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온통 검붉은 돌로 만들어진 방이 보였다. 피가 스물 스물 흘러 내릴 것만 같았다. 잠이 깨기를 잠시 기다리자 익숙함이 물씬 풍겨왔다. 간단히 요기를 한 후 종자의 도움 없이 갑옷을 걸쳐 입었다. 처음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차근 차근 끈을 당겨 묶고 순서대로, 좀 더 시간을 들이면 가능한 일이다. 아마 대륙의 다른 기사들이 봤다면 까무라칠 장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곳에는 종자는 데리고 들어올 수 없었다.


중무장한 갑옷을 입고 철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긴 회랑을 걸었다. 회랑의 끝엔 투박하지만 절대 열리지 않을 문이 있었다. 그 옆에 거대한 철퇴를 내려 놓았다. 돌로 깎은 의자 위에 걸터 앉았다. 오늘 쯤이면 문이 열릴 터였다. 정확한 시각은 알 수 없지만 대충 감이 그랬다.


그가 하는 일은 간단했다. 문지기였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오면 돌려보내거나. 통과시키는 것이다. 간단한 시험을 하고. 통과할 수 없는 자들을 돌려보내고, 돌아가지 않으려는 자를 돌려보내고. 돌아갈 수 없는 자들을 주신의 곁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그렇게 쌓인 시체는 목을 잘라서 다시 문 너머로 던져 넣었다.


언제부터 여기 이런 문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왜 이걸 지켜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의 선배들이 죽을때까지 지켜왔던 문이다. 지금은 그냥 성교단의 잊혀진 곳처럼 되어버렸지만 한때는 성교주가 직접 찾아오기도 했던 곳이다. 천년 교단에 이런 곳이 한 두군데이랴.


기다리는 동안 그의 앞에 선배 기사가 와서 섰다. 당연히 환각이다. 선배 기사는 죽은지 오래다. 이런 일을 계속 하다 보면 예전에 알던 사람, 혹은 죽여버린 적, 악마, 천사 뭐 그런 놈들이 다 와서 판을 친다. 실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철퇴로 휘둘러 보는 거다. 맞고 죽으면 실재의 존재이고 아니면 헛것인 거겠지. 저 선배기사는 병에 걸려 죽었고, 그 이후로도 수백번쯤 모습을 보였다. 그중 수십번은 철퇴로 휘둘러 쫒아냈고 이제는 그마저도 귀찮아져 하는대로 놔두고 있었다.


오늘은 문이 열리지 않을 모양이다 생각하는 순간 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굳은 몸을 풀며 철퇴를 휘두르던 기사는 적당히 거리를 잡고 철퇴를 움켜 쥐었다. 문이 열리고 거기에서는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빛나는 외모. 사람의 여자를 닮은 모습. 귀가 좀 길긴 했지만 일단 심사를 할 때 외모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알아봐야 할 것은 신앙심이다.


"두베라툼 이스라타 카메리카!"


기사는 떠듬떠듬 신성어를 읊조렸다. 반응은 바로 찾아왔다.


"캬아아아아악!"


적대적인 반응. 대응은 결정되었다. 기사는 거칠게 한 걸음 내딛으며 철퇴를 휘둘렀다. 체중을 더해 내리친 일격이었다. 바위도 쪼갤만한 그 타격을 상대는 양 손으로 받아내었다. 거칠게 철퇴를 밀쳐 상대와 거리를 벌렸다. 소녀의 모습을 한 그 존재는 저만치 튕겨져 양 손에서 붉은 피를 흘리면서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뭉그러진 손, 깨진 뼈 흘러내리는 피 사이로 붉은 칼날 같은 것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소녀는 소녀의 모습을 버리고 다른 무엇으로 변이하고 있었다. 입은 쭉 찢어지고 거기에선 날선 이빨이 길게 솟아나왔고 눈동자는 세로로 길게 찢어져 사냥감을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볼 것 없었다. 기사는 아낌없이 철퇴를 휘둘렀다.


'변신하는 것을 기다려주는 것은 바보짓이다.'


선배 기사가 늘상 해주던 이야기였다. 그때 선배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막 변신하려는 상대를 49등분 해 버렸다. 검을 쓰던 선배는 묘하게 수를 따졌다. 언제나 끝의 자리가 9로 끝나는 토막으로 상대를 썰어버리는 것에 집착했던 것이다. 손톱 한조각이라도 그가 원하는 수에서 어긋나면 못 견뎌하는 강박증 환자였다. 거기에 나중엔 각각의 토막을 직각이 되도록 잘라내는 것에 집착할 즈음 병에 걸려 죽었다. 아군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신의 뜻대로 된 일이라 생각했다. 적을 죽이는 방법에 몰두하는 건 암만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나 변신하는 상대를 기다려주는 것이 바보짓이라는 점은 한번도 의심해 본 적 없었다.


기사는 신성어를 읊으며 조각난 살점과 덩어리들을 주워 옆에 있는 통에 집어 넣었다. 나중에 화염 마법으로 태우고 찌꺼기는 문에 던져 넣으면 될 일이다. 예전엔 그 일을 맡던 견습기사가 한명 있었지만 문에서 나온 마물에게 당해 죽었다. 이젠 그 혼자 뿐이다. 재수가 좋다면 그가 죽기 전에 성교주의 꿈에 주신이 나타나 문지기를 몇 더 보내라고 이야기 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막 소녀인지 큰 쥐인지 모를 뭔가의 머리를 통에 집어 넣을 때였다. 또다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기사는 피로 끈적해진 철퇴를 다시 틀어쥐었다. 문이 열리고 이번엔 추악한 몰골의 뭔가가 나타났다. 생긴 모습은 머리가 몽땅 빠진 독수리가 몹시 살이 쪘다면 아마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것도 돼지보다 더 살이 쪘다면. 외형으로 보건데 이 놈은 베기보단 때려죽이기에 적합한 놈이었다. 아마 모르진 몰라도 손맛이 끝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절차라는 건 지켜야 했다.


"두베라툼 이스라타 카메리카!"


기사가 신성어를 읊자 그 추악한 입이 열리더니 거친 목소리가 화답했다.


"이스트라 마베크로 오시에레타."


기사는 잠시 그 상태로 굳어 있었다. 그가 묻는 신성어에 제대로 답한 자는 아직 없었다. 하지만 그 신성어를 말한 자는 통과시켜야 했다. 그렇지만 저런 몰골의 괴물이라니! 기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다시 고민했다. 언젠가 이 문을 통과할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천사처럼 생긴 이들도 정말 고귀하고 아름답고 여린 존재들도 그의 철퇴앞에 핏덩이가 되었는데 저런 추악한 자가 신성어를 읊으며 통과하려 하다니. 이 괴물에 비하면 방금전 소녀가 변하려던 모습은 아기 고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기사는 철퇴를 휘두르고픈 욕구를 누르기 위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대머리돼지독수리는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회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나는 인정할 수 없어! 어째서 네가!"


대머리돼지독수리는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알수 없는 비웃음 같은 소리를 흘리고는 사라져 갔다.


기사는 통 안을 들여다 보았다. 거기엔 짓뭉개진 소녀의 시신이 있었다. 변신하려던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환각이었을까? 소녀가 변신하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 환각이었을까? 아니면 때려 죽였기 때문에 변신하려던 마법이 풀렸던 걸까? 외모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가 경험한 바로는 외모도 충분히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었다. 이 소녀가 악마였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저 대머리돼지독수리는 여길 지나가선 안 되었다.


"거기 서라."


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하지만 거기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기사는 자신이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다. 이젠 무언가 지나가는 것을 봐도 그게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확인해 줄 사람도 옆에 없으니. 아니 그 사람이 진짜인지 알게 뭔가. 사라져 버린 걸 보면 환각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럴 거라면 철퇴로 한번 찔러라도 볼걸. 기사는 다시 돌의자에 앉아서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몇 주가 지나 성교주가 찾아왔다. 거창하고 호화스러운 행렬과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호위대와 함께 성교주가 찾아와 홀로 문지기로 일하던 기사를 치하하고 축복을 내린 다음 이 곳의 경계를 더 강화하라며 병력을 배치해 주었다. 성교주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의 노고를 치하하던 순간 기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성교주의 목소리는 일전에 그가 들었던 것이었다.


'이스트라 마베크로 오시에레타.'


꿈에서도 들었음직한 그 추악한 돼지대머리독수리의 음성이었다. 그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져 꼼짝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꿈인가? 환각인가? 마물들을 죽여오던 그의 머리가 드디어 미쳐버린 것인가? 성교주의 입에서 그 괴물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다니? 그는 자신의 방에 두고 온 철퇴를 들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성교주의 머리를 후려치고 자신이 환각을 보는 게 아님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그는 성교주였고 자신은 말단 기사일 뿐이었다.


무릎을 꿇고 예의를 표하는 가운데 성교주의 마차는 멀어져갔다.

그러나 그 가운데 들린 작은 비웃음 같은 소리는 기사의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뒤론 기사는 좀 더 조심스러워졌다. 철퇴를 휘두르기 전에 그는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

변신할때까지 기다려 상대가 괴물임이 확실해 졌을때 철퇴를 휘둘렀다.

그가 죽였어야 할 누군가가 거길 통과한 것처럼 그가 죽이지 말았어야 할 누군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행하는 신성어의 테스트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단 한번 지나간 그 마물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뭘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철퇴를 휘둘렀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 후회는 죽는 순간까지 그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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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