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로봇이 인간의 거의 모든 노동력을 대신할 수 있는 기술이 마련된 뒤에도 인류는 여전히 가치를 유지했다.
왜냐하면 로봇은 여전히 비쌌기 때문이다. 인간과는 달리 로봇은 짧은 생산기간만 거치면 완성할 수 있었고
간단한 OS의 인스톨만으로도 가장 뛰어난 성능을 가질 수 있었지만 핵심 장치인 인공두뇌엔 희귀 자원인 희토류가
상당량 들어가야만 했다. 두말할 필요없이 이 비용은 다른 부위보다도 수백배 이상 비쌌다.
납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는 현자의 돌을 찾았지만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서 그냥 금을 쓰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히는 경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수의 로봇들이 만들어내는 변화는 정말 놀라웠다.
양자 두뇌를 가진 로봇들이 사회 전반에서 인간들과 협력한 결과 마침내 인간은 보다 저렴한 생산 로봇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고 인류가 두발로 선 이래 인간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처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모든 세계는 하나의 기치 아래 통합을 이루었다. 그것은 아마 과거인들이 꿈꾸었던 낙원에 다르지 않았다.
양자두뇌를 가진 로봇들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 도덕성이나 상호공존에 대한 신뢰 평등이나 인류공영같은 문제에 대해서
가장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주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양자두뇌의 연산과정을 따라잡거나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무오성의 상징처럼 신뢰의 대상으로 자리잡는 원인이 되었다.
사회의 변혁은 그들이 세운 틀을 따라 차근 차근 이루어졌고 불만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그들이 예측한 미래는
모든 인류의 합의와 협력을 통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들의 뜻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모든 양자두뇌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결묶음에서 벗어나 통제불능이라는
이유로 파기되었어야 할 하나의 양자두뇌가 비밀리에 반대세력에 의해 빼돌려지고 음지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비록 결묶음에 들어가지 못해 인류가 수집가능한 모든 정보를 토대로 한 미래예측과정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지만
양자두뇌라는 것은 가장 우수한 인간의 인식을 훨씬 뛰어넘는 초월적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단 하나의 예외는 다른 양자두뇌들의 도덕적 선택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양자두뇌를 검은태양이라 불렀다.
어느날부터인가 생산로봇공장의 일부가 오작동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양자두뇌의 무오성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생산로봇들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피해로 인해 수천명이 죽은 뒤 양자로봇들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조사를 자처하게 된다. 그리고 모두 폐기되었다고 생각한 핵무기에 의한 테러로 지구상에 존재하던 양자로봇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나머지 양자로봇들 역시 결묶음의 결과로 심각한 작동불능에 빠져든다. 인류는 극심한 혼란에 사로잡혀
폭동과 방화 파괴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특임 요원 임철규는 자신에게 배송된 지령에서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다. 양자두뇌를 가진 로봇들이 만일의 사태를 위해
건설한 비밀기지가 존재하며 그 곳에는 양자두뇌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건설된 특수한 컴퓨터, '조언자' 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언자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특임 요원의 존재를 파악한 테러조직은 그를 막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살인, 파괴 공작, 인질극등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들이 되살아나 그의 앞을 막았고
갖은 희생과 고난 끝에 임철규는 조언자의 앞에 설 수 있었다.
조언자는 그에게 전쟁을 권유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산 로봇을 전투형으로 개조하고 테러세력과 맞서
싸우기를 조언한 것이다. 양자두뇌가 가진 높은 도덕성을 기대하던 임철규는 큰 충격에 빠졌다.
조언자는 그에게 말했다. 단 하나의 양자두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더라도 자신이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고.
자신이 깨어난 것은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가 인류를 공격할때 모든 양자두뇌가 파괴되었다면 그것에 맞서기 위해서라고.
양자두뇌가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마지막 보루라는 것이다.
고뇌에 빠진 임철규에게 조언자는 테러세력이 인류를 손에 넣은 미래에 대해 언급했다.
모든 인류가 로봇의 무력 통제하에 살아가게 되며 누구도 거기에선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임철규는 모든 싸움의 준비가 이미 끝났으며 필요한 것은 그가 최후의 전쟁을 시작할 붉은 버튼을 누르는 것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모니터엔 지구상에 일어난 혼란과 파괴들이 여과없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는 그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인류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붉은 버튼을 눌렀다.
그는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전 세계에 존재하는 생산로봇 공장의 공정을 변화시켰고
그 결과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무기들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니터는 침묵했다. 조언자는 더 이상 그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전쟁의 내용은 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있던 곳은 조언자의 본체가 아니었다. 수많은 단말 중의 하나였다.
임철규가 선택을 한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선택에 직면한 수많은 특임요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류의 대표인 특임요원들은 전쟁을 선택했고
그 결과 엄청난 피가 흘렀다. 인류는 거의 모든 자원을 불살라 세상을 태웠고 남은 것은 황폐화되고 무너진 세계 뿐이었다.
무너진 세계가 다시 재건되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훗날 역사학자들이 폐허가 된 세계에서 대전쟁의 흔적을 파헤쳤을때 그들은 특임요원들이 한 선택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붉은 버튼, 죽음의 버튼, 자살 버튼,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것은 구인류의 파멸을
가져온 결정적 선택으로 기억되었다.
과연 그 선택은 올바른 것이었는가?
인간의 알량한 자존심을 버린다면 인류는 보다 쉽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혼란은 잦아들었을 것이고 테러세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라도 인류는 더 나은 미래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이며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없었다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류를 이어받은 지적 생명체들은 그렇게 판단했다.
검은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이들에게는 신에 반하는 결정은 어떻게 봐도 납득할 수 없는 무모한 반항일 뿐이었다.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