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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외계인, 복제인간, 인공지능…. 어디가 원본이고 어디에서 경계선을 그어야 할까요.]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는 먼 미래. 어떤 외계인들은 인간으로 변신하고 인간처럼 살아갑니다. 즉,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사실 인간이 아니라 외계인일 수 있죠.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진 울프가 쓴 <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 소설입니다. 꽤나 흥미로운 내용이죠. SF 소설은 예전부터 인류와 외계인의 갈등을 그렸는데, 이들은 항상 외면적으로만 싸우지 않았습니다. <우주 전쟁>과 <영원한 전쟁>, <대수학자>, <하이페리온>, <유령 여단> 같은 소설들은 인류가 외계인들과 물리력으로 박터지게 싸운다고 말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죠. 밀리터리 SF 소설이나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의 우주 함대전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때때로 어떤 외계인들은 인간처럼 변신하거나 위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놈들은 몰래 인류로 변신한 이후,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자신들의 숫자를 점차 불려나갑니다. 정작 인류는 그걸 전혀 몰라요. 마침내 외계인들은 인간 사회를 점령하고 맙니다. 물리적인 충돌 없이 위장과 변신만으로 점령에 성공합니다.


이웃집 아저씨가 사실 외계인이었다면…. 내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외계인이 이웃집 아저씨를 죽이고 그 모습을 훔쳤다면…. 그 외계인들이 내 가족과 내 이웃과 심지어 공권력까지 장악했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걸 모른다면…. 굉장히 혼란스럽겠죠. <거기 누구요?>와 <인스머스의 그림자>, <신체 강탈자>, <사기꾼 로봇> 같은 소설들은 그런 내용을 다룹니다. 당연히 저는 <케르베로스의 머리>를 펼쳤을 때, 저런 내용을 기대했습니다. 외계인이 인간으로 변신하고, 인류 사회를 장악한다는 줄거리를 기대했죠. 그런데 이 소설의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거기 누구요?>와 <신체 강탈자> 같은 소설과는 생판 궤도가 다릅니다. 솔직히 좀 당황스럽더군요. 제가 굳이 다른 소설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까닭도 그만큼 충격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외계인이 인류 사회를 장악한다는 천편일률적인 묘사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보다 정체성의 혼동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인간과 외계인을 구분할 수 없는 사회. 누가 누구인지 모르고, 항상 의심만 하는 상황. 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정체성 논란이 튀어나오기 마련이죠. 진 울프는 그런 혼돈을 밑바닥까지 파고 파고 또 파고 듭니다.


<케르베로스의 머리>는 중편 모음집이고, 모두 세 개의 소설로 이루어졌습니다. <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 <존 마쉬의 이야기>, <V.R.T.>입니다. 각 소설의 줄거리는 이어지지 않으나, 기반 설정은 비슷합니다. 그래서 1부의 등장인물이 3부에 언급되고, 2부의 사건이 3부에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따라서 소설 내용과 주제를 온전히 음미하고 싶다면, 세 편을 모두 읽는 편이 낫겠죠. 사실 어느 한 편만 읽는다면, 작가가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헛갈릴 겁니다. 정체성의 혼돈을 들입다 고민하는 소설답게 내용이 꽤나 난해하거든요. 아마 이 소설을 수월하게 읽은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사건 전개를 전혀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하얀색은 종이고 검은색은 글자인데, 도대체 소설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어차피 저는 필립 딕의 소설도 이해를 잘 못하는 편이지만, 아마 이게 개인적의 경험담은 아닐 겁니다. 수많은 독자들은 여전히 이 소설의 정확한 내용을 고민하는 중이고, 아직 확실한 결론이 안 나왔다고 하니까요. 앞으로도 뚜렷한 결론이 나오지 않겠죠. 아예 출판사가 책의 첫머리에 이 소설은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골 때리는 책이라는 뜻이죠.


그래도 이 소설이 던지는 몇 가지 의문이나 논지는 꽤나 구미를 당겼습니다. 만약 어떤 외계인이 인간으로 '완벽하게' 변신한다고 가정하죠. 그냥 겉모습만 모방하지 않고, 완전히 인간으로 변신한다고 가정하죠. 그렇다면 그 외계인은 인간일까요, 여전히 외계인일까요. 당연히 인간일 겁니다. 그런데 외계인이 인간으로 '완벽하게' 변신한다면, 변신 능력마저 잃어버릴 겁니다. 그 외계인은 완전한 인간이 되고,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겠죠. 만약 이런 일이 연이어 발생하거나 수 세대를 지난다면, 외계인들은 자신들이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릴지 모릅니다. 자신들의 뿌리를 잊어버리는 종족들은 SF 소설에서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세대 우주선 소설을 보세요. 세대 우주선은 몇 세대를 거치며 항해하고, 덕분에 승무원들은 자신들이 누군이지 잊어버립니다. 심지어 우주선에 탑승했다는 사실조차 까먹습니다. 인간으로 '완벽하게' 변신하는 외계인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인간과 접촉한 외계인들은 인간으로 변신하고, 인간 사회에 (생물학적으로) '완벽하게' 동화하고, 그 결과 자신이 누구인지 까먹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주위를 둘러보면, 누가 인간이고 누가 외계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나를 찾아온 손님이 사실 '손놈'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외계인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웃집 아저씨는 외계인이거나 외계인의 후손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TV에 나오는 유명 연예인은 외계인이거나 외계인의 후손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나라를 관리하는 고위 공무원은 외계인이거나 외계인의 후손일지 모릅니다. 심지어 나 자신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들이 무슨 소용일까요. 어차피 인간과 외계인을 확실히 구분할 수 없다면, 외계인들이 인간으로 '완벽하게' 변했다면, 인간과 외계인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요. 구분해서 뭘 어쩌겠습니까. 이미 결과적으로 둘은 동일합니다. 물론 그 둘은 다를 수 있습니다. 어쨌든 태생적인 인간과 후전적인 변신 인간은 다를 테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인간과 변신 인간의 '경계'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생물학적인 구분은 그렇다 치고, 의식적인 구분은? 이웃집 아저씨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아가고 있고, 그 자신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구분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소설은 이런 물음만 던지지 않습니다. 변신 외계인만 해도 골치가 아프지만, 이 소설은 복제인간과 인공지능까지 언급합니다. 변신 외계인처럼 복제인간과 인공지능도 골치 아픈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들었다고 가정하죠. 원본과 복제인간은 1% 정도만 다릅니다. 이 상태에서 두 사람은 동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본과 복제인간이 5% 정도 다르다고 가정하죠. 이 상태에서 여전히 두 사람은 동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겉모습은 똑같습니다. 몸 속 어딘가의 유전자 구성은 다르겠으나, 그래도 겉모습은 똑같아 보입니다. 이런 비율이 점점 늘어난다면? 이런 비율이 점점 늘어나지만, 그래도 겉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런 복제인간들이 하나의 대가족이나 집단을 구성한다면? 그들은 모두 남입니다. 복제인간이라고 해도 엄밀히 말해서 남이죠. 하지만 의식적으로 따진다면, 그 사람들이 남이 아니라 사실 나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모두 나에게서 비롯했으니까요. 조부모와 부모와 자매를 구분하는 행위가 헛갈릴 수 있죠.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튀어나오는데, '내'가 누구냐는 겁니다. 만약 최초의 '나'가 사라지거나 기록을 소실했다면, 모든 걸 야기한 '나'는 누구일지 헛갈릴 수 있죠.


여기에 인공지능이 살짝 끼어듭니다. 음, 인공지능 문제는 변신 외계인이나 복제인간들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시 골치 아픈 물음들을 던집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의식을 가상 공간에 이식한다고 가정하죠. 그리고 그걸로 인공지능을 만듭니다. 이 인공지능은 그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인공지능이 그 사람과 똑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언뜻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그 사람과 인공지능은 서로 다른 개체입니다. 게다가 인공지능이 언제나 그 사람처럼 반응한다고 할 수 없죠. 세월이 흐르면 인공지능은 독자적인 성향을 띨 테고, 원본에서 멀어지겠죠. 인공지능은 소설 속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변신 외계인이나 복제인간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복잡한 정체성을 자랑합니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소재를 아주 반복적으로 드러냅니다. 저는 필립 딕이 제기하는 정체성 혼란도 버거워하는 사람인지라 진 울프의 이런 논쟁에 두 손 들었습니다. 아, 이게 뭔 소리인지….


물론 <케르베로스의 머리>는 저런 물음을 직접 던지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훨씬 읽기 편했을 겁니다. 이 소설은 산만하고 정신 사나운 시점으로 저런 골치 아픈 물음들을 불쑥불쑥 선보입니다. 게다가 이런 정체성 논쟁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류가 다른 행성을 개척하는 만큼, 식민지 논쟁 또한 주요 소재로 떠오릅니다. 특히, <V.R.T.>는 라이더 해거드의 <그녀>,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 허버트 웰즈의 <모로 박사의 섬>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비경 탐험 요소가 짙게 배었습니다. 우울한 비경 탐험이죠. 잘난 문명인이 야만적인 미개인을 정복하는 이야기니까요. 이것 역시 소설의 주요한 주제지만, 변신 외계인과 복제인간과 혼란스러운 정체성 논란에 밀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변신 외계인이 너무 골머리 아픈 소재이기 때문에 식민지 논쟁이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솔직히 제가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이런 소감문이 소설의 본질에 제대로 접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책을 읽었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몇 감상을 적어봤습니다. 뭐, 소설 감상문이 아니라 소설이 던진 충격을 이야기하는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