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에서 시녀 이야기에 대한 글을 보고 떠오른 생각입니다.


  많은 창작 작품에서는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이 등장하곤 합니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 종교가 지배하는 나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종교가 나라의 법보다도 앞에 서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심지어는 그들의 생명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종교가 국가의 위에 서서 지배할 수 있는 것은 그 종교가 권력과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초기에 종교가 탄생한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권력을 갖게 되었는데, 그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려니 종교 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호기심과 인간의 문명, 그리고 종교의 탄생"을 봐 주세요.)


  실제로 종교가 지배하는 나라를 보면, 종교인들이 권력자이거나 권력자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사례가 많습니다. 오랜 옛날부터 그랬고, 지금 이 순간도 그렇습니다. (가령 민주 운동의 기운이 높아지는 나라 중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종교 지도자가 대놓고 "모든 시위는 이슬람 교리에 어긋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왕족과 종교지도자가 오랜 밀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전제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조지 오웰의 "1984" 같은 작품처럼 말이지요. 종교가 모든 것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사회가 존재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사회가 생겨날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으며, 설사 생겨난다고 언젠가는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존 윈덤의 "바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문명이 한번 붕괴되었던 세상이고 그 세상은 종교가 지배합니다. 그 세계의 기본 교리 중 하나는 "바퀴는 사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퀴 때문에 문명이 멸망했기 때문에 바퀴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리를 잘 모르는 한 아이가 우연히 수레를 만듭니다. 그는 그것이 굉장히 편하다고 생각했고 할아버지에게 보여주지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감추라고 합니다. 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이미 다른 마을 사람이 그 바퀴를 본 것입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자신이 그것을 만든 척 하면서 손자를 대신해서 처형됩니다. 처형되기 전 할아버지는 '비록 지금은 두려워하고 감추려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니 기다리라'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흔히 '과학 문명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해석하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이는 종교적 믿음이 어떻게 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지금 종교에 지배되지만, 언젠가는 그 종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퀴"의 이야기에서처럼 정말로 세상은 변화할까요? 저는 분명히 그렇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에게는 "호기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궁금해 하고 그 해답을 밝히려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고자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능력은 심지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을만큼 강력합니다.


  하지만, 종교는 "호기심을 부정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심하지 말고 따르게" 합니다.

 

  이러한 체제는 결국 인간의 호기심과 부딪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협박이나 터부를 이용해서 호기심을 억누를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 정도로는 도저히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그런 이가 소수라면 세상은 바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조금만 늘어나면 세상은 바뀔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고 언젠가는 완전히 바뀝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이상, 호기심과 향상심을 갖고 있는 이상,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은 결국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는 존재할지라도 군림하지 못하는 세상이 찾아오게 됩니다.


  과학 기술이나 다른 가능성을 통해 세상을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1984"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겠군요.

  물론 그런 상황이 존재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매우 불행한 일이 되겠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세계는 분명히 좋은 세계는 아닐 것입니다. "향상심"을 충족할 수 없는 세상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매우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발전하지 못하는 세상은 결국 퇴보하고 무너져 버립니다.


  완벽한 통제를 이루는 순간, 그 사회는 붕괴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붕괴가 시작되면 더 이상 완벽한 통제는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완벽한 통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호기심과 향상심을 충족시키려는 이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은 바뀌는 것이지요.



  중세 시대나 현재의 아랍 같은 세계에서 종교가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은 종교가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을 이용해 통제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 아랍 세계에서 일어나는 민주 혁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떠한 권력도 영원히 세상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종교가 계속될 수 없는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컴퓨터나 불사신 등이 신으로 군림한다면 종교가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가령, "워해머 40000"의 세계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황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황제가 잠에 들어서 깨어나지 않기에 황제에 적대하는 존재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제국 내에서도 분열이 생겨나지만, 황제가 깨어 있었을때는 제국도 꽤 안정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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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해머 40000. 이 세계의 황제는 신적 존재로서 종교적 충성을 받고 있다. ]


  SF 작품에서는 발달한 문명을 가진 이성인이 신적인 존재로서 등장하기도 합니다. 아서 C 클라크 작품에서는 거의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이고, 만화 "천지무용! 료오키"에서도 고차원의 존재인 창세의 3여신이라는게 등장했습니다. 이름 그대로 이 세상을 만들어낸 존재인 만큼 그녀들의 힘은 절대적입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들을 믿고 따르는 종교는 절대적인 힘을 가질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정말로 절대적이어서 그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 완벽한 존재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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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의 세 여신 ( 천지무용 료오키 ) ]


  가령, "여신님 죽어라!"라고 외치는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서 죽는다면, 그들에 대한 믿음과 그들의 뜻에 따르는 체제는 절대적인 힘을 가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이것은 종교 체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 체제라는 것은 사실은 "권력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여신님 죽어라"라고 외치는 순간 죽어 버린다면, 그것은 사실상 자연 법칙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연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 사제 같은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것을 사제가 일일이 가르쳐 줄 필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제라는 것은 "신의 뜻을 대행하는 사람"입니다. 사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일반인들이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고 신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이고 완전 무결한 신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모든 이가 느낄 수 있으며, 모든 이가 신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해석의 여지도 없는 절대적이고 완전무결한 존재라면 그것을 해석하고 연구하는 사람도 필요 없습니다.


  물론, 때때로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소수의 연구자는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 체제라기보다는 과학의 연구와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신이 곧 자연 법칙이니 자연 법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는게 당연합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자연 법칙에 대한 연구는 딱히 사제가 아니라도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령 "어떤 일을 하면 벌을 받는가?"를 연구하기 위해서 사제 자격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사제라는 집단이 정치 집단이자 권력 집단으로서 군림할 수 없습니다. 완전 무결하고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종교라는 것은 의미가 사라져 버립니다...



  오노 후유미의 "십이국기"는 이렇듯 자연 법칙으로서의 신이 지배하는 세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그 세계에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세계의 여러 특성들은 여하튼 자연 법칙처럼 무조건 적용됩니다.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지만, 그 권력을 남용하면 확실하게 벌이 내리게 된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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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자연 법칙인 만큼 이에 대해 연구하는 상황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가령, 정해진 땅을 넘어서 군대를 보내는 행위는 섭리를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후에는 그런 상황을 반복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를 만나서 그 것을 물어봅니다.


  하지만, 이런 세계에서도 왕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사람들은 섭리(자연법칙)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섭리가 존재하지만, 그 섭리가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 법칙은 권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법칙을 따르지만, 그것에 지배되지는 않습니다. 절대적이고 완전한 신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 법칙이므로 우리는 신에게 지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연 법칙이니까 그에 맞추어 생활할 뿐입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이를테면 그리스도교의 신처럼 인간적인 존재라면...

  그렇다면 종교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간처럼 신의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이상 항상 그 신의 뜻을 물어서 행동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동을 할 때마다 신의 처벌을 각오해야 하니까요. 이건 지옥입니다. 이런 세계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신이 아니라서 신관이나 사제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면(사실 지금의 종교가 그렇습니다) 사제나 신관들이 신의 뜻을 해석해서 처벌을 내리는 방식이라면, 사람들은 결국 호기심을 느끼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종교의 지배가 제대로 성립되지 않게 되고...

  또는 사제가 신에게 처벌을 부탁하는 방식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짓을 해도 사제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되니, 결국 국법과 마찬가지로 범죄자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역시 절대적인 지배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사제를 없애 버리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신이 존재하건 아니건, 종교라는 체제에 의해서 사람들이 지배되지는 않습니다. 신이 존재하고 그것이 절대적이고 완벽한 존재라면(가령 어떤 짓을 하는 순간 벌을 받게 되면) 그것은 자연 법칙이므로 사실상 '권력을 갖고 지배한다.'라는 개념이 될 수 없습니다. 신이 존재하더라도 그리스도교의 신처럼 인간적인 존재라면 종교가 권력을 갖고 행동하겠지만, 완전한 지배는 될 수 없습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람들은 종교 자체에 의문을 느끼고 종교의 지배를 벗어나게 됩니다.


  종교에 의한 지배는 결국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호기심이 있고 향상심이 존재하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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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아는 이는 현재를 이끌어가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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