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낡은 지하터널 뒤 수없이 많은 문들 중 하나가 열렸다. 나는 손을 묶이고 눈은 가려진 채로 EMP 샤워를 당했다. 생체칩이 있던 자리가 타는 듯 달아 올랐다. 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재갈이 물려 있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통은 잠시후 사그라 들었지만 이마에선 촉촉하게 진땀이 흘러나왔다. 고통과 두려움에 몸이 뻣뻣하게 긴장해 있었다.
두건 밖으로 따가운 빛이 파고 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두건을 벗겨라."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눈부신 조명이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고통스러움 뒤로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조직에 가입하고 싶다고? 왜지?"
"로봇에게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싶으니까."
"해방? 좋은 말이다. 하지만 왜 해방시켜야 하는거냐? 로봇의 지배가 인간의 지배보다 못한 것이 있나? 로봇이 인간을 지배한 이후로 인간은 전쟁과 기아,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인간들은 잘 살아가고 있지."
"난 저항조직을 찾아 온거야. 왜 내가 니들에게 로봇과 맞서 싸워야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되려 니들이 날 설득해야 하는 거 아냐?"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친절한 사람들이 아냐. 우리가 로봇들에 맞서 싸우는 건 맞지만 그건 그게 돈이 되기 때문이지. 너처럼 거창한 이유를 대는 놈들은 사실 좀 위험해. 우리는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쪽이 더 낫다. 자. 계속 해 보자. 아직도 우리에게 관심이 있나?"
불빛 뒤에 숨은 목소리는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내게 물었다. 나는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 이 놈들은 그냥 평범한 양아치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이런 멍청한 짓거리는 당장 집어 치우고 돌아나갈텐데 스스로 손을 묶이고 눈을 가린 뒤 놈들의 아지트까지 끌려오다니.
"조직의 도움을 받고 싶다. 난 Tzorg의 로봇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그들은 우리를 농장의 가축처럼 사육하고 있어.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왜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거지? 우리가 전쟁에서 졌다고 해서 노예로 살아가는 게 당연하지는 않아. 편하다는 이유로 사육되는 가축의 삶을 택하는 건 분명 인간이 취해야 할 길이 아냐. 우리는 이 도시를 탈환할 수 있어."
"하.. 이거 또 성자 납셨군. 너 같은 놈들이 간혹 있지. 종교적 열정으로 인간이 인간을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 놈들이야. 다시 묻겠다.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면 뭔가 다를 것 같은가? 로봇이 다스리는 것보다 하등 나을 게 없어. 아니 개판 되는 거야. 자기 욕심 차리는 놈들이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거야. 우리가 불법적인 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로봇의 사회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너 같은 광신도 놈들이랑은 엮일 일이 없다는 거지."
"그래? 그럼 서로 관심사가 다르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야기는 그만두지. 난 돌아가야겠으니까."
"그렇게 쉽게 왔다가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여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냐."
"그럼 어쩌게 날 감금이라도 할 셈인가?"
"니가 가진 크레딧을 다 빼앗은 뒤에 죽여버리는 게 더 나을테지. 그럼 밥을 먹일 필요도 없을테니까. 뒷처리는 쥐들이 해 줄테고. 여기의 쥐들을 본 적이 있나? 고양이 정도는 뼈도 남기지 않고 해치우지. 지하세계의 포식자란 말이야. 앞으로 친해져야 할 거야. 놈들이 널 아주 예뻐해 줄테니. 하하하"
목소리는 즐겁다는 듯이 웃어재꼈다. 그러나 나는 이 놈들이 하는 말이 단순한 농담이나 협박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놈들은 진심이었다.
"내 그러니 충고하지 않았나. 저항조직이란 놈들은 단순히 썩어 빠진 범죄자들일 뿐이라고. 아무리 궁해도 악당들과 손잡겠다는 건 좋은 히어로의 자세가 아냐. 코믹스좀 읽으라니까."
등 뒤 허공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방 안의 조직원들이 웅성거렸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광학 투영체 투명화 기기를 사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누구냐! 씨발 무슨 장난질이야!"
놈들은 총을 꺼내어 나와 허공을 겨누었다.
곧 이어 꽝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뒤에 이명과 흔들림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탁탁 터지는 소리 뭔가 부서지는 소리 깨지는 소리등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나를 들쳐 업고 나가는 게 느껴졌다. 욕설과 총성이 들려왔지만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이 괜찮은가 친구."
"누구지?"
머리가 딩딩 울리지만 익숙한 목소리라는 건 알 것 같았다.
"나야. 아이작."
"아.. 참견쟁이. 이렇게 도움받을줄은 몰랐네. 고마워."
"내 말좀 잘 들으라니까. 사이드킥의 조언을 경청하는 거야말로 훌륭한 히어로의 자세라는 걸 잊지 말도록."
아이작은 어깨에 지고 있던 나를 내려 놓았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벽에 손을 짚었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니 조금 정신이 나는 것 같았다.
"아 젠장 나는 히어로가 아니라니까. 히어로가 그렇게 좋으면 니가 히어로 하라고."
"사이드킥이 히어로의 자리를 이어받는 건 히어로가 세상을 구하고 나서 죽음을 가장한 은퇴를 한 뒤에나 가능한 거야. 아직 멀었어."
놈은 나에게 관심도 없는 코믹스 이야기를 줄창 늘어놓았다. 평소 같으면 퉁명스럽게 입다물라고 쏘아 붇였겠지만 지금은 정말로 아이작의 도움이 고맙게 느껴졌다. 내가 자리에 앉아 벽에 기대자 아이작이 물을 건넸다. 나는 그 물을 마시고 눈을 껌뻑거렸다. 정신이 흐릿했지만 조금씩 시각이 회복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 식인종 소굴에 들어갔나 나온 기분이야. 정말 죽을 뻔 했군."
"놈들이랑은 그냥 멀찍이서 암거래나 하면 될 일이야. 어설프게 보스를 보겠다느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인간을 구하겠다고 인간이랑 맞서 싸울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그 놈들 약좀 올랐겠는데. 지하 구역 다닐때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등 뒤에서 꼬챙이로 찌르기라도 하면 좀 아플테니까."
"그런데 그건 뭐였지? 펑 하는 거 말야. 터지는 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던데."
"아. 사이드킥의 특수능력이라고 해 두지. 악당들을 잠재우는 데에는 이 쇼크탄 만한 게 없단 말야. 비 파편형 충격파 폭발물에 약간의 환각과 혼란을 야기시키는 가루를 첨가하여 만든 건데...."
"로봇과 싸우는 데에는 필요없는 물건 아닌가?"
"물론 인간에게 쓰는 거야."
아이작은 작은 땅콩같은 덩어리를 내게 보여주었다. 조잡해 보였지만 아까같은 위력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왜 그런 걸 갖고 있지? 인간을 적이라고 생각한 건가?"
"현대는 디스토피아라고. 인간 악당을 찾기 힘드니 말야. 공권력에 맞서 싸우려면 로봇과 싸워야 하다니. 흐.. 하지만 과거 위대한 히어로들은 언제나 뜨거운 피와 펄떡거리는 심장을 가진 인간 악당들과 싸워왔지. 쇼크탄 같은 건 그런 히어로와 사이드킥에 대한 예의란 말야. 쓰지는 않더라도 항상 갖고 다녀야지. 덕분에 널 구했잖아?"
"아. 그건 감사하지. 덕분에 살았다."
"자. 그럼 앞으론 나를 데리고 다닐 거지? 어딜 가더라도 말야."
"그래야 하나?"
"물론이지.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 내 증명을 해 보이면 동료로 삼아주겠다고. 난 내 가치를 훌륭하게 증명했단 말야."
아이작은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는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 그런 셈이군. 좋아. 인정하지. 그런데 그.. 광학 투영체 투명화 기기는 어디서 난 거야?"
"아. 이거 말인가. 내가 만든 거야. 에헴."
"그거 나도 하나 얻을 수 있는 건가?"
"10만셀 내면 만들어 주지."
"10만? 로보셀 하나가 100셀 인거 알고 있어?"
"이건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어쨌거나 히어로는 멋지게 등장해야 하니까 이런 장비에 연연하지 말아. 멋지게 총격전을 벌이면서 전진해야지 모습을 감추고 숨어들어가는 건 안될 일이야."
인간들의 도움을 받아 기계의 지배를 끝내려는 내 생각이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모르겠지만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대신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이상한 동료가 하나 생겨버렸다. 히어로 놀이를 원하는 수다스러운 동료라니.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하지만 뭔가 못미더운 구석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 그런데 아까 놈들 아지트에 들어갈 때 EMP 맞지 않았어?"
"그랬지."
"손목에 생체칩 다시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뭐?"
"EMP 맞으면 칩이 타버리잖아. 칩 없이 돌아다니면 불법이야. 스캔되면 즉시 감옥행이라구. 등록청 가서 다시 받아. 지금 당장. 비용은 500셀이야."
"젠장. 아까 그 놈들에게 돈 받아올 걸 그랬나 봐."
"당분간 얽힐 생각 하지 말아. 놈들은 야생동물 같은 거야. 윗 사회의 룰 같은 건 없어. 자칫하면 죽는다구. 그 놈들에겐 약육강식이 그냥 룰일 뿐이지."
아이작이 진지한 얼굴로 경고했다. 나도 그 경고를 무시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룰이라. 그럼 로봇들은 룰을 지키나?"
"지키지. 인간보다 더 잘 지켜. 그러니까 룰을 잘 알고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단 말야. 내 말이니까 믿어."
아이작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나를 부축해 집에 데려다 주었다. 혼자가 되고 침실에 누웠을때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감과 실망감이 한번에 몰려왔다. 힘든 하루였다. 그들의 말처럼 인간은 로봇의 지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지배를 무너뜨리려는 나는 어쩌면 대다수 사람들에겐 테러리스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절대로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게 어떤 이유였든간에 인간이 스스로를 다스리기를 포기하고 종속된 존재로 살아가는 현실을 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 게임한지 오래되어 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났는데 찾아보니 스카이넷 같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외계인들이 점령후에 뿌려놓은 로봇이었군요. 대사 일부 수정했습니다.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