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가난한, 너무 가난한 행성이 있었다. 너무 가난해서 아무도 그 행성을 침략하려 들지 않았다.
한때 푸르고 생명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행성이었으나 그것을 이루던 것들 중 가진 유용한 자원은 모두 다 팔아버린 지 오래였고
남은 것은 작은 도시 하나의 생존을 유지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물과 자원이었다.
대기도, 물도, 토양도 의미있다 싶은 것은 이미 박박 긁어 팔아버린 뒤에 남은 건
유용한 자원을 채굴하고 난 뒤 차갑게 식어 말라붙은 돌들 뿐이었다.
우주를 메우고 있는 수많은 별들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 인간이 그 속에 뛰어드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면 인간들은 아마 지구 밖으로는 1cm도 나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기술을 선점한 이들이 생명의 원천이 되는 자원들을 선점하고 그걸 태워 더 높은 기술을 얻어내고
기술을 실현하기 위한 희귀자원들이 약탈당하고 또 빼앗고 빼앗기는 아귀지옥.
한번 기술을 맛보고 시공을 비틀어 지식을 얻어낸 뒤엔 뚫린 구멍과 인과를 메우기 위해 더 많은 것들을 집어 넣어야만
유지되는 세상이었다.
과거보다 더 나은 기술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삶은 언제나 궁핍했고 살아 남으려면 마지막까지 긁어서 바칠 수 밖에 없었다.
지구에서 과거 인간사이의 무한한 투쟁을 정글에 비유하곤 했다지만 이것은 그런 정글도 아니었다.
정글에선 누군가는 잡아먹히지만 또 새끼를 낳고 어떻게든 살아간다. 약자도 강자도 살아간다.
이 우주는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질 뿐이다.
인간도 무언가를 가지려 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그 엄청난 투쟁심과 욕망에도 선점한 자들이 갖고 있는 기술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자원의 양이 너무나 달랐다.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얻으려다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지구는... 더 이상 지구가 아니었다.
작은 문명의 빛조차 없는 누런 돌덩이.. 물도 공기도 남아 있지 않으며 달조차 빼앗긴 볼품없는 행성일 뿐이었다.
남은 것은 지하에 건설된 작은 도시 하나 뿐.
그리고
인류가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던 우주시대의 유물, 마지막 배. 인류의 방주, 어쩌면 인류에게 있어서는 생명보다 소중할지도 모를
과거의 영광과 자존심을 이어주는 단 하나의 끈. 인류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자원을 팔아 얻어낸 초월적 엔진과 운영 시스템을
장착하고 있지만 전투 그 이외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전투함. 레테.
그게 인류가 가진 전부였다.
예전 누가 작명했을 지 모를 하데스의 다섯 함선들 중 남은 것은 레테 뿐이었다.
전투함 레테를 팔라는 제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던 모행성의 모든 것을 팔아버린 인류중 그 누구도
레테를 팔자는 말에 동의하는 이는 없었다.
계속되는 전투와 약탈으로 거의 메말라버린 생존 본능속에서도 레테만큼은 지키고 또 지켜나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레테가 마치 시간을 되돌려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아이들은 레테를 바라보며 자랐고 그 영광을 통해 우리의 것을 되찾기를 소망했다.
레테는 자주 지구를 비웠다.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지구에서 살아남는 길은 다른 별들의 전쟁에 참가하여 댓가를 받는 길 뿐이었다.
이겨도 받고, 져도 받는다. 살아남기만 한다면. 용병으로서 레테의 전함은 우주에 그 이름이 유명했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전함, 파괴되지 않는 불멸의 전함. 거기에 주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엔 기적 따위는 없었다. 그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치열한 노력이 있었을 뿐이다.
초로의 선장은 딱딱해 보이지만 느슨한 곡선으로 마감된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 앉아 있었다.
그 곁에는 레테에 탑승하여 첫 전투를 치르게 될 부관이 서 있었다.
부관이라지만 실제론 후에 레테를 계승하게 될 이였다. 지금의 젊은이들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판단력이 훌륭한 이였으니까.
첫 출항에 흥분하여 붉게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그런 몸짓들도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아기때부터 레테를 보며 자랐고, 레테에 탑승할 것을 바라며 마침내 레테에 탑승하게 된 승무원들이 레테에 일체감을 넘어선
경외심을 갖고 바라보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부관."
"네. 선장님."
"우리는. 인류에는 미래가 있을까."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주는 넓지만 우리에게 남은 자리는 없습니다. 발전 속도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건 레테 뿐이죠."
선장은 부관에게 뭐라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의 생각에 따라 길을 갈 것이다. 그가 뭐란다고 바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까웠다. 희망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담한 현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레테와 같은 무력 없이 인류는 지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레테가 할 수 있는 건 방어가 아니라 공격이었다. 인류는 말라버린 지구에 유배되어 멸종을 겨우 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꿈을 꾸었네. 레테가 지구를 수호하기 위해 움직이는 꿈 말이야. 누군가의 침략전쟁에 동원되는 게 아니라 온전히 우리의 자유와 생명, 재산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꿈이었지."
"안타깝지만 우리에게는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대기도, 생명도 자원도 무엇도 남아있지 않죠. 우리들의 선조는 탐욕스러웠고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팔아치웠습니다. 고대 다섯함 중의 하나만 더 살아남아 있었더라도 우리는 다른 세상을 도모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고대함은 이제 없네. 모두 사라졌지. 하지만 이번에 가는 트라이튼 성계에서 보게 될 거네.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는 레테의 화력이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는지. 우리는 레테를 자랑스러워 해도 괜찮아."
함장의 말에 부관은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더니 흥분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테는 인류의 마지막 자랑입니다. 인류의 마지막 한 사람이 사라져도 레테는 남아 인류의 이름을 전할 것입니다."
함장은 그렇게 종족의 멸망을 전하는 전함들을 몇 알고 있었다. 초월적 기술이 접합된 함들은 종족 그 자체보다 오래 남기도 했다. 그런 우주전함들은 다른 종족에게 계승되어 오랜 세월을 살아갔다. 레테의 일부 부속들은 그런 초월함의 잔해에서 나온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있는 거네. 언젠가 인류는 멸종할지도 몰라.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대에서는 아니네. 우리는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있는 거야."
"네. 함장님."
"별 하늘은 처음이지? 익숙해져야 할 거야."
"스크린에서는 많이 보았습니다."
함장은 부관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수십년을 거슬러 올라가 예전 자신이 저 자리에 섰을때의 그 대화와 한치도 변한 게 없는지. 하지만 인류에게도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지금의 이 전쟁에서 운이 조금만 그들의 편을 들어준다면. 인류도 지구도, 절망적인 아픔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잊혀진 노랫말처럼 시공의 저편으로 사라졌던 고대함들이 돌아와 준다면 인류도 다시 기쁨의 노래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함장의 가슴 속에 남은 작은 희망은 전장의 공포가 주는 긴장감 속에서도 아직 살아남아 있었다.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