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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야규어 / 
2017. 1.07



                                                                                                                   


1. 던전은 왜 흥미진진한 곳일까?

                                                                                                                    



꽉 막히고 폐쇄된 곳, 앞뒤를 알 수 없는 곳은 모험물이나 공포물에서 요긴한 무대 장치입니다.  특히 동굴이나 성채광산무덤 등은 주된 소재였죠. 


주인공을 혼란에 빠뜨릴만한 요소가 많아요일단 바깥 세상과 격리되었기에 대립 구도가 뚜렷해집니다자질구레한 주변 상황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미궁을 배회하는 몇몇 세력만 묘사해주면 그만이거든요시점이 좁아지는 만큼내부 상황을 관찰하는 몰입도는 자연히 상승합니다


또한 닫힌 공간이기에 심리적 압박을 주기도 합니다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상태라면 갑갑하고 불편할 테죠그런 불편함이 암울하거나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형성하기 좋습니다당장 빠져나가려고 해도 어디 탈출구가 보여야 말이죠빛이 없어서 어둡기 때문에 음산한 느낌도 들고요게다가 길이 복잡하게 꼬여있어서 툭하면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지도라도 있으면 다행인데그마저도 없으면 똑같은 장소를 빙빙 돌거나 함정에 제발로 걸어갈 우려도 있습니다평소 인적이 드나들지 않으므로 자연히 미지의 세계이기 마련이고요낯선 곳을 탐험한다는 이미지도 있죠.



검마 판타지라면굴이나 버려진 성채깊은 광산 등을 주로 이용합니다이른바 던전이라고 하여 환상 모험물의 모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죠아예 이걸 타이틀로 삼은 <던전스 앤 드래곤스>도 있고요. SF물은 사정이 좀 다른데현대 혹은 근미래를 다루기에 성이나 지하감옥을 등장시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뭔가 도시적인 냄새를 풍기거나 첨단 과학을 묘사해야 하지 않겠어요그래서 하수도나 지하철처럼 현대 도시와 밀접한 공간이 주로 쓰입니다아니면 해저 기지나 우주선처럼 미래지향적인 가상 건조물도 있고요그렇다고 동굴이나 광산 등을 아예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21세기가 되어 지구 곳곳에 인류의 발길이 미치지만아직 탐험하지 못한 자연 동굴도 많거든요그곳이 어떤 지형일지어느 생물이 서식할지 아무도 모르죠과학 탐사대가 이런 곳을 조사하다 봉변을 당하는 스토리도 널리 쓰입니다미래 시대라 해도 자원을 소모하는 건 마찬가지이므로 외계 행성의 채굴은 드물지 않은 소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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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도의 악어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앨리게이터>.]


                                                                                                                   


2. 하수도 - 도심지의 현대적 던전

                                                                                                                    




허나 역시 SF물이라면뭔가 인공적인 배경이 나와야 제맛이겠죠이 중에서 하수도는 도시전설을 창조하기에 이상적인 곳입니다마을이 들어서려면 수원도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예전에는 물길을 끌어다 쓰기 어려워 강가에서 문명이 번성했죠그러다 건축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수도를 만들어 필요한 곳에 물을 댔습니다이렇게 사용한 물을 다시 흘려 보내기 위해 상수와 대비되는 하수도를 만들었는데…. 쓰고 버리는 물이니 위생 상태가 거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덕분에 하수도는 퀴퀴하고 지저분하며 어두운 곳이란 악명을 떨칩니다일반인은 출입할 일이 별로 없으므로 더욱 상상력을 자극하고이곳이 괴물의 은신처로 격상하는 건 그리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더군다나 사람들이 쓴 물을 처리하니까 도시 밑에 존재하지만평소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가까이 있지만 보이지 않고더러우면서도 함부로 갈 수 없는 셈이죠이 정도면 현대판 던전으로 손색이 없습니다그래서 도시 괴물은 하수도에 살거나 최소한 몸을 숨길 곳으로 한번쯤 고려할 만합니다.



모든 도시의 하수도가 이렇지는 않습니다우리나라만 해도 파이프형 수도가 많아서 복잡한 미로라고 하긴 어색하죠하지만 미국이나 유럽 같은 곳은 말 그대로 지하 터널이 여기저기 뚫린 지라 괴물들 몰아넣기 딱 좋습니다특히미국에서 유명한 도시전설로 ‘하수구 악어가 있습니다동물원에서 탈출하거나 도시로 기어들어온 악어가 하수도에 산다는 내용입니다가끔 떠내려오는 폐기물을 먹거나 지나가던 행인을 덮치기도 하고요미국인들은 이 전설을 굉장히 좋아하는지 창작물에도 영감을 받은 흔적이 드러납니다. B급 영화 <앨리게이터>가 이 방면의 얼굴마담실험실에서 버린 동물을 먹고 거대화한 악어가 난리법석을 떱니다몇몇 촌스러운 장면만 빼면 꽤 볼만한 물건입니다미국 코믹스의 양대산맥인 DC와 마블도 각각 하수도 악당을 소유했죠악어처럼 생긴 킬러 크록이나 도마뱀 과학자 리저드입니다하수 용도는 아니지만오래된 도시는 지하에 터널이 뚫린 곳도 많죠파리 등은 지하가 하도 복잡해 괴물들이 몰리면 뚫기가 힘들다고 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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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던전을 탐사하는 기분의 <메트로라스트 라이트>입니다.]



                                                                                                                   


2. 지하철 - 범죄의 소굴

                                                                                                                    



하수도의 이웃사촌 정도 되는 곳으로 지하철도 있습니다크고 아름다운 터널이 도시 밑바닥에 뚫렸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본격적인 지하철은 1970년대부터 개장했으므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하수도보다는 근대적인 모습이 강합니다시커먼 물줄기가 흐르는 것도 아니고조명도 설치했고유동인구도 많아서 비교적 안전하기도 하고요하지만 역시 어두컴컴한 지하라는 게 다를 바 없어서 불안감을 조성합니다무엇보다 지하철은 실질적인 우범지역으로서 뉴욕 같은 대도시마저 90년대만 해도 온갖 범죄가 설쳤고지금도 몸조심해야 할 곳이죠.


 갈 데 없는 노숙자들이 비와 추위를 피하려고 역에서 거주하느라 안 좋은 이미지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상황이 이렇다 보니지하철은 뭔가 무서운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지고무서운 괴물이 살아도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하수구와 달리 전철역은 도심지 한가운데 있기에 괴물의 출입이 용이하기도 하고요승강 시설을 비롯해 폐차를 피신처나 본거지로 이용한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열차가 계속 드나들다 보니까 일반 역에는 항시 괴물이 거주하지 못합니다그러므로 운행을 중지한 역이나 전동차가 가끔 다니는 노선 사이에 진을 치곤 하죠만약 주인공과 괴물이 추격전을 벌이면주인공의 유도 혹은 재수가 없어서 지나가던 열차에 치여 죽는 괴물도 더러 있습니다더욱이 지하 노선 자체야 인적이 없지만그곳을 오가는 전동차 안에는 승객이 가득합니다따라서 괴물이 자칫 열차에 올라탔다 치면 대형참사가 벌어지죠기관사까지 당하면차량이 지상으로 튀어나와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기도 하고요괴물만 존재하는 하수도와 달리 인간과 괴물이 보이지 않는 실랑이를 겨루는 곳이라고 할까요. ‘보이지 않는 통로라는 용도 때문인지 다른 세계로 통하는 차원문이 열리기도 합니다러브크래프트의 구울들이 지하철을 이용해 살육을 저지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믹역시 지하에 곤충형 괴물이 떼거리로 몰려다닌다는 설정아예 이걸 테마로 삼아 본격 노선 미궁을 여행하는 작품으로 <메트로 2033> 시리즈가 대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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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트로모의 좁고 복잡한 디자인은 우주 미궁의 영감으로 작용했죠.]


                                                                                                                   


3. 우주선 - 우주에 떠 있는 미로

                                                                                                                    



하수도와 지하철이 현대의 도시전설이라면우주선이나 지하기지 등은 미래 괴담에 적합합니다실제 우주선이라고 해 봤자 아직까지 던전으로 쓰일만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습니다우주로 나가는 건 비용이 엄청나게 드는 일이고우주선은 비용 절감을 위해 크기를 키우기 어렵습니다우주정거장 정도는 되어야 터널이니 미궁이니 할 수 있는데그것도 미르 정도로는 힘들고 ISS쯤 되어야죠.

SF물에서처럼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고 몇 백 미터를 넘어가는 우주선이 곧잘 날아다녀야 공포물 하나 찍을 수 있을 겁니다솔직히 SF물이라고 해도 전장 2km를 넘어가는 기체는 드물어서 주인공이든 괴물이든 활동에 제약이 많긴 합니다하수구나 지하철이야 지상으로 올라가도 별 문제가 없지만우주선 밖은 극한의 환경이니까요반대 급부로 폐쇄 공포증을 강조하기 좋고막막한 우주에 홀로 버려졌다는 심리도 건드리죠가장 가까운 별이나 정거장이라 해도 엄청나게 떨어졌을 테니사실상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주선 미궁은 도시전설이나 실제 사건보다 소설에서 기원을 찾아야 할 겁니다우주선을 괴물과의 싸움터로 이용한 본격적인 작품은 <스페이스 비글>일 겁니다그 중에서도 <진홍빛의 불협화음>이 두드러집니다.


 여기에 나오는 괴물 익스톨은 비글이 만났던 외계인 가운데서도 특히나 악질적인 먼치킨입니다수명이 엄청난 것은 물론이요에너지를 빨아먹고 성장하며스스로 번식을 할 수 있고더군다나 분자구조까지 바꿉니다자신의 육체만 아니라 타인까지 말입니다비글에 침입한 익스톨은 장기를 살려 벽에서 벽으로천장에서 바닥으로 휙휙 사라집니다알을 집어넣을 숙주로 삼아 승무원까지 납치하면서요.


 이 죽음의 숨바꼭질은 이후 수많 SF 호러물이 자라나는 모티브가 되었습니다영화 <에일리언>이 바통을 이어받아 대중화시켰고노스트로모의 디테일은 우주선 미궁의 분양 모델이 되었죠요즘에는 <데드 스페이스등의 명작이 있습니다.


참고로 우주선을 미궁처럼 표현한 작품은 설정과 작중 크기가 달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가령, <데드 스페이스>의 주무대인 이시무라를 보죠설정상 전장이 1.6km라고 합니다하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체감상 몇 십 km는 되는 것 같습니다이런 체감은 특히 비디오 게임에서 더 심해집니다아무래도 주인공이 돌아다니며 임무를 수행하고 괴물과 싸워야 하니넓게 표현해야만 하겠죠그래서 가끔 우주선을 떠나 정거장이나 행성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돌아오는 편법(?)을 집어넣기도 해요개인적으로 이런 걸 제일 심하게 느꼈던 경우가 <에일리언 브리드>였습니다여기서 나오는 레오폴드는 말이 좋아 함선이지그 규모는 가히 우주 기지급입니다우주선 크기를 확 키우면 될 것도 같지만아무리 SF물이라도 몇 십 km나 되는 건조물을 등장시키긴 힘들고요우주선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그런지, <에일리언>이나 <데드 스페이스>는 속편에서 그냥 행성 기지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우주선 대신 비슷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곳으로 우주 기지로 대신하기도 합니다인류 문화가 발달하다 보면 건물도 커지기 마련이라 나중에는 건물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가 되기도 하거든요초거대 건물이나 시설 단지는 서로 얽히고 설켰기에 역시 던전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이런 대형 주거 단지를 우주에만 세우는 게 아니라배경에 따라 주요 무대가 달라기지도 합니다비단 우주 기지 외에도 지하에 커다란 대피소를 만들 수도 있고해저에 연구 단지를 세우기도 하고특대형 감옥을 건설할 수도 있죠시설 목적과 환경에 따라 등장하는 괴물이 달라진다는 게 특징입니다해저 연구소라면 당연히 바다 괴물이 침입할 것이요핵폭발 대피소라면 나중에 방사능 돌연변이와 마주치겠죠다행히 이런 곳들은 특수 용도의 공간이다 보니나름대로 방어 체계가 잘 잡혔습니다그래 봤자 설정에 따라 순식간에 괴물 지옥이 되는 건 예사도 아니지만요쓸만한 시스템이 없는 하수도나 지하철우주 공간에 낙오된 우주선보다야 낫다는 거죠.



이 밖에 보다 마이너한 던전으로는 처음에 언급했던 동굴이나 광산 등도 있습니다동굴은 자연적인 지형이므로 비경탐험물과도 잘 맞아 떨어집니다오지를 탐험하다 웬 동굴을 발견하고거기 들어가서 곤란에 처하거나 괴물한테 쫓긴다는 식입니다. 19세기부터 나왔던 모험물이 그 원류가 아닌가 싶습니다외계 행성에 광산 파놓고 채굴하는 작품이라면광산에서 뭔가 튀어나올 법도 합니다고대에 잠들었던 괴물을 깨운다거나무너진 갱도에서 외계인들이랑 싸우거나 등등검마 판타지와의 차이점이라면다양한 장비를 동원한다는 거죠험한 지형을 돌파하는 차량이나 항공기의 특성상 괴물과 싸울 때도 유용하거든요굴삭 드릴로 뚫어버리거나땅굴 폭탄을 날리거나단단한 광물을 자르는 레이저로 쏘거나…. 때때로 스페이스 오페라는 중세풍이므로 강화복 입고 성채를 돌아다니는 광경도 볼 수 있고요광검이나 파워 소드 같은 거 들고 싸우다 보면판타지 기사랑 별반 다를 건 없긴 합니다그게 스페이스 오페라의 재미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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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물에서 미궁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여주는 <스페이스 헐크>입니다.]



이 중에서 SF 던전으로 가장 각광받는 쪽은 우주선 같습니다하수도나 지하철은 도시전설에 속하는지라 판타지랑 겹치는 것도 있고외계인 소굴로는 잘 쓰이지 않아요우주 기지나 해저 연구소는 우주선이랑 닮은꼴이라 번복되는 면도 없지 않고요동굴이나 광산은 땅속이라 그런지 디테일을 살리지 못하고볼거리도 별로 없는 편입니다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건 역시나 우주선인 것 같네요거대 우주선을 미로처럼 헤매며 타이라니드와 싸우는 <스페이스 헐크>가 그런 예가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