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덜컥거리는 마차의 흔들림이 좀 더 거칠어졌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을 벗어나 베비트경의 영지로 들어선 뒤론 도로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어스름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금요일 저녁의 강령회에는 처음 초대 받았다. 여기엔 여러 멤버가 있었는데, 심령학의 권위자라는 알프레드 교수와 영매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아셋트 여사, 신문사 편집위원인 라이언씨. 그리고 이 저택의 소유자라는 베비트경은 강령회의 유명인사들이었다.
강령회를 처음 접한 것은 친구인 베젤의 손에 이끌려서였다. 지난번 첫 강령회때 보았던 심령현상은 내 눈으로 보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도 손대지 않는 펜이 스스로 움직여 글을 쓰고 책상이 혼자 들썩거리며 어디선가 음울한 유령의 음성이 들려오는 등,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서슴없이 일어났으니까. 게다가 이번 강령회는 평소와도 몹시 다를 거라는 베젤의 말에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따라나섰다. 지난번에 겪었던 그 일들에 대해 속임수를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강령술을 믿지도 않으면서 불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강렬한 호기심을 품고 강령회를 향했다.
강령회 장소인 베비트경의 저택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저택의 음습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해가 진 뒤의 어두운 저녁하늘에는 박쥐가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몇 안되는 조명으로 걸려 있는 오래된 양식의 등불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낡아서 부서져 내리는 오래된 석벽 틈으로 파고 올라간 담쟁이 덩굴은 지금 이 장소가 마치 흑마술의 저주에 뒤덮인 듯한 분위기를 꾸며 주었다. 때마침 부는 차갑고 습한 기운은 나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뭐가 튀어나온대도 이상하지 않을 듯 했다.
"어때? 멋진 곳이지?"
베젤은 신이 난다는 투로 나를 잡아 끌었고 나는 반쯤 굳은 표정으로 대충 답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안은 밖의 분위기와는 딴판으로 밝고 따뜻했는데 고풍스러운 장식과 가구들이 실내를 분위기 있게 채우고 있었다. 하인이 외투와 모자를 받아 정리하는 동안 우리는 집 주인인 베비트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베비트경은 퇴역 군인으로 독신이며 이 저택과 영지의 소유자였다. 하얗게 서리내린 머리와 길게 기른 흰 수염사이로 굳게 보이는 주름살이 왠지 완고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표정을 거의 변화시키지 않고 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 알버트씨.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자 어서 들어오세요. 과학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했죠. 심령학에는 아직 입문 단계라 들었습니다. 장담하건데 오늘은 정말 인상깊은 경험을 하시게 될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 저택은 저희 12대 조상님이 세운 것으로 300년이나 된 오래된 곳이지요. 그 와중에 얽힌 전설도 많이 있습니다. 영적 에너지가 충만한 곳이라 심령 현상도 종종 경험할 수 있지요."
"아이반! 차를 부탁하네 손님께서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브랜디도 함께!"
베비트경은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꽤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내가 알던 군인들과는 꽤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전쟁 중에 포탄에 상처를 입어 얼굴 근육을 다쳤고 그 후유증으로 얼굴 표정을 변화시키는데 좀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길게 기른 수염 사이로 흉터 자국이 여기 저기 언듯 보이는 것 같았다. 그에게 전쟁과 군대 이야기 저택의 역사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있을 즈음 알프레드 교수가 도착했다.
알프레드 교수는 악수를 하며 인상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번지르르한 얼굴에 흐르는 느끼한 미소는 왠지 장사꾼 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을 호의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알버트씨. 금요일 밤의 강령회는 처음이시죠? 심령학 권위자로서 말하건데 강령술의 상당수는 사기꾼들의 장난입니다. 하지만 금요일 밤의 강령회는 다르죠. 이건 진짜입니다. 칠이 벗겨지는 금도금 같은 싸구려들과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세월이 가도 변치 않는 순금 같은 겁니다. 시저와 클레오파트라가 만찬을 즐겼던 그 식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빛을 번뜩이는 것처럼 진짜는 변치 않는 법이죠.
"
나는 그에게 강령술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몇 물어보았다. 그는 막힘없이 여러가지 최신 이론들과 실증된 사례들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잠시 후 아셋트 여사와 라이언씨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베비트경은 그 두사람과 각별한 사이인지 두 사람을 두팔벌려 환영했다. 나에게는 그 모습이 오래된 옛 전우를 만나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은 처음 강령회에 참석하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셋트 여사는-아마 점잖은 마녀라는 게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의 손을 잡더니 나에게서 선한 영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아마도 돌아가신 할머니의 영일 것 같다고 말했다. 아셋트 여사는 나중에 따로 기회가 있다면 점을 봐주겠다고 약속했다.
라이언씨는 신문사 편집위원으로 일하는 중년의 신사였고 말쑥한 콧수염 아래로 매력적인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말쑥한 옷차림과 말투로 미루어보건데 여성편력이 굉장히 화려할 것 같았다.
그 둘이 도착하자 만찬이 시작되었다. 송아지 요리에 송어찜이 주 요리였고 여러가지 야채가 곁들여진 스프가 나왔다. 아셋트 여사는 송어찜에 대해 몇가지 주술적인 불평을 했지만 별로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라이언씨가 송아지 요리를 칭찬하자 베비트경은 송아지 요리가 자신의 가전 비법에 따라 만든 것이라며 자랑했다. 내 생각엔 그다지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강령술에 대한 불안함과 기대감으로 흥분하여 연신 브랜디를 들이킬 뿐이었으니 식사가 어디로 들어가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약간 취기가 오르고 배가 부른 뒤에야 나의 불안감은 조금 가라앉았다. 베젤은 그런 나를 보고 키득대며 놀려댔다. 평소보다 바짝 굳어서 얼어있는 모습이 우스웠던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지하실에 마련된 강령회 장소로 이동했다. 창이 없는 지하실 치고는 환기가 잘 되었던지 곰팡이 냄새도 나지 않았고 습하지도 않았다. 벽에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거기 창문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하에 창문을 만들어 봐야 흙 말고 뭐가 보이겠는가. 지하실 한 가운데엔 강령술을 위한 원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엔 무늬없는 수수한 테이블보 그리고 커다란 촛대가 놓여 있었다.
"자. 오늘도 신들린 강령회를 시작해 봅시다."
라이언씨는 뭔가 즐겁다는 듯 두손을 마주치며 짝 소리를 냈다. 베비트경은 아이반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내렸다. 아이반은 사람들이 테이블 주위에 모두 둘러앉은 다음 테이블 가운데의 촛대만 남기고 다른 불을 모두 끄고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지하실이라서 그랬는지 문을 닫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함이 방안을 가득 메웠고 보이는 것은 흔들리는 촛불에 반짝이는 사람들의 눈빛과 얼굴 뿐이었다.
"여러분 손을 모아주십시오." 영매인 아셋트 여사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나도 그들의 행동을 말없이 따라 했다. 내 손은 긴장감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눈을 감고 저를 따라 만트라를 외워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만트라가 무엇인지 몰랐기에 다른 사람들이 읊는 주문을 듣고 비슷하게 흉내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들은 병든 염소가 앓는 것 같은 소리를 천천히, 그리고 엄숙하게 읊었다.
잠시 후 덜컥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 해 실눈을 뜨고 보니 아셋트 여사의 몸이 뻣뻣해 지는 것 같더니 평소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베젤이 내 옆구리를 툭 치더니 귓속말로 이제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는 거라고 속삭였다. 잠시 후 어디선가 바람이 훅 불어오는가 싶더니 아셋트 여사가 입을 열고 말했다.
"지금 영이 이 방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영은 여러분들을 차례 차례 관찰하고 있습니다. 거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영에게 열린 마음으로 속을 보여줘야 합니다. 영을 거부하면 그는 화를 내고 이 곳을 떠날 겁니다. 거부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여십시오. 힘을 빼고 받아들이십시오." 아셋트 여사의 목소리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한없이 깊은 골짜기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 같았다. 나는 천천히 실눈을 뜨고 온 몸에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아까 마신 브랜디의 취기 때문일까. 조금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베비트경에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인이 들어와 강령술을 방해했다고 생각하고 불쾌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를 화난 기색으로 쳐다보자 그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나는 소리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나가라고 그에게 신호를 했다. 그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질문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좀 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이 되어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보입니까?"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날 쳐다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듯 나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지금 제 옆에 있는 이 사람이 들어와 강령술을 방해하려고 하길래 나가달라고 요구했는데 갑자기 제게 와서 귓속말을 하지 뭡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나의 말에 알프레드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옆에 누군가 있단 말입니까?"
"네. 보이지 않으십니까? 여기 사람이 있잖습니까."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다들 경악한 모습이 되었다. 특히 아셋트 여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서 하얀 밀랍으로 빚은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이 처음 온 나를 놀리려서고 그런다고 생각했다. 베젤이라면 이런 못된 장난을 충분히 즐길만한 인물이었다.
나는 내 옆의 남자가 도망치기 전에 그의 팔을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나의 팔은 마치 연기를 잡으려는 것처럼 허공을 움켜쥘 뿐이었다.
"어. 진짜 유령인가요."
나는 순간 멍청해져서는 내 옆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진짜 보이는 모양인가 보네요."
그 남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이 되어 이야기했다.
"네 보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알버트라고 합니다."
나는 정중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상대는 흥미롭다는 듯 악수를 하는 시늉을 했지만 손은 허공을 지날 뿐이었다.
"제 이름은... 아니 별로 말씀드리는 건 의미가 없을테니 X라고 해 두죠. 반갑습니다. X입니다."
"알버트씨. 만약 옆의 유령이 아직도 있다면 그에게 물어봐 주십시오. 그는 어느 시대 어떤 지방에 살던 사람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라이언씨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들으셨나요?"
"물론입니다. 흥미로운 일이군요. 제가 이렇게 여러분의 강령회에 참석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음.. 저는 미국,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50년 후에 살던 사람입니다. 이름은 X라고 해 두죠. 다른 분들도 소개를 해 주시면 감사할 듯 하군요."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사람들은 나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했지만 각자 돌아가며 간단한 자기 소개를 했다.
"그.. 그가 미래에서 온 것이 사실이라면 보어 전쟁의 승패는 어찌 될지 이야기 해 보라고 하시오." 베비트 경이 질문했다.
"들으셨습니까?"
"글쎄요. 저는 역사엔 문외한이라. 영국이 이겼던 것 같은데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영국이 이긴 것 같답니다. 오래된 일이라 잘 모르겠다는군요."
"확실치 않은 거군."
베비트 경은 좀 실망한 투였다.
"미래의 삶은 어떤지 물어봐 주게." 베젤도 한마디 건넸다.
"별로 다를 건 없겠죠. 좀 더 삶이 편리해 졌다거나 몇몇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뿐, 사람들의 삶 그 자체는 여전히 태어나고 배우고 결혼하여 아이 낳고 죽고. 그 연속입니다. 아 여러분 시대에는 아직 없겠지요? 하늘을 나는 기계가 만들어져 대륙과 대륙을 오가고 사람과 짐을 수송하게 되죠."
"삶은 크게 다른 게 없지만 하늘을 나는 기계가 만들어져 대륙과 대륙을 오간다고 합니다."
"터무니 없군!"
"그런 게 있다면 큰 돈을 벌 수 있겠어."
내가 말을 옮기자 사람들은 마치 내가 말하는 것처럼 반응했다. 나는 내가 영매가 된 듯한 느낌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이런 일은 내가 아니라 아셋트 여사의 몫이었을텐데 말이다. 아셋트 여사는 아까만 해도 내가 X를 발견하기 전만 해도 신내림을 받을 듯한 기세였는데 그 후로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럼 X씨에게 내가 어릴적 할머니에게 받은 선물이 뭔지 물어봐 주시겠어요?"
아셋트 여사도 내게 뭔가 질문을 했다.
"그런 개인적인 일은 모릅니다. 저는 유령이 아니거든요."
내가 전해준 말에 아셋트 여사는 발끈 해서 물었다.
"유령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음.. 시간여행객이라 해 두죠. 여기 저기 출몰하는 겁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찰하는 거죠. 참 흥미로운 것은 제가 이렇게 관찰을 시작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만났다는 겁니다."
"시간여행객이라는군요. 그냥 평범한 사람이랍니다."
"유령이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에 영체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거죠?"
알프레드 교수가 따져 물었다.
"물리 실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양자적 흔들림을 이용하면. 아 아직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은 나오지 않았겠군요. 마술같은 과학이라고 해 두죠. 그런 게 있습니다. 원래 이론상으론 관찰만 가능할텐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러다가 역사가 바뀌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제가 말 한마디만 해도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어요."
"뭐라고 이야기 한 건지 전혀 못 알아듣겠습니다. 무슨 마술과학 같은 거라고 하네요."
"마술과학이라니. 그럼 심령학은 어떻게 발전하는지 알려주게."
알프레드교수가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심령학이라. 미래엔 그런 건 남아있지 않습니다. 모든 건 뇌 안에서 일어나는 전기 현상으로 설명되는 편이죠. 유령도 심령현상도 과학적으로 부정되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없다고 밝혀졌다는군요."
"헛소리! 지금 자네는 나를 우롱하는 건가! 지금 눈 앞에 유령이 있다면서 심령학이 허구라니! 이게 무슨 궤변이야!"
알프레드 교수는 벌컥 화를 냈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도 그냥 이 미지의 존재 X가 하는 이야기를 옮기는 것 뿐이니까요."
"여기 있는 펜으로 글을 쓰라고 해 보세요. 모두가 알아볼 수 있게."
아셋트 여사가 테이블 가운데 놓인 펜을 가리키며 제안했다.
"불가능해요. 저는 물리적 에너지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관찰하는 게 고작이라고요."
"안된다네요. 관찰밖에는 못 한대요."
"그렇다면 이렇게 해 보지. 지금 우리는 이 테이블에 앉아 있고 이 방 안에는 다른 누구도 없네. 그러면 내가 의자 뒤로 감춘 손가락이 몇개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이걸 맞춰 보라고 하게. 그가 영체라면 그걸 볼 수 있을테지."
라이언씨가 제안했다. X는 선선히 응했고 천천히 라이언 씨의 뒤로 가더니 큰 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는 V를 그리고 있네. 아니 지금 막 엄지 손가락을 폈어."
내가 그의 말을 옮기자 라이언씨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놀랍군. 정말이야."
"속임수에요!"
아셋트 여사가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이 만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보자고요. 우리는 150년 뒤의 미래에 살았다는 사람의 유령을 만나고 있는 거에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건 타임머신 같은 이야기라고요. 우리는 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명확한 예언을 남길 수 있을 겁니다."
베젤은 조금 흥분하여 외쳤다.
"타임머신? 그 소설 말인가?"
"무슨 이야기죠?"
"과학 소설중에 타임머신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기계를 발명한 사람이 겪는 모험 이야기죠. 몇 년전에 출간되었는데 꽤 재미있습니다."
내가 설명했다. 사실 나는 좀 얼떨떨한 것이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심령사건 같은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미래에서 온 유령이라니. 상상했던 것과는 꽤 다른 전개였다.
"좋아요. 그럼 의미있는 질문을 해 보죠. 우리는 새로운 묵시록의 전달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자, 인류에게 존재하는 큰 사건들을 알려주시겠어요? 그걸 후대에 남기고 싶습니다."
라이언씨의 말에 X는 조금 머뭇거렸다.
"글쎄요. 그게 참.. 쉬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보어전쟁의 승패를 알려준다고 해서 역사가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미래의 역사를 상세히 기술한다면 과연 그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잘 모르겠어요. 천만명이 죽는 전쟁이 있다고 해 보죠. 그 전쟁을 유발할 사람의 이름과 태어난 지역을 제가 안다고 해 봐요. 그럼 그 전쟁에서 이기고 싶은 누군가가 그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을 찾아가 어릴때 암살하거나 유괴하거나 납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 전쟁은 일어나지 않겠죠. 천만명이 죽는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거고 그 와중에 태어나지 않았을 아이들이 태어나고 태어났어야 할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럼 현재에 제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건 자살 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네요.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시험해 보고 싶은 일은 결코 아닙니다."
"음... 알아듣기 힘든 이야깁니다만 X는 미래를 상세히 기술하는 건 미래 그 자체를 바꿀 수 있다면서 좀 부정적인 모습이네요."
"나 원 도움이 안 되는군. 정말로 유령을 만났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해주지 못하다니."
사람들은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그럼 미래 기술 같은 걸 설명해 줄 수는 있겠습니까?"
"뭐 그 정도야 어려울 것 없겠죠. 하지만 기술이라는 것은 그에 기반하는 과학적 수학적 이해가 있어야 습득할 수 있는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에게 그 개념을 이야기해도 실현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죠. 어쩌면 이것도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번 이야기 해 보죠."
라이언씨는 내가 전달한 말을 듣더니 언론인답게 만년필과 수첩을 꺼냈다. 그러더니 나에게 건넸다.
"아무래도 한번 말을 거치는 것보다는 직접 적는 게 효과적일 것 같군."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X를 바라보았다.
"냉장고라는 게 있습니다. 음식을 차게 보관하는 것인데..."
"미래에는 냉장고라는 게 있다는군요."
"죄송합니다만 냉장고는 지금도 개발되어 있습니다."
알프레드 교수가 제동을 걸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음.. 텔레비전 같은 걸 이야기 해 볼까요."
"텔레비전이라고요?"
"네. 영상을 전달하는 기계입니다. 원리는 빛을 받아들여 전기적 신호로 바꾼 다음 다시 전기적 신호로 전달하여 화면에 표시하는 거죠."
"영상을 전달하는 기계라. 흥미롭군요. 어떤 원리죠?"
"원리는.. 촬상소자가. 음.. 광전효과던가. 음.. 저도 원리는 잘 모르겠군요."
X는 미래인 치고는 좀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신사답게 내색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다른 것은 없습니까?"
"이건 획기적인 기술일 겁니다. 제가 알기론 20세기 중반에 개발되는 기술이니까요. 마이크로 웨이브입니다."
"오. 뭔가 미래적인 이름이군요. 마이크로 웨이브라. 어떤 용도이죠?"
"음식을 데우는 겁니다."
"음식을 데우는 거라면 오븐이나 스토브로도 가능한 거 아닙니까?"
"이건 그런 불이나 연기를 내지 않고도 전기의 힘으로 음식물만을 가열하는 기술입니다. 레이더에 쓰이는 초단파를 음식에 쏘이면 열이 발생하는 원리로 만든 거죠."
"레이더라고요?"
"음.. 그건 비행하는 물체를 탐지하기 위한 전파 탐지기입니다. 전파를 쏘아서 되돌아오는 전파를 받아 탐지하는 기술이죠."
"아까 이야기 하신 비행체들이 개발된 뒤에 쓸모를 가질 물건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어때요? 이런 이야기들을 해도 미래가 별로 바뀐 것 같지는 않은가요?"
"네. 현재까지는 그렇군요. 크게 바뀐 건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꽤 실망한 듯 했다. 미래인이 말하는 기술이라는 건 그다지 대단한 게 없어 보인 탓이었다. 기껏 최신 기술이라고 이야기 해주는 것들이 냉장고나 음식 데우는 기계 같은 거라니. 지금도 있는 기술들에서 발달한 게 없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물론 비행기계 같은 것은 놀랍다고 생각했지만 X는 그 원리나 만드는 방법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여러 나라들은 미래에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군요."
"국제정세라. 개략적인 정도로는 정보를 줘도 괜찮을 것 같군요. 십수년 안에 큰 전쟁이 일어납니다. 아주 크죠. 유럽과 관련된 대부분의 나라들이 전쟁을 겪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식민지 경제가 재편됩니다. 그 전쟁 이후에 대공황이 찾아오죠. 공장들이 도산하고 문을 닫고 힘든 시기가 찾아 옵니다. 그 다음에 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두번째로 큰 전쟁이 일어나죠. 동서양이 모두 전쟁을 치릅니다. 그 전쟁의 결과로 영국과 유럽은 쇠락하고 미국과 러시아가 세계의 강대국이 됩니다. 그 뒤로 오랜 시간 강력한 무기에 의한 냉전이 일어나죠."
"냉전이라니. 냉장고가 무기로 쓰이는 건가요?"
"아뇨. 한방에 적의 대도시를 불태워 없앨 수 있는 무서운 무기가 개발되거든요. 그걸 쏘면 상대도 쏠 테고 그래서 서로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대립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끔찍하군요. 그 전쟁을 피할 도리는 없겠습니까?"
"역사를 바꾸는 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죠."
그 이야기 뒤로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화성인이 쳐들어오지는 않나요?"
베젤의 말에 X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 우주전쟁 말이군요. 지금쯤 출간된 소설이려나요. 아직 150년 뒤까지 화성에서 온 외계인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화성에 착륙한 지구인은 있지만 말이에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화성에서 아직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참, 앞으로 60년쯤 뒤엔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도달해 족적을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화성에 가는데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답니다."
"화성에는 화성인은 커녕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60년 뒤엔 인간이 달에 가고 그보다 더 한참 뒤엔 화성에도 사람이 간다는군요."
사람들은 화성인이 없다는 말에 좀 실망한 듯 했다.
"그런데 X씨는 왜 과거를 관찰하고 계신 겁니까?"
나도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
"호기심이죠. 과거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니까요. 명화를 보듯 우리는 과거의 삶을 바라봅니다. 선조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면서 연구하는 거죠. 궁금증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럼 저희가 미래를 볼 수도 있을까요?"
"글쎄요.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의 대화는 매우 이례적인 것인 것 같습니다. 제 이전에도 이런 접촉은 보고된 바가 없거든요. 하지만 SF소설에 등장하는 미래중 상당수는 실재로 이루어지기도 한답니다. 컴퓨터 기술이나 데이터 통신 같은 것은 분명 소설을 뛰어 넘었죠."
"컴퓨터라고요?"
"아.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전기로 동작하는 자동계산기계입니다. 그걸로 미래인들은 거의 모든 일을 하죠. 연애부터 직장의 업무, 약속,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 고치기도 하고 움직이는 영상을 만들기도 하고 비디오 게임을 하기도 하죠.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과 언제나 목소리나 영상 메시지를 주고 받거나 하기도 한답니다. 그걸 손바닥만한 기계에 넣어 움직이기도 하죠."
"뭐라고요?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요. 아까 이야기한 마이크로 웨이브인가 하는 거랑은 워낙 딴판인걸요. 이건 무슨 마술인 겁니까?"
"그런가요. 19세기 말의 기술로는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겠죠."
X는 그렇게 말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 말에 미소지었다.
나는 그가 말한 것들을 열심히 수첩에 적었다. 아마도 라이언씨는 나중에 이 물건들의 이름을 읽느라 골머리를 썩을 것 같았다.
"더 이상 궁금하신 게 없다면 이만 저도 가봐야 할 것 같군요. 접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말입니다. 저도 가서 높으신 분들에게 제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 해드려야 할 것 같네요. 아마도 깜짝 놀라실 겁니다. 혹시 여러분 자녀가 계시다면 오늘 일을 이야기 해 주세요. 일기장에라도 적어두시던가요. 아마 그렇다면 제가 그분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좀 더 설득력 있을 것 같군요."
X는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계단을 걸어올라가 문을 열고는 사라졌다.
"그에게 인도는 어떻게 될지 한번 물어봐 주겠소?"
"갔습니다. 자기도 약속이 있어서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질문하는 베비트경에게 아쉬운 말투로 그가 떠났다고 알려주었다.
"나 원. 정말인지 뭔지 정말 유령에 홀린 것 같군 그래."
"그러게 말입니다. 강령회라고는 하지만 이런 유령이 나타난 건 처음이에요."
"우리가 원래 부르려던 유령은 이런 게 아니었겠죠?"
"물론이에요. 평소 찾아오던 유령은 좀 더 기품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유령이지요. 말도 잘 통하고 말입니다."
"미래에서 온 것 치고는 그래도 꽤 상냥하지 않았나요."
"하지만 알버트씨하고 밖에 이야기 하지 않았잖아요. 아쉬운 일입니다."
"평소에도 아셋트 여사가 강령을 주도하는 거니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분위기는 꽤 색달랐어요."
아셋트 여사를 제외한 사람들은 들떠서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이언씨는 대서특필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 수첩의 내용이 신문기사로 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좀 늦은 시간까지 저택에서 나눈 이야기 뒤로 다음번에도 꼭 찾아와 달라는 초대를 받았지만 나는 당분간 베비트 경의 저택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들이 만난 유령, 아니 미래인과의 조우는 사실 나 때문이었으니까.
과거를 탐사하는 기술이 개발된 것은 수백년 전이다. 수십년 전부터는 과거로 여행하는 기술도 개발되었다. 실제로 그 시대의 사람처럼 그 시대를 겪고 경험하는 놀라운 기술 말이다. 그러나 과거로 여행하려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과거의 역사를 바꿀 목적을 가졌는데 그들이 과거를 바꾸어 버리면 타임 패러독스가 일으났다. 타임패러독스는 시공간 충돌의 결과로 보통은 급격한 에너지 폭발, 혹은 시공붕괴가 일어났다. 시간여행이 발견되기 이전부터 타임패러독스를 막기 위해 존재했던 시공관리국이 그 위험을 막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초기 시간여행에 대해서는 몇 건의 파괴적인 결과가 보고되어 있다.
지금의 시간 여행 기술을 개발한 시공관리국에서는 엄청난 인원을 확충, 기억사고 조작을 한 뒤 주요한 과거로 보냈다. 바로 나처럼. 우리는 과거에서 새로운 육체를 부여받아서 활동하고 있다. 과거로 전해지는 미래의 편린들을 분석하고 그 영향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미래로부터 과거를 탐사하려는 시도중 과거와 접촉하거나 조작하려는 여지가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제일 먼저 우리를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 인과율이 그렇게 짜여져 있었다. 우리에게 적당한 호칭을 말하라면 시간여행 검열관이 적당할 것이다. 평소에 우리는 미래에서 온 존재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지만 그런 조우 상황하에서는 각성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세우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 내가 남긴 메모와 일지, 기록들은 다음 시대를 살아가는 시간 검열관에게 전달되어 미래의 호기심어린 관찰자가 역사를 개변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시공관리국의 관점에서 보면 개변시도를 한 거고 그가 스스로의 타임패러독스를 초래하여 파국을 맞이하기 전에 나는 그의 흔적들을 하나 하나 지울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 장치를 만들 것이다. 과거의 모습을 탐사하는 장치가 시공의 벽을 두드려 과거의 인물과 접촉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걸 방지하는 안전회로를 만들어 넣으면 될 일이다. 아마도 그 일은 시공축의 다른 지점을 담당하는 시공관리인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최초의 시간여행객이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나 있을 테니까.
지금 현재 내가 맡은 걸 예로 들자면 라이언씨의 수첩에 담긴 예언의 내용도, 예언을 들은 사람의 기억도 조작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었다. 일반인의 눈에서 보면 그건 아마 마술처럼 보일 거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가 원래는 완벽한 미래를 기술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해당 시대의 관리인은 책의 내용부터 그의 접촉기억, 그리고 주변인의 기억까지도 모두 창작해서 채워넣었다고 했다. 대단한 창조적 능력임에 틀림없다. 앙골모아의 대왕이 내려온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생각해 냈는지.
시공관리국은 우리를 보냈지만 시공관리국을 만들어 가는 건 역사속의 우리 모두였다. 역사속에서 우리는 시공관리국을 세웠고 그 시공관리국은 우리를 보냈다. 무한한 원처럼 시공관리국은 인류의 역사속에 존재했다. 자잘한 시간 여행의 흔적이 지워진다든가 하는 이야기, 역사의 자정 복원능력 같은 건 모두 시공관리국과 암약하는 직원들의 작품이다.
아마 아무도 모를테지만.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