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 신 극장판 4편 최종 완결편(리피트 또는 디카포) 감상 글입니다.

  

1. 겐도가 말을 많이 한다.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 1편인 서가 개봉하였을때,

사람들이 가장 놀라워했던 것은 "레이가 말을 많이 한다"였습니다.

이번에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4편 리피트(또는 디카포)를 보고서,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겐도가 말을 많이 한다"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4편을 보면서, 겐도가 진 주인공으로 등극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바 TV판에서도, 이후 나온 극장판에서도 생각 없는 사이코패스 같은 느낌을 주곤 했었던 인물인데,

처음으로 겐도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왜 그렇게까지 세상을 떠난 부인에게 집착하는 것인지

그것을 해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리즈를 마무리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상 작품의 절정부에서 주인공의 아버지 겐도를 중심으로 나래이션이 깔리면서 내면 묘사가 이루어다보니

속 시원하다는 느낌도 들지만 이 작품이 소년을 위한 애니메이션에서 갑자기 한 세대 위로 점프하게 됩니다.

중장년 이상의 주인공을 내세운 애니메이션이 드문 것도 아니고, 추억을 테마로 한 [붉은 돼지] 사례도 있지만,

멀쩡히 청소년물의 노선을 유지하다가 느닷없이 중장년 이상을 위한 애니메이션으로 마무리가 되어버리다니...

작품을 만든 안노 감독 자체가 파릇파릇했던 청년에서 어느덧 환갑을 넘긴 나이로 중년을 넘어 노년에 들어섰기에,

25년 전 TV시리즈를 보았던 청소년들이 어느새 40 대 중년이 된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소년기의 아들을 강압적으로 다루다가 결국 그 아들과 대결을 벌이는 모습이 등장하고,

끝내 그 아들에게 모든 주도권을 넘겨주고 세상을 떠나는 형태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서 늙어 간 감독이 에바 시리즈를 보면서 같이 늙어 온 관객과 공감하는 방식으로 보였습니다.

    

2. "TV 시리즈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vs. "신 극장판 1~4편"의 분리

에반게리온 기존의 TV 시리즈와 엔드 오브 에바 극장판은 방황하는 청소년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신 극장판 시리즈의 경우 1~2편은 TV시리즈와 그리 다르지 않게 총집편을 다시 만든 형태였는데,

2편 마지막에서부터 노선을 달리하더니 3~4편으로 가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등장인물들이 기존의 TV 시리즈 및 극장판과는 서로 다른 형태로 조금씩 튜닝되어 등장하더니,

신 극장판 4편에 이르러 드디어 기존 시리즈와는 사실상 병행세계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모습으로 갑니다.

무엇보다 멸망한 세상을 무대로 스토리를 전개하면서 완전히 산으로 가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하고,

주인공의 고뇌 역시 '히코모리의 입장'에서 갑자기 '세상을 멸망시킨 자의 입장'으로 확 바뀝니다.

이 때문에 중반부 주인공이 옛 친구들을 만나 도움을 받으면서도 고뇌하며 괴로워하는 장면은

상상도 못할 스케일의 우울증에 대한 묘사로 밖에 보이지 않아서... 보고 있기 괴로왔습니다.

  

하지만 멸망한 세상을 다시 어떻게든 구하고,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하였고,

중간 과정의 스토리는 이전 시리즈와 전혀 달라졌지만 어떻든 결말은 해피 엔딩을 지향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계속해서 어려운 일을 강요하던 강압적이고 정 없이 굴었던 도움이 안되는 부친은

세상을 구하는 과정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삶을 마감하며 모친과 함께 성불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서 주인공을 짖누르던 부친에 의한 콤플렉스와 모친에 대한 그리움이 극복되는 것으로 그려지고,

세상을 멸망시킨 자로서의 부채의식마저 "세상을 구했기 때문에" 완전히 털어낼 수 있게 됩니다.

    

히코모리의 상징이었던 주인공이 멀정한 청년이 되어 연애를 즐기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것은,

작품 전체에서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어서 반전이라면 가장 큰 반전일 겁니다.  

청년으로 성장한 주인공이 애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세상으로 뛰쳐나가는 결말을 보면서,    

이게 지금까지 내가 알던 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 맞는가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감독은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지난 25년 간 만들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성공이 가져 온 과실만큼이나 커다란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을 오래 앓았다고 하는데...

결국 자기 자신에게 영광이자 고통이었던 작품을 우여곡절끝에 최종적으로 마무리하면서,

감독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희망을 결말에 담아 끝내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랜 마음의 짐을 털어내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이 결말의 메시지로 보였습니다.

     

3. 사라진 리얼리티와 개연성

본래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TV 시절만 해도 제법 사실적인 배경을 만들어보려고 하였던 작품입니다.  

거대 로붓을 건조하기 위한 국제적인 공조와 협력, 그것을 운용하기 위한 범 국가적인 거대 조직의 결성과 운영 등이

"그 많은 돈을 들여서 큰 일을 하려면 저런 조직이 당연히 필요하겠지"라는 나름의 개연성과 리얼리티를 주었습니다.

   

왕년에 건담이 등장하였을 때, 팬들이 신선하게 생각하였던 것은 건담이 정비를 받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언제나 무적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적들을 쳐부수는 수퍼 로봇을 보면서 "막연히 김박사가 알아서 다 고치나보다" 그러다가,

싸우면 망가지고, 고장나면 고쳐야 하고, 장비를 운용하기 위한 전문 인력과 조직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신선함을 던져주고 상당한 리얼리티를 확보한 바 있었습니다.

  

에반게리온 TV시리즈를 보면서 그래도 과거 애니메이션들과 가장 차별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은,

거대 로봇을 만들어 미지의 막강한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큰 돈과 막강한 조직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것을 조달하고 운영하기 위하여 전 세계가 합심하여 협의하는 모습이 어떤 형태로든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큰 목적으로 모인 조직이 나름대로 다른 꿍꿍이 속에 음모를 꾸미는 모습도 흥미로왔지만서도...

  

이에 반하여 새로 만들어진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 3편과 4편을 보면서 가장 와 닿지 않았던 대목은,

세상이 거의 다 망해서 나라도 없고, 정부도 없고, 조직도 사실상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데,

어디서 물자를 조달하고 사람을 데리고 와서 저 거대한 로봇을 만들어서 싸움질을 벌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강점이었던 리얼리티와 개연성이 언제부터인가 통채로 증발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희망찬 내용으로 벌려 놓은 떡밥 회수하면서 어떻게든 잘 마무리하는 데 집중하였고,

그 과정에서는 다이나믹한 액션들을 최대한 창의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야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작품에 몰입하게 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리얼리티와 개연성은 다 내버린 것 같아서...

큰 아쉬움이 있엇습니다. 누군가 감독 곁에서 균형을 잡던 존재가 사라진 게 아닌가 의심되기도 하더군요.

      

4. 아듀, 에반게리온!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제와 비슷한 나이의 동년배들에게는 상당히 의미가 큰 작품입니다.

제 또래로 거의 같은 시기에 천리안 멋진신세계에서 활동했었던 장강명 작가의 경우에는,

아예 [열광금지 에바로드]라는 에반게리온 매니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편소설을 써내기도 헸습니다.

1990년대초부터 한창 SF에 빠져들어 아서 클라크, 하인라인 등을 읽어대고 SF영화를 보고 즐기고,

건담 시리즈와 토미노 작품들의 이야기를 PC통신 동호회에서 오손도손 나누던 팬들에게...

1990년대 중반에 나타난 에반게리온은 사실상 핵폭탄과 비슷한 레벨로 다가왔습니다.

   

에반게리온 TV시리즈가 비디오로 출시되어 강렬한 액션과 상상 이상의 심리묘사로 화제를 모으고,

제대로 완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비판 속에 이야기를 마무리한다며 나온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소개되면서...

마이너 매니아물로 취급되었던 에반게리온은 어느새 모든 영화잡지 등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키노]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분석하고 또 분석한답시고 복잡한 칼럼으로 에반게리온을 다루고 또 다루었죠.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한 때 사회현상에 가까웠던 에반게리온 붐은 꺼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전설이 되었고, 화석이 되어 갔습니다 - 그리고 서서히 잊혀지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죠.

에반게리온은 25년 전 소개된 TV 시리즈에서 시작하여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극장판을 지나서   

2000년대 넘어서면서 신 극장판 4편이 더 만들어지고 무려 25년만에 결국 끝나고야 말았습니다.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작품을 계속 부여잡고 더 만들고 있는 모습은 마치 2000년대의 전원일기 같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골게리온"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상업적 목적으로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꽤 많았지만,

감독이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건강을 크게 해치고 우울증을 앓으면서 거의 죽을 고생을 했던 것을 보면,

신 극장판 4편을 만들려 했던 것은 반드시 돈만이 목적이었던 것은 분명히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일 수 있겠지만, 제목 자체를 리피트(또는 디카포)라는 음악 용어를 사용하여 마무리하였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도돌이표 같이 병행세계를 "4편의 새로운 극장판을 통하여" 충분히 이야기할 만큼 하였기 때문에,

이제 3번째 반복을 또 다시 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처음 에반게리온을 보던 시절 저는 대학을 휴학하고 군복무 중이었던 청년이었지만,

지금은 직장 생활 20 년을 넘기고 있고 아이들이 어느새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제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듀스 같은 그룹은 청소년들에게 거의 들어본 적도 없는 전설 같이 이야기되고,

에반게리온이나 나디아 같은 작품 역시 너무나도 오래된 구식 고리짝 애니메이션일 뿐입니다. 

아들 딸들과 미래소년 코난, 나디아, 바람돌이, 999 등을 같이 보려고 몇 번 시도해 보았는데... 

아이들이 제대로 보기 힘들다면서 전부 자리를 이탈하더군요. 

    

개인적으로 건버스터 - 톱을 노려라, 나디아,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상당히 좋아했고,

그래서 이번에 나온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극장판도 많은 기대 속에 감상하였습니다.

이제 감독이 오랜 여정을 마무리했듯이, 저도 팬으로서의 기다림을 끝낼 때가 되었습니다.

"아듀, 에반게리온!" - 어쩐지 시원 섭섭한 생각이 듭니다. 무엇이든 다 그런 법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