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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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예언의 동행인 (1)[[/B]]
히가라 행성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외딴 장소.
행상인들의 무역항로는 아니고, 자원이 될만한 운석도 많지 않아서 숨죽이고 있으면 보이지 않을 듯한 적막하고 쓸쓸한 공간이다.
지금 그 곳에 알하크 함장의 건조함과 소반의 프리깃이 그들의 본대가 귀환하기를 기다리며 부서진 갑판을 수리하고 있었다.
마치 납작한 널빤지가 누운 것 같이 생긴 건조함은 그 측면을 넓게 개방한 선착장에서 캐피탈급의 배를 생산하는 대신, 폭격으로 구멍 뚫린 부분을 메우기 위해 용접의 불빛이 반짝인다.
건조함의 함장 알하크.섬타우는 함교에서 그의 배를 다시 되살리고자 승무원들을 독려하며 무던히 애쓰는 모습이다.
억센 인상을 더욱 찌푸리던 알하크는 목청이 울리는 굵직한 음성을 내뱉으며 기술자들에게 생산모듈과 연구시설을 가동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그는 기술자들의 노력으로도 복구가 불가능하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건조함이 침몰하지 않고 이만큼 버티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생각하는 게으른 승무원들에게 무언가 할 일을 제공하기 위한 일이었고, 고향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초조함을 잊게 해야할 그의 임무이기에 닦달을 했다.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디멜.팍투는 그의 옆에 서서 내부 전광판에 비친 소반의 프리깃을 바라보고 있었다.
큰 키에 단정하게 잘 빗어 넘긴 머리, 신사다운 품위를 보이는 디멜.팍투는 (알하크와 다른 깔끔한 이미지랄까.) 건조함에서 생산 될 배틀크루저를 지휘할 함장이지만, 지금은 보시다시피 이 곳에서 함께 기름 냄새를 맡으며 바깥 구경이나 해야할 손님이다.
건조함의 상갑판에 내려앉아 수리를 받는 소반의 프리깃을 디멜은 쳐다보면서 구멍 뚫린 배 한 척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몹시 서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디멜이 하는 말에 그가 바깥 외출에 굶주려 있던 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이보게, 알하크. 자네는 소반 선장의 이름을 알고 있나?"
지금껏 배 한 척 뽑지 못하는 건조함을 탓하려던 것이 아니고, 소반의 이름이 궁금해서 모니터가 뚫어져라 보고 있던 거였나…. 알하크 함장은 디멜의 느긋한 반응에 조금 당황했으나 그 보다 그의 느닷없는 물음에 잠시 머뭇거려야 했다.
키쓰 소반의 일원에게 이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소반 선장은 이름 없이 소반이라고만 불렸다.
전체 키씨드에 큰 도움을 준 영광스런 소반의 일원은 소반-사의 명예로운 전통대로 그들이 원하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즉, 본인이 원한다면 이름을 바꾸고 없앨 수도 있는 자유 의지를 주었는데 소반 선장은 자기 이름을 없애는 것을 택했다. 그래도 편의상 그를 부르는 간단한 이름 정도는 있었으니 그것은….
"크림슨.소반이다."
붉은 진홍색을 뜻하는 크림슨. 사실 알하크 함장도 모르고, 관심도 없던 소반의 이름이지만, 소반-사의 정보장교에게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다.
디멜에게 대답해준 알하크는 왜 소반의 이름을 물었는지 궁금했으나 디멜의 다음 말을 듣고 묻는 걸 잊기로 했다.
"베이거 침공 이전부터 맹활약을 펼쳤던 소반 선장. 그런 그가 스스로 이름을 없앴던 것은 유명해진 자신의 명성을 그의 키쓰에게 되돌리기 위한 행동이었겠지. 그에게 값진 이름은 그가 지키려던 여럿 동료들과 키쓰 소반이란 것을 그도 잊지 않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이번에 그가 타이탄 캐리어를 추격하던 모습은 동료를 위한 용기가 아닌 무모한 행동이었어. 전투기 한 대 만들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 소반의 프리깃까지 수리를 받고 있으니, 지금 우리가 적의 습격을 받는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거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소반의 프리깃이 수리를 받고 있지 않더라도 프리깃 한 척이 혹시나 모를 적의 습격을 감당하기에 벅찬 일이다.
다소 냉담한 디멜.팍투의 말을 들으면서 알하크 함장은, 소반 프리깃도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사주크가 빨리 자신들을 찾아오길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오라는 사주크는 안 오고 낯익은 프리깃에 선장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귀신도 자기 얘길 하면 찾아온다던가…. 방금 까지 거론하던 소반 선장이 갑자기 모습을 보이자 알하크와 디멜은 조금 놀란 기색이다.
소반 선장은 그들에게 경례를 마친 후에 자기 프리깃이 비친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물었다.
"왜 그렇게 흠칫 놀라십니까? 혹시, 구멍 뚫린 제 함선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거침없는 표현을 자랑하는 소반 선장의 말솜씨는 여전하다. 알하크는 죽음을 무릅쓰고 타이탄 캐리어를 쫓아간 그를 질책하고 싶진 않지만, 자기 멋대로 함교에 들어온 행동에 쓴 소릴 해주기로 했다.
"소반 선장, 그건 내가 놀랄 일은 아니다. 구멍 뚫린 배라도 명령이 떨어지면 끌고 나가야 하는게 자네 임무니까. 내가 놀란 건 저런 구멍을 뚫어놓고 살아 돌아온 재주에 놀라울 뿐이지. 그리고 예고 없이 나타나 나를 곤란하게 만든 선장의 특별한 재주에 더 놀라울 따름이다."
알하크의 굵은 목소리에 주눅들을 소반 선장이 아니지만, 자기 배를 수리해주는 건조함의 함장에게 밉보여 좋을 건 없기에 소반도 자신이 깨닫지 못한 무례한 행동을 기억하려 애썼다.
"제가 화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단순히 한가지 알려야할 것이 있어서 급한 마음에 찾아왔는데 예의 없이 나타나 놀라셨으면 용서해주십시오."
계급이 높은 상급자 앞에서도 눈치 없이 용맹스러운 전장의 용사가 예상외로 얌전하게 나오자, 알하크 함장은 괜스레 무안해져 헛기침을 해댄다.
"음음…. 선장이 무전 연락으로 말해도 될 것을 여기까지 직접 찾아와 알리고 싶었던 내용이란 게 무엇인가?"
"네, 아무래도 우리가 고향을 잘못 찾아왔던지 아니면 세상이 뒤바뀐 것 같습니다."
이건 또 무슨 뜻인가? 알하크와 디멜은 소반의 말에 반응하지도 않고,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다렸다.
"타이탄과 교전 중에 아주 짧았지만, 그들 전투기의 교신 내용을 잠깐 동안 잡았습니다. 우리와 맞붙어 싸우던 전투기 팀장 중에 나르키메 소령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자가 누군지 모릅니다. 내 부하들 중에 유명 파일럿에 관심이 많은 녀석이 있어서 그에게 들어 알게 되었죠. 어쨌든 나르키메 소령은 타이탄의 인터셉터 조종사 중에서 전설적인 영웅이더군요. 요즘에 보기 힘든 트리코 204-F 전투기를 모는 녀석인데 쿠샨의 전투기 40여대를 격추시킨 악명 높았던 놈입니다."
까닭 없이 타이탄의 파이럿 이름을 거론하는 소반의 말이 이상했던지 디멜.팍투는 그의 말을 잘라 물었다.
"소반 선장, 그래서 말의 요점이 무엇인가?"
"혼자서 베이거 전투기 10여기와 싸워 이긴 유명한 인물인데 이야기가 길었다면 대강 간추려서 말하겠습니다. 그 나르키메란 인물은 현역에서 물러나 타이탄 사관학교의 전투 교관으로 재직하였고, 그 후에 조용한 시골에서 남은 여생을 마쳤습니다."
솔직히 알하크 함장은 타이탄 파일럿의 프로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에 귀신이라도 만난 듯이 눈을 크게 뜬다.
소반 선장이 허황된 정보를 말할 사람은 아니었기에 지금 그의 이야기를 듣는 알하크의 머리만 복잡해질 따름이다.
알하크는 사주크의 함장이 타이탄인에게 우리를 프로제니터라고 소개할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이상한 나라를 찾는 길 잃은 바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승무원들 사이에 퍼지는 과거에 왔다는 괴상한 소문은 그에게 별로 와 닿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 소반 선장이 한 말은 그런 소문을 뒷받침해주는 좋은 증거가 될 수 있었기에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알하크의 머리 속을 사정없이 흔들어놨다.
그러나 옆에 서 있던 디멜.팍투는 침착하게 소반 선장의 말에 반박한다.
"나르키메란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은 어딘가 또 있을텐데 우리가 오래 전에 죽었던 사람을 보았다고 단정 짓기에 너무 이르지 않나? 그리고 소반, 아직 증거도 없이 추측만 가지고 우리가 예전 전투기를 보유한 구시대 존재와 싸웠다고 생각하는 건 장교로서 성급한 발상이다."
과거에 죽은 사람과 같은 이름에 같은 전투기 기종을 타고 같은 계급의 모든 조건과 비슷한 사람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생길지 알 수 없으나, 그 전설적인 영웅이 몇 시간 전에 전투로 만난 그 사람일거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디멜은 생각했다.
게다가 오래된 기종의 전투기만 보고 지금 시대가 잘못 되었다고 판단할 수 없었다. 타이탄은 아직도 옛 제국 시절의 전투기를 개량해서 계속 쓰고 있으니 말이다.
디멜의 말을 들은 소반 선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바지 뒷 주머니에서 서류 한 장을 그에게 꺼내 보인다. 그것은 탄피 종류를 확인하는 보고서였다.
"C-5201d 속사포 탄환. 타이탄 캐리어와 붙어 싸우면서 프리깃 상갑판에 불발로 박혀있던 탄환이었습니다. 주로 타이탄 캐피탈급의 고정형 속사포 탄환으로 쓰였는데 성능에 비해 생산단가가 높은 편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80년 전에 생산 중단되어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골동품입니다. 뭐… 가끔 암거래 시장에서 무기 수집가들에게 비싼 값에 팔린다고 하니 꽤나 희귀한 탄환인가 봅니다. 이거 하나 값이 전투기 두 대와 맞먹는 값이라던데, 이렇게 비싼 골동품을 쏴대던 캐리어를 저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타이탄이 현대식 무기를 버리고 복고풍의 유행을 따라 돌아가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령님."
이제는 생산되지 않는 탄환과 구형 트리코 전투기, 그리고 예전에 사망한 파일럿 교관과 고향 행성계를 점령한 타이탄 함대…. 디멜.팍투는 이 모든 상황들을 쉽게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그가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가 아닌 다른 곳에 도착했다고 이해하면 납득이 갈 이야기들이다.
디멜은 소반이 건네 준 골동품 탄환에 대한 서류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자, 소반 선장이 다시 말을 잇는다.
"저도 처음에는 지금 상황들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보부 내의 들리는 소문대로 오늘이 백 년 전의 과거라면 그 문제가 심각합니다. 솔직히 저도 과거로 돌아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고향 행성계와 닮은 외계 행성일 수도 있고, 우리가 만난 타이탄인들이 옛 제국주의에 열광하는 정신나간 광대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소반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하더니 자신이 고민하던 문제를 말했다.
"만약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게 맞다면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훗날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편안히 생을 마감할 나르키메 소령을 우리가 그를 40년 일찍 죽인 셈이 되었으니까요."
그 말은 즉, 미래가 뒤바뀔 가능성을 예고하는 의미였다.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고 누군가의 인생을 뒤바꾼 사건들은 많았지만, 역사적으로 살아있어야 할 사람을 죽인 사건은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앞으로 생길지 모를 타이탄 함대와의 전투를 항상 피해 다닐 수 없는 일이기에 알하크와 디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알하크 함장은 앞으로 생길 일을 고민하기 보다, 지금 자신이 해야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 전경이 보이는 모니터 위를 두드리며 말했다.
"좋다, 소반 선장의 말이 맞다고 하자. 그러나 이 모든 상황들을 무작정 단정 지어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소반 자네가 누구보다 더 잘 알 거다. 전설적인 타이탄 파일럿이나, 박물관에 들어가야 할 탄환이나 이런 사실만 갖고 세상이 뒤집혔다고 판단해도 솔직히 우리가 결정할 권한은 아니다. 사주크가 돌아온 후에 히가라의 동향을 듣고 생각해도 늦지 않아. 하지만 경계를 늦춰서는 안되겠지. 그리고 우리에게 도전해서 죽은 녀석에 대해 생각하지 말게. 그 죽은 파일럿이 지금 나타나서 덤비더라도 함대의 안전을 위해 또 다시 격추시킬 수밖에 없는 결정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가능하면 또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피해야겠지. 음…, 다행히 소반 프리깃의 수리가 끝나 가는 모양이군."
소반 선장은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보았던 타이탄 함선이 현 시대의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은 잠시 접기로 했다. 알하크 함장의 말대로 지금 자신들의 안전을 먼저 돌봐야 하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그리고 사주크가 돌아올 때까지 또 다른 타이탄 함대와 마주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고, 행성에서 멀리 떨어진 이렇게 조용한 곳에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소반 선장이 해야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가 해야할 일은 근거 없이 퍼지는 뜬소문을 막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저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최선에 행동일거다.
그러나 디멜.팍투는 아직 미련이 남았던지 알하크와 소반에게 조심스레 의견을 물었다.
겉으로 태연한 척하던 디멜에게도 그의 손에 들려있는 구형 탄환에 관한 보고서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런 골동품 탄환을 쓰는 타이탄이 히가라 함선도 못 알아보는 세상이면 뭔가 잘못 돌아가는게 틀림없다.
"내가 이런 얘길 한다고 오해하진 말게. 죽은 유령을 봐도 과거에 왔다고 믿을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나 항상 예외라는 것은 존재하는 법이니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게. 만약에 이 모든 정황들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역사를 다시 공부해야 할거야. 왜냐하면 지난 역사에 쿠샨 함대가 히가라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의 후손들이 먼저 도착한 역사는 없었거든. 타이탄 함대가 히가라 행성계에서 우리 조상들 외에 다른 함대와 전투를 했던 기록을 난 본적이 없어. 우리가 타이탄과 싸우고 사주크가 히가라로 향한 것만으로 과거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거야.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지금 바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디멜의 말대로 이미 역사가 뒤바뀌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또는 그 반대로 뒤집힌 세상에 와 있는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지르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알하크 함장은 디멜에게 물었다.
"디멜, 그래서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사주크 뒤를 쫓아가서 히가라에 가지 못하게 막자는 건가?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어."
"아니, 알하크 함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된 바에 기회가 오면 확실히 세상을 바꾸자는 거였어."
디멜의 뜻밖의 말에 알하크는 당황한다.
몸 숙이고 숨어 있어야할 판국에 오히려 뛰쳐나가자는 말로 들렸다. 그의 생각을 말릴 틈도 없이 디멜은 덧붙여 말하였다.
"허락만 된다면 히가라를 점령한 타이탄인을 내쫓고 히가라의 자존심을 되찾을 각오로 싸우자는 거야. 그렇다고 정말 히가라에 쳐들어가서 역사를 바꾸자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말게. 우리가 겪는 일을 피할 수가 없으면 담담히 받아들이자는 뜻이었어. 그러나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히가라로 돌아가 타이탄을 몰아내는 역사적인 쾌거를 이루고 싶은 심정이다."
생각이라니 다행이지만, 이 사람을 그냥 놔두면 큰일내겠다 싶어서 알하크는 그의 말에 끼여든다.
"잠깐, 그건 너무 위험한 생각이야. 역사는 책임이 따른다고 하잖아. 작은 사건이라도 소홀히 생각할 수 없어. 그리고 지금 우리 꼴을 보고 말이나 하게. 전투기 한 대 생산 못하는 건조함을 끌고 가서 무슨 방법으로 히가라의 자존심을 되찾을 건가? 만일에 사주크가 제공권을 장악하더라도 지상을 점령할 군인이 턱없이 부족하고, 점령하더라도 그 다음은 어떻게 지킬 건데…. 농담이겠지?"
디멜은 침착하게 반박하는 알하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바로 보았군. 현실성이 없는 내 이야기를 잘 참아줘서 고맙네. 알하크, 자네 말대로 현재 건조함에 상주한 병력으로는 힘들겠지. 하지만 우리가 히가라에서 전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고향 행성을 되찾아야 할거야. 그리고 우리가 과거에 떨어진 게 아니라 타이탄이 옛 제국을 부활시킨 것이라면 더 이상 현실성 없는 이야기만은 아닐 테지."
세상이 어떻게 뒤죽박죽 돌아가던 오늘이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준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면 히가라를 다시 되찾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그러나 디멜은 미래를 바꿀 정도로 과거를 엉망으로 만들 용기는 처음부터 없었다. 다만, 자신의 작은 실수로 미래가 뒤틀릴지 모를 생각에 고민하기 보다 평소 소신대로 움츠리지 말고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말한 것이다.
미래에 영향이 생길게 걱정되어 도망 다니고 싶지 않았다. 오늘 후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알하크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분간 못할 말을 내뱉은 디멜에게 긴 한숨을 쉬며 말한다.
"용기는 가상하군. 그러나 듣고 보니 우리가 과거에 온 게 더 나을 것 같아. 이게 현실이라면 상당히 심각한 사건이니까. 평화와 공존의 시대는 깨지고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겠지. 지금 우리에게 힘이 되어줄 지원 병력이나 믿을만한 동맹국도 없으니 무척 힘든 싸움이 될 거다."
한동안 두 사람의 대화만 듣고 있던 소반 선장은 알하크의 말을 듣고 대답을 하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낙심하기에는 이릅니다. 타이탄을 경계하는 이들은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타이탄에 반기를 든 레지스탕스 조직이라면 우리에게 힘을 보태줄지 모릅니다."
소반 선장의 말대로 오래 전부터 타이탄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 행성들은 은하계에 많았다.
하지만 과거에 리스티유 4세 황제의 폭압에 대항한 자유 연합이 해방 이후에도 그들 모두가 자유를 되찾은 건 아니다. 베이거 공화국 체제에 편입된 조직과 타이탄의 제국 연방에 다시 흡수된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에 대항하던 뜻 있는 해방 정부들 중에는 예전에 순수했던 이상을 잃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하수인으로 전략한 경우가 있기에 타이탄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라고 해서 무조건 믿고 신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현실 상으로 그다지 좋은 형편이 못되는 것을 알면서 자신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는 소반 선장의 말을 고깝게 들으며 알하크와 디멜은 묵묵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유일하게 믿는 사주크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함교의 창 밖으로 보이는 먼지 구름만 바라볼 따름이다.
그렇게 유쾌하지 못한 잡담을 하면서 서로의 신경을 긁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그들의 대화를 끝내고 건조함의 잡일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푸른 센서 모니터 창에 하이퍼 스페이스의 이동 반응을 알리는 감지기가 깜빡였다.
"장거리 하이퍼 스페이스 반응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건조함의 참모들은 그들의 함장에게 하이퍼 스페이스 센서의 상황을 알렸다. 보고를 전해 받은 알하크 함장은 그것이 자신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함선일거라 생각하고 엷은 미소를 띄우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드디어 사주크가 오는군….'
이런 외딴 지역의 약속된 장소에 장거리 초공간 도약으로 찾아올 함선은 사주크 외에는 없을거라 알하크는 확신했다. 곧 있으면 함대를 공격한 타이탄 캐리어의 정체와 히가라의 소식을 전해듣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지 알게 될 것이다.
건조함의 승무원들은 그들 전방에 일렁이는 노란색 물결의 파장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함선의 윤곽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은은한 주황색이 감도는 매끄러운 표면에 U자 형태의 모양, 그리고 오래 전 기억에 남아있던 친근한 무역선….
아무리 봐도 그것은 사주크를 닮지 않은 다른 함선이었다.
자기 예상과 다른 함선이 나타나자, 알하크는 웃던 미소를 잊은 채 얼굴 표정이 바로 굳어버린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반 선장은 옆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것 같군요."
그렇게… 벤투시 무역선은 찬란한 조명 불빛을 뽐내며 건조함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디멜.팍투 또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벤투시의 모습을 바라보며 무척 놀라워한다.
"분명 벤투시는 죽었는데…. 저들의 무역선은 세상에 단 한 대 뿐이었어."
대 황무지에서 키퍼와 함께 최후를 맞이한 벤투시의 희생은 영원히 잊지 못할 사건이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키퍼의 추격을 따돌리지 못하고, 사주크를 부활시키기 위한 세 가지 코어를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벤투시는 한때 은하계에서 가장 비싼 값으로 물건을 파는 악덕 상인으로 유명했지만, 히가라인에게 만큼은 친절하던 이들이다. 그러나 지금 무턱대고 벤투시의 친절함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오늘날 역사에서 사라진 과거의 존재를 보고 있는 상황이라면 벤투시와의 접촉은 가능한 피해야할 일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무역선의 등장으로 다들 놀라고 있을 때, 벤투시 외에 다른 누군가가 그들과 함께 동행해 온 사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 외계 행성의 손님들이 건조함에게 보낸 메세지를 받고서야 알게 된다.
벤투시 무역선에서 소형 우주선 한 대가 나와 건조함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 우주선은 키네딕 포 하나를 무장한 전투기였으나 기체를 좌우로 흔들며 전혀 싸울 뜻이 없음을 내비친다. 비교적 외관이 깔끔한 그 전투기는 건조함 주변을 한번 선회 비행을 하더니 이윽고 말을 걸어왔다.
"그대들은 아바시드의 수호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입니까?"
알하크는 그 메시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알지도 못할 누군가에게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란 건 확실하다. 그리고 그들의 질문에 괜한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벤투시는 전투기를 보유하지 않을텐데 지금 튀어나온 물체에 대한 의문 또한 생겼다.
"음…. 아닙니다. 우리는 벤투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 함선으로 보낸 전투기는 지금 당장 돌려보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쪽도 전투함으로 대응하겠습니다."
알하크는 벤투시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모르지만 그들을 빨리 쫓아내기 위해 없는 허풍을 좀 쳤다. 변변한 무기 하나 없는 벤투시가 건조함을 공격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지금 벤투시가 무장을 한 전투기를 내보낸 것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하크의 우려와 달리, 벤투시가 보유한 전투기는 아니었음을 곧 알게된다.
"잠시 오해가 있었군요. 전투기에 탑승한 우리는 벤투시가 아닙니다. 벤투시 상인들과 함께 동행해온 엘더스 행성계의 넬프라고 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알하임의 예언에 따라 이곳을 찾은 것이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 넬프인은 당신과 싸울 뜻이 없습니다."
건조함의 함장 알하크에게는 엘더스 행성계와 넬프인은 생소한 존재들이었다. 엘더스 행성계는 얼핏 들어본 것 같지만, 그 행성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들어본 기억도 없었다. 아마 그런 경험은 그의 옆에서 들어본 적 있는지 서로에게 물어보는 디멜과 소반 선장도 마찬가지인 듯 보인다.
안녕하세요.
홈월드를 좋아하는 팬입니다.
10화 이후 너무 오랜만이네요
ovlibion님의 언젠가 나올-_-홈월드 모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만 복습하러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