 준법 같은 건 그다지 잘나지 않은 우리끼리만의 룰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 터벅 터벅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두 블럭쯤 걸어나왔을 때였습니다. 어디선가 폭음이 들렸어요. 그 폭음은 여러번 들렸죠. 저는 뭔가 화산이나 지진, 가스폭발 같은 것을 의심했어요.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다 밖으로 뛰쳐나오더군요. 저는 뭔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은행 주차장에서 차량 폭탄 테러가 있었다는 사실은 뉴스를 보고 알았어요. 시내에서 동시에 벌어진 차량 폭탄 테러중 하나가 그것이었다는 것. 누가 그랬을 것 같냐고요? 글쎄요. 노신사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 사람은 그런 테러를 하지 않고도 자기가 원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고요. 그보다는 그 음침한 얼굴을 한 사내 아니었을까 싶어요. 제 생각은 이래요. 그들은 아마 특정한 시각에 동시다발적으로 정부의 건물을 부술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여러건의 폭발처럼 말이죠. 그런데 이 한대의 밴은 은행에 볼 일이 있어 잠깐 들렀다가 노신사가 길을 막은 바람에 시간내에 목적지까지 미처 가지 못한 것 같아요.
폭발이 일어난 뒤엔 교통이 마비되고 통제될 테니까 이동은 불가능 했겠죠. 아마 어떤 차량 한대가 검문이라도 받아 먼저 폭발했을지도 모르고요. 의도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테러범들이 은행 주차장에서 차를 폭발시켜서 얻는 이득이 뭐가 있겠습니까.
애꿏은 은행 고객들만 희생당하는 거겠죠.
아. 뭐. 그때 테러범이 그 재수없는 노신사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싶을 만큼 화가 많이 났을지는 모르는 일이죠. 솔직히 그 노신사 무진장 재수없었거든요.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