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산은 높고 바다는 깊었다. 그 너른 세상을 가득 채운 기인이사들과 협객들, 악당들 그리고 대장부들도 그 속에 잠들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초인이라 불렀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온다.
"이야기에 따르면 오랜 옛날 중원이라 부르던 이 땅에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칼을 쓰고 하늘을 날며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르는
초인들이 협의를 위해 싸우던 시기가 있었다 전해진다. 그들은 내공이라 부르는 힘을 갈고 닦아 몸을 무쇠와 같이 단단히 만들고
바람보다 빠르며 물보다 맑은 정신으로 장생하며 세상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당시에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우(愚)라 하는 황제였는데
그가 무단히 정치를 하자 그중 한 초인이 황궁을 무너뜨리고 황제를 폐해버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런 옛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 속에만 전해지는 것이다. 어찌 사람이 약 하나를 먹는다고 수백년을 살고 하늘을 날며 칼로 바위를 가를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다 이야기 속에만 전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협객들의 의기야 분명 살아 숨쉬는 것이고 그들이 목숨을 걸고
세상을 바꾸려 한 것은 분명 사실이겠지만 그런 그들도 인간일 뿐, 초인이 될 수 없다."
백발 수염의 할아버지는 이제 막 청년이 된 아이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저 멀리에선 청년의 아버지가 애가 타는 듯 애꿏은
갈대만 베어 넘기고 있었다.
'실제로 있었는지 알게 뭐야. 지금도 5영웅 3선녀만 해도 단칼에 사람을 벤다는데.'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고 믿는 듯한 투로구나. 뭐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할애비도 젊었을 적엔 나라 안 팎으로 칼 좀 쓴다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실력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소문만큼 하는 사람은 거의 하나도 없었어. 지금이야 나도 늙어 칼 잡을
힘도 없다마는 그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쳤지, 사실 개인의 힘이란 게 아무리 세도 다수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그때 분명 소림사를 쳐서 발아래 꿀렸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소림사 찾아가서 한번 도전해 보려고요."
"아니야. 소림사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한 깡패놈과 싸웠을 뿐이다. 놈은 교활하고 사람 패고 다니는 깡패였는데 그런 놈이 중일 까닭이 있겠느냐."
"그럼 그게 허풍이었던 겁니까? 그럼 호랑이랑 싸운 건요?"
"사람이 호랑이를 사냥할 수도 있지. 그럼 사냥꾼은 최고의 무사겠느냐? 호랑이가 무섭다 한들 짐승이다. 장수가 병사를 풀어 산을 태워버리면 호랑이인들 살아남겠느냐. 가장 무서운 건 사람 하나가 아니라 사람들이다. 어느 한 초인이 세상을 바꾸길 바라는 건 그냥 사람들의 바램일 뿐이야. 나도 젊었을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호랑이에게 덤빈 적이 있었다만, 그 놈이 몹시 배가 고팠던 게지. 병이 들었든가. 내 도끼에 맞아 죽은 걸 보면 말이다."
"네?? 아버지에게선 검으로 심장을 찔러 죽였다고 들었는데요?"
"아니다. 그건 사실과 달라. 나는 나무를 하려고 도끼질을 하다가 그만 손이 미끄러졌는데 뒤에서 커흥! 소리가 들렸지 뭐냐. 보니 작은 호랑이가 죽어 있었던 거다. 불쌍한 놈 같으니."
청년은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서 들은 할아버지의 전설적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는 재빨리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보았지만 아버지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먼산을 쳐다 볼 뿐이었다.
"그럼 무림 사미四美와의 염문은요? 절수독공을 맨주먹으로 깬 건요? 황궁에 몰래 숨어들어간 건요? 천년영지를 두고 점창파와 벌린 대결은요?
"그런 일은 없었다."
딱 잘라 말하는 할아버지의 말에 아이는 입을 쩍 벌렸다. 이 모든 게 허풍이었단 말인가?
"너도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이제 잘 알겠지? 그러니 하나 믿을 게 못 되는 거다. 당장 네 할아버지의 이야기임에도 이렇게 허황되게 이야기가 만들어져 떠도는데 수백년 전의 수백 수천명의 입을 거친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어설픈 꿈일랑 접어두고 네가 해야 할 일이나 열심히 하려므나."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자를 다독여 주었다.
그러나 청년은 얼이 빠져 있었다. 지금까지 들어온 무림 이야기가 전부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비록 칼을 쓰는 게 그리 익숙치 않다지만 이 넓은 세상 어디엔가는 영물이나 기인이사
하늘을 날고 산을 가르는 신화적 무공의 소유자가 존재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결심을 했다. 옆에서는 아버지가 잔소리를 했지만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 날로 가출했다.
가출을 막을 생각으로 할아버지에게 데려갔던 아버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중원 곳곳을 누비며 무림전설의 허와 실을 판단할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주어진 무림과의 첫 만남은 개방과의 만남이었다.
배가 고파 쓰러져 있던 그에게 거지들이 접근했다.
"야.. 이거 뭐야. 남의 영업구역에서. 이래도 되는 거야?"
"이건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구인데 남의 구역에 있는 거야 썩 꺼지지 못해?"
"사지 멀쩡한 놈이 구걸을 하다니 세상 참 말세로군."
연이어 거지들의 입에서 나올 것으로 보이기엔 어려운 말들이 줄줄 쏟아졌다.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좀 주시오."
"주시오? 아직 배가 덜 고팠군."
거지들은 그를 외면하며 가버렸다.
"쿨럭 쿨럭"
"주십시오."
"뭐야?"
노새를 끌고 길을 걸어가던 엄청나게 좋은 청력을 가진 한 노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뭘 달라는 거야?"
"먹을 거....."
"흠.. 이걸 건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개인에겐 복이나 무림에는 흥이라. 이게 무슨 점괘냐."
노인은 점쟁이인 듯 점을 쳐 보더니 더러운 몰골의 청년을 가볍게 들어 노새 등에 올려 놓았다. 노새가 기분 나쁜지
잠시 투레질을 쳤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노아야. 이 놈을 잘 싣고 가자꾸나. 뭔가 큰 쓸모가 있을 것 같구나."
기이한 풍모의 노인은 청년을 싣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것은 천년 무림 역사를 뒤흔드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실전된 무공들을 다 잊어버리고 막싸움을 가르치는 소림사와
식칼로 등 뒤에서 배때기 쑤시는 법만 연구하는 명문정파들,
한번 얼굴보기도 힘들다는 무림선녀들의 거짓 소문등
수많은 사건들이 그의 앞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시간이 허락한다면 말이다.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