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놈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 지 알기를 바란다 야만인."

제국의 장군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목이 잘렸다. 야만인 전사가 단칼에 장군의 목을 잘라내어 높이 쳐들었다. 야만인들의 함성이 제국 수도에 울려 퍼졌다. 

 

남은 제국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사이로 살려고 도망치는 피난민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제국의 수도는 야만인 병사들 앞에 껍질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난 애벌레처럼 무기력했다. 최종 방어선을 구축한 장교들과 마지막까지 그러모은 방어군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제국엔 제국을 지킬 힘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포위망이 구축되었고약탈과 학살, 도시를 태우는 불길이 밤을 낮처럼 환히 밝혔다.

 

모든 것은 불태워지고 죽음이 모든 곳에 있었다. 피가 물처럼 흘렀고 잘린 시체는 길가에 쓰레기처럼 나뒹굴어 개의 먹잇감이 되었다.

제국의 병사들이 다른 나라의 영토에 피와 살점으로 그리던 풍경이 이곳 수도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황제는 수도를 떠나지 못했다.

수도를 지키는 제국의 황제라는 자존심과 자국 군대에 대해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자만심이 그를 치욕스러운 야만인의 포로로 만들었다. 야만인들을 승리로 이끌고 위대한 제국의 정복자로 만든 영웅이 황제가 앉아 있던 호화스러운 권좌에 올랐다. 영웅은 피로 물든 권좌에 앉는 것을 망설이지는 않았다. 젊고 강인한 그의 손 아래 제국은 무릎 꿇었다.

야만인, 아니 이제 정복자라 불릴 남자는 제국 재상을 감옥에서 불러냈다.

지친 표정의 노인은 며칠 사이에 10년도 더 늙은 것 같았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아직도 일말의 강인함을 읽을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라고 불러 드려야 할까요. 까라드 재상이라고 불러 드려야 할까요."

"네가 나를 외할아버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제 어머니가 황제가 보낸 자객들의 손에 죽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겠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였어."

"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죠. 제가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처럼요."

남자의 목소리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


"넌 모른다. 제국이 무엇과 싸우고 있었는지."

"알아야 하나요?"

"이제는 알아야 할 거다. 제국은 더 이상 없으니까."

재상이 풀어놓은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제국은 천년전부터 악마와 맞서 싸워왔다고 했다. 악마들은 세상에 그들의 종을 만들어 왔고 제국은 그들을 죽이고 무찌르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했다.

"절더러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요."

"황제의 힘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무력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그에게는 성스러운 축복이 깃들어 있다. 악의 일족을 그에게 접촉시킨다면...."

"그만! 악의 일족 같은 이야기는 집어 치우시죠. 더 이상 듣지 않겠습니다."

"제발 내 말을 들어 다오! 이건 사실이다! 왕궁 뒤의 우물에 가면..."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경비병! 이 자를 감옥으로 데려가라!"

재상은 끌려 나가면서도 필사적으로 외쳤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썼다. 악마의 힘이라고? 악의 일족.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니. 피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선함이라는 게 과연 얼마나 고귀한 것이길래 자신의 친 혈족을 죽게 한단 말인가.

그는 거칠게 술을 들이켰다. 제국의 오만함을 꺾기 위해 그는 야만인들을 규합했다. 죽을 고비를 몇 십 몇 백번을 넘겼는지 모른다. 그렇게 무너뜨린 제국이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그렇게 더러운 방식으로 유지되는 세상이라면 없애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별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제국의 황제가 포로로 감금되어 있었다. 점령자인 야만인의 지도자가 갑작스레 찾아왔다는 말에 황제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사.. 살려다오."

"봤나? 황제라는 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도 몸뚱이 하나만 남아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이게 제국의 본모습이다. 학살과 지배를 당연하게 말하지만 겁쟁이에 비겁하고 약하기 짝이 없지."

"나.. 나를 죽이면 안된다. 나는 악마를 막을 유일한 방법이야."

"악마? 진짜 악마를 본 적이 있나?"

"그렇다. 악마를 데려와라. 그럼 내가 악마를 퇴치해 주마. 그럼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다."

"아. 나도 아는 악마가 하나 있긴 해. 그 악마는 말야. 사람을 죽이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관심 있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지. 중요한 건 그것 뿐이야. 정말 악마 같지 않아?"

"그렇구나 그 악마놈을 데려오면 내가 퇴치해 주겠다."

"그 놈은 내 어머니를 죽였지. 자객들을 보냈어. 그리고 내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겁탈하고 잔인하게 살해했다. 야만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줄 수 있는 가장 더러운 치욕과 고통을 주고 죽였다. 참으로 더러운 악마가 아닌가."

황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 이제 그 악마를 어떻게 퇴치할 건지 이야기 해보지. 훌륭하게 퇴치할 수 있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거야."

남자는 황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눈가는 취기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복수를 기다려왔다. 잠깐의 술기운에 해치울 정도로 간단한 복수가 아니었다.

 

 

남자는 별궁을 나와 재상이 말했던 뒷 우물로 향했다. 별이 가득한 하늘을 불빛과 시체 태우는 연기가 좀먹고 있었다.

우물은 뒷뜰 한 가운데 외롭게 놓여 있었다. 커다란 쇠로 된 뚜껑이 덮고 있었는데 주위엔 풀 한포기 자라지 않았다.

남자는 부하들을 시켜 뚜껑을 들어냈다. 건장한 야만인 장정 열명이 달려들어서야 겨우 그것을 들어낼 수 있었다.

 

남자는 어두운 우물 안으로 횃불을 던져 넣었다. 우물 속은 바짝 말라 있었고 횃불은 저 아래 깊이 떨어져 내렸다.

어두운 불빛 속에서 남자는 무언가 보았지만 명확하지 않았다. 남자는 부하의 손에서 횃불을 몇 개 받아 더 던져 넣었다.

 

우물 속을 메우고 있던 것은 무언가의 시체들이었다. 더러는 썩어 있었고 더러는 그냥 남아 있었다. 그건 인간의 형상도 동물의 형상도

아니었다. 악마. 그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남자는 우물가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잠시 얼굴을 그러쥐었다.

"고작 이따위 것들 때문에."

 

남자는 다시 뚜껑을 덮은 뒤에 숙소로 돌아갔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했다. 황제를 처형해야 했으니까.

 

 

그의 야만인들은 다스리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싸우는 것, 죽을때까지 싸우고 싸우는 것 외엔 무엇도 익숙하지 않았다.

 

제사장이 싸우러 가기 전에 한 말처럼 정복 뒤에 찾아올 풍요는 그들을 나태하게 할 것이고 그들이 세운 나라도

머지 않아 무너질 것이다. 모든 것은 먼지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제국의 운명처럼.

악마가 실제로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들의 운명이 있을 것이다.

남자가 그 뒤에 찾아올 미래를 보면서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악마도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황제는 죽을 것이고 제국은 멸망할 것이다. 야만인들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묵묵히, 함성을 지르며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일찌기 제국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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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