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벰버 레인(November Rain) - 작가 : 광풍선생(violentgale)
글 수 67
스미레는 목덜미에 와닿는 빗방울의 차가운 감촉에 어깨를 움츠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나가던 여우비처럼 몇 방울 흩뿌리던 것이 이제는 제법 빗방울이 굵어졌다. 바닥에 점점이 번져가는 물빛 동그라미들이 점차 늘어나는 만큼이나 스웨터 속으로 스며드는 냉기도 조금씩 강해져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산을 가지고 올 걸…….’
후회스러웠다. 이렇게 바보같을 데가. 스미레는 종종걸음으로 내닫으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선물 상자를 끌어안은 두 손에도 절로 힘이 들어갔다.
사실 오늘 비가 올 것이라는 기상국의 일기예보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기상국의 예보가 맞을 확률은 기껏해야 반반이었고, 선물을 들고가야 하니 손이 모자라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오랜만의 맑은 날씨였기에 우산을 두고 나왔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차가운 늦가을의 비에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온몸을 흠뻑 적시게 되었다. 이제와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이윽고 콘크리트 도로 위를 반쯤 뛰다시피 걷고 있는 스미레의 눈에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맨션이 들어왔다. 어찌나 네온 사인이 화려한지 주변의 번화가 건물들은 평범한 상가처럼 보일 정도였다. 전력 수급 문제 때문에 전기기구의 사용량이 엄격히 제한되는 거대도시 액시스 9에서는 전력의 사용량이야말로 부의 척도였다. 그래서 저렇게 많은 전기 기구들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집의 주인이 대단한 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로 친구인 메이란(梅蘭)의 집이었다. 그녀는, 아니 그녀의 집안은 부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이란의 아버지는 차이나마피아 천련방(天聯邦)의 당주 중 한 명인 흑기당주였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도시들이 연합한 도시연방국가 액시스를 주 거점으로 삼고 있는 천련방은 한 도시에 한 개의 당을 배치해 전담하게 하고 있었고, 그 중 이 도시는 흑기당이 맡고 있었다. 야쿠자인 극동회와 함께 이 도시, 액시스 9의 밤거리를 양분하다시피 하고 있는 천련방의 간부인 만큼 그 재력은 대단했다.
스미레가 메이란과 친구가 된 것은 좀처럼 없는 우연 덕분이었다. 2년전 천련방은 극동회와 조직의 사활을 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당연히 흑기당주의 딸인 그녀 역시 상대 조직의 주요 공격 목표 중 하나였기에 몸을 숨겨야만 했다.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메이란은 심복 부하 몇 명과 함께 오랫동안 단신으로 떠돌았다.
은신처로 도피하고, 그 은신처가 발각되고, 다시 안전한 곳을 찾아 도피하는 생활의 연속. 정말 끔찍이도 긴 시간들이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정말로 간발의 차로 살아남은 적도 있었다고 했다. 사실 한두번 겪은 일도 아니지만, 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아무리 당해도 익숙해 지지가 않더라고, 하고 웃던 메이란의 씁쓸한 미소는 아직도 스미레의 머리 속에 어제 일처럼 남아 있었다.
다섯 번째의 도피처는 스미레의 바로 옆집에 마련되었다. 또래친구라고는 하나도 없이 피냄새를 풀풀 풍기는 경호원들과 함께 도망자와도 같은 생활을 해야 했던 열 여섯 살 소녀와, 오랫동안 어머니 없이 자라 외로움을 많이 타던 열 세 살 소녀는 빠르게 친해졌다.
메이란은 어딘가 달관한 듯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본래 고아로 떠돌다가 당시 중간 보스급이었던 한 사내의 양녀가 되고, 이후 수많은 암투를 거쳐 그 사내가 흑기당주가 되면서 흑기당주의 딸이 되어버린 그녀의 인생 역정은 짧지만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험난한 가시밭길을 뚫고 나온 사람 특유의 자신감과 어른스러움, 그리고 그와 상반되는 치기어린 성미를 다 가지고 있었고 그 점이 스미레의 다정다감한 성격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아니, 그런 식으로라도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스미레와 메이란이 그렇게 급속도로 가까워진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사자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스미레와 메이란은 빠르게 친해졌고, 곧 서로를 둘도 없는 친구로 여기게 되었다. 마치 어렸을 때 헤어진 자매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둘은 서로에게 강한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메이란을 호위하던 사람들은 안전가옥 밖의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그녀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이는 스미레의 아버지가 종식시켰다. 의료 보험이 없는 비시민권자들을 치료하는 무허가 의사, 즉 흔히 말하는 야매 의사였던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부상당한 조직원들을 치료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달 후, 천련방이 차지하고 있던 그 지역의 헤게모니를 극동회가 차지하게 되자 메이란은 여섯 번째 안전가옥으로 떠나야 했다. 급하게 떠나느라 작별의 인사도 하지 못했던 그녀는 언젠가 스미레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겠다는 쪽지를 남겨두고 사라졌다. 그렇게 두 해가 훌쩍 지나가 버리고 며칠 전, 스미레는 자신의 생일 파티에 와 달라는 초대장을 받았다. 바로 그녀로부터 온 것이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초대를 알리는 짤막한 문구와 찾아오는 길만이 그려져 있었지만 스미레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스미레는 메이란의 맨션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커다란 맨션 앞에는 각종 고급차와 바이크로 가득 찬 주차장이 있었고 그 주차장을 높은 담장이 둘러싸고 있었다. 저택 전체를 둘러싼 높은 담장은 정면의 대문과 연결되어 있었고 대문과 요소요소에는 검은 양복을 입고 무전기를 든 험상궂은 사내들이 늘어서서 사방으로 날카로운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스미레는 적잖이 주눅이 들었지만 용기를 내어 입구로 다가갔다.
맨션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경비원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키가 작은 스미레로서는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큰 키였다. 사내의 양복 속은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고 스미레는 메이란과 지냈을 때의 경험으로 그 속에 권총과 회칼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앞에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다가오자 소녀는 왠지 모르게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넌 뭐냐?”
“메이란의 생일 초대를 받고 왔는데요.”
“……그래? 이름은?”
“엔야 스미레에요.”
“초대장을 줘 봐.”
스미레는 사내에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스커트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초대장은 비에 젖어 꼬깃꼬깃 구겨지고 잉크가 번져 있었다. 사내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으며 초대장과 서류철, 그리고 스미레의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는 동안, 다른 경비원 하나가 스미레의 옷 위를 금속 탐지기로 훑고는 곧 OK 사인을 보냈다. 이윽고 첫 번째 사내도 서류철에서 스미레의 이름을 발견했는지 놀랍다는 듯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확실히, 있긴 있군. 좋아. 들어가도 좋다.”
초대장을 확인한 남자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스미레는 초대장을 받아들고 경비원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경비원들이 멀어져가는 스미레를 곁눈질하며 수군거렸다.
“나 원……메이란 아가씨는 참 오지랖도 넓군. 저건 또 어디서 굴러먹던 꼬맹이야. 안전가옥에 외부인을 함부로 들여도 되는건가?”
“요즘은 극동회 놈들도 잠잠하니 별 문제는 없겠지. 그나저나 아무것도 모르는 애 같은데……. 적기당(赤旗黨)의 망나니 놈들한테 봉변이라도 당하는 거 아냐? 메이란 아가씨도 아직 안 나오셨을 텐데…….”
“왜, 가서 보디가드라도 해 주게? 저런 솜털도 안 벗겨진 꼬맹이가 자네 취향인 줄은 몰랐군.”
“아니, 저렇게 예쁜 딸내미가 하나쯤 있으면 인생이 살맛 날 것 같아서 말이야.”
“놀고 있네. 결혼도 안 한 놈이 딸 타령은.”
사내들은 나직히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다. 이미 맨션의 계단을 오르고 있던 스미레는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낯설다, 그리고 정말 시끄럽다… 스미레가 맨션에 들어서서 느낀 감상은 이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현관에서 주위를 살피던 경호원 하나가 현관문을 열어주자마자 귀가 멍멍한 강렬한 비트의 음악이 귀청을 때려왔다. 원래 거실이었을 듯한 넓은 실내의 반쯤은 댄스 플로어로 개조되었는지 여러 남녀가 현란한 조명 아래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머지 반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빽빽이 테이블과 의자들이 들어차 있고 거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앉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천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흐릿한 푸른 조명에 언뜻언뜻 비치는 것으로 보아서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히 술과 안주다. 하지만 그걸 마시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넉넉히 잡아도 스무 살은 안 되었을 아이들이었다. 꽁지머리를 하고 정장을 입은 아이에서부터 펑크족 같은 머리에 옷 같지도 않은 비닐옷으로 몸을 감싼 아이까지 행색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그들에게서는 풍기는 분위기는 비슷했다. 뭔가 위험한 느낌의 아이들이었다.
숨막히는 담배 연기에 기침을 하며 스미레는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러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이들 중 몇몇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 왔다. 불안해진 스미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초대장에는 저녁 일곱시까지 생일 파티에 와달라는 내용 말고는 별다른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도, 메이란도 없었다. 이래서야 힘들게 들고 온 생일 선물을 어디에 내려놓아야 할지, 앉아야 할지 서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몸을 돌려서 나가봐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한편 아이들은 현관 입구에 서서 어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스미레를 쳐다보며 저희들끼리 뭔가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 중의 한 아이가 일어서서 스미레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쭉 찢어진 눈매에 머리를 빨간 색으로 염색한, 성격이 나빠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스미레에게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넌 누구야? 어디 소속이지?”
“……아.”
스미레의 앞에 멈춰선 그녀는 팔짱을 끼고 스미레의 눈을 쏘아보았다. 스미레는 당황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전, 스미레라고 하는데요……. 소속 같은 건 없고, 그냥 메이란의 친구인데…….”
여자는 스미레의 말을 자르고 들었다.
“뭐야. 그러면 방(邦)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얘기야?”
“아……아마도 그런 것 같은데……”
여자의 가는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소프라노 톤의 높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너 나랑 장난하니? 여기가 어디라고 마음대로 들어와? 여기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 같아?”
어느새 시끄러운 음악이 멈춘 실내는 바늘이 떨어지면 쨍 소리가 들릴 것 같을 정도로 조용해져 있었다.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플로어 위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까지 하던 동작을 멈추고 스미레를 일제히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히 호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수십명의 시선이 일제히 와 닿자 노출된 피부가 뾰족한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끔따끔해졌다. 여자의 말이 계속 이어지자 스미레의 얼굴이 점차 파랗게 질려갔다.
“아니, 정말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지? 경비들은 도대체 뭘 하는거야? 이렇게 허술해서야 야쿠자 놈들이 쳐들어와도 어떻게 알겠어! 너 혹시 극동회의 간세(間世 : 첩자) 아냐? 경비! 경비!”
“아, 저, 저기, 그런게 아니라……!”
스미레는 완전히 사고가 정지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실 한쪽에 붙어있던 철문이 벌컥 열어젖혀지고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쓴 덩치 큰 사내 둘이 쿵쿵거리며 걸어나왔다.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난 남자 몇이 아직도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여자의 뒤에 와서 서 있었다. 필사적으로 입을 열어 뭔가 말해보려고 애를 쓰지만 입은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냥 집에 들어온 것 뿐인데 도대체 갑자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지척까지 다가온 경비들이 스미레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려는 찰나였다.
문가에서 올려다보이는 2층 발코니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부서지듯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튀어 나오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젠궈(建國), 진취안(金泉), 멈춰!”
경비들이 흠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스미레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여자도, 스미레에게 적대감을 내뿜고 있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이 한데 모인 그곳에는 검은 레이싱 슈트를 입은 키 큰 소녀가 서 있었다. 시선을 받는데는 익숙한 듯, 자신을 주시하는 수많은 눈동자들에도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지만 스미레는 그녀가 구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바로 메이란이었다.
“아아, 피곤하네 정말. 내가 없으면 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지.”
메이란은 못 살겠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여자치고는 꽤 큰 키임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이 사슴의 그것처럼 가벼웠다. 통통 튀듯이 걸어내려온 그녀는 찢어진 눈을 한 여자 앞에 서서 과장되게 두 손을 모아 보였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게 깔고 연극 대본을 읽는 듯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오오, 그대는 그 이름도 유명한 적기당주의 여식, 적혈사(赤血蛇) 쉬라이(徐來) 소저가 아니시오? 친히 이 누추한 곳까지 왕림하시어 보잘것 없는 이몸의 생일을 빛내어 주시니, 이 천모에게는 가문에 다시없을 영광이오이다.”
말을 마친 그녀는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고개까지 숙여 보였다. 메이란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작게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쉬라이라 불린 여자의 표정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의 눈에는 교활한 빛이 번뜩였다. 쉬라이는 빠르게 쏘아붙였다.
“메이란, 나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야. 안전가옥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 쯤은 너도 잘 알고 있을텐데. 아직 극동회와의 협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제멋대로 굴어도 되는거야? 지금 흑기당이 잘 나간다고 위세 부리는 거니? 돈 없고 힘 없는 다른 사람들은 이제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이거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메이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찡그림은 나타남과 동시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오히려 메이란의 표정은 더더욱 부드러워졌다.
“아이 참, 그런 게 아니라니까. 꼭 필요한 일이 있었어. 가르쳐 줄테니까 귀 좀 대봐.”
그녀는 한결같은 미소를 지으며 쉬라이에게 다가가 쉬라이를 가볍게 포옹했다. 흠칫 놀란 쉬라이는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메이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쉬라이의 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요즘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흑기당의 구역 내에서 약을 파는 놈들이 있다더군. 감히 천련방의 영역 내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들이지.”
“…….”
“그런데 그놈들의 리더가 스킨헤드를 한 내지인(內地人)이라고 하더라고. 이상한 일이잖아? 내지인은 천련방이 꽉 잡고 있으니 내지인이 천련방에 반하는 일을 할 리가 없으니까. 삼족이 몰살당할 각오가 아닌 바에야, 어떻게 그런 미친 짓을 하겠어.”
“……그,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쉬라이는 제법 날카롭게 쏘아붙였지만 이미 그녀의 목소리는 주위에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메이란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 녀석이 어떻게 영업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성심성의껏 물어 봤더니 어느 힘 있는 사람이 돈을 받고 뒤를 봐줬다더군. 아니, 사실은 애인 사이어서 억지로 밀어붙였다나? 이름은 물어 보지 못했지만 적혈당에 있는 어느 높은 아가씨래. 빨간 머리가 매력 포인트라던데? 아, 너도 적혈당 소속이니까 잘 알겠네. 혹시 그런 여자 모르니?”
“……!”
“요즘 간덩이가 부어서 나를 엿 먹이고 싶어졌나본데, 아직 백 년은 일러. 오늘은 친구도 와 있고 하니 특별히 조용히 넘어가 주겠어.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깐죽거려봐. 너랑 네 패거리들까지 싸잡아 단체로 피똥을 싸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러더니 그녀는 쉬라이에게서 몸을 떼어내며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였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달리 방법이 없었다니까. 알았지? 무슨 뜻인지.”
“……으응, 그, 그랬구나. 아……알았어.”
“응. 이해해 줘서 고마워.”
메이란은 쉬라이를 향해 상냥하게 웃었다. 쉬라이는 파랗게 질린 채 자신의 친구들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다른 아이들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었지만 강경했던 쉬라이가 이해한 것을 보고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이윽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잦아들자 메이란은 플로어 위로 뛰어올라가 허리에 손을 탁 얹었다.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씨익 웃은 그녀는 활기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자, 오래들 기다렸어. 이렇게 좋은 날에 집 안에만 쳐박혀 있을 수는 없겠지? 술도 적당히 들어갔겠다, 이제 투기장으로 돌진이다!”
플로어 앞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서 환호성이 퍼져나왔다. 성질이 급한 몇 명은 벌써 현관문을 열고 튀어나갔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자신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그렇지만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멍청한 녀석!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목숨을 걸고 달려야 하는거야! 용기가 없는 자는 천련방에 있을 자격이 없어!”
그녀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조심스럽게 난색을 표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그가 면박을 당한 이후에는 아무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영리하게도 천련방의 권위를 끌어들인 메이란의 말에 반대 의사를 표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메이란은 더 이상 반론을 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외쳤다.
“자 자, 어서 나가자! 빨리 안가면 늦는다고!”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일부는 앞을 다투어, 그리고 일부는 마지 못해 맨션에서 뛰쳐나가 주차되어 있던 바이크에 올라탔다. 바이크의 시동을 거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졌다.
사람들이 거의 다 나가버리자 메이란은 그제서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스미레를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성큼성큼 걸어와 선물 꾸러미를 뺏어 옆의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스미레를 꼭 끌어안았다. 스미레도 꾹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리며 그녀를 마주 안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등을 쓸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를 달래며 메이란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쉬이, 쉬이……. 미안. 무서웠지? 우리 애들이 원래 좀 살벌해. 사실 내가 나와서 너를 맞아야 했는데, 급한 일이 좀 생겼지 뭐야.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어. 아까도 그나마 할 거 대충 다 때려치고 급히 온거야. 미안해. 울지 마. 어어, 울지 말라니까. 얼굴 비비면서 울면 눈 퉁퉁 붓는다? 응?”
스미레는 울다 말고 고개를 들어 킥킥거리며 웃었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웃으니 참으로 볼 만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메이란은 소녀의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닦아내며 피식 웃었다. 스미레가 투정부리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 아까 진짜 놀랐어.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할 줄 몰라서 멍하니 있었더니, 갑자기 그 무섭게 생긴 여자가 와서는 막 뭐라고 하는거야. 사람들이 전부 나만 쳐다보고……. 무서워서 말도 안나오더라.”
“걔가 원래 성격이 좀 그래. 남의 꼬투리 잡아서 어떻게 해볼 수 없을까 안달이거든. 지위도 있는데다가 성깔도 더러우니 최악이라고나 할까. 그건 그렇고…… 세상에, 이게 도대체 얼마만이니. 너는 정말로 하나도 안 변했구나. 내가 너를 얼마나 많이 보고 싶어했는지 알어?”
“으응, 나도 언니가 무지 보고 싶었어. 근데 언니 키 많이 컸다? 그때는 나보다 조금 큰 정도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올려다봐야 하네.”
메이란은 새삼 자신의 키가 스미레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2년동안 도망다닌 것밖에 한 게 없는데 쓸데없이 키만 커지더라. 근데, 이건 뭐야?”
“생일선물.”
“뭔데?”
“초콜릿 케익.”
“오오, 케익이라고?”
메이란은 재빨리 상자의 포장을 뜯어보았다. 빨간색 체리가 돌아가며 박혀 있는 작은 초콜릿 케익이었다. 위에는 하얀 크림의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생일 축하해’라고 씌여 있고, 옆에는 동물 모양의 작은 과자들까지 박혀 있었다. 메이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설마 직접 만든거야?”
“응. 솜씨 발휘 좀 했지. 엣헴.”
“이야아, 이거 정말…….”
그녀는 기가 막힌 탄성을 내지르며 스미레를 힘껏 껴안았다.
“세상에, 너무 귀엽다아!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거니? 난 이런 거 하나도 할 줄 모르는데. 눈물나게 고맙네. 정말 고마워. 다른 사람 절대 안주고 혼자서 맛있게 먹을게. 에그, 이 귀여운 것!”
얼마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그녀의 어깨 쯤에나 겨우 키가 닿는 스미레는 메이란의 가슴에 파묻혀 숨을 쉴수가 없을 정도였다. 소녀는 버둥거리며 숨막힌 비명을 질렀다.
“자, 잠깐, 언니, 나 숨막혀!”
스미레의 짓눌린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메이란은 그녀를 풀어 주었다. 하지만 뺨을 부비고 이마와 입가에 키스를 퍼붓는 등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스미레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완전히 애 취급이네, 하고 스미레는 생각했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메이란 같은 언니가 진짜로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때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던 메이란은 아차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맞다. 너 나랑 어디 좀 가지 않을래?”
“어디로?”
“투기장.”
스미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투기장? 돈 걸고 싸움 구경하는 데?”
“싸움 정도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뭐 대충 맞아.”
“왜?”
“지금 밖에서 거기 가려고 다른 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거든. 더 기다리게 하면 좋을 게 없어. 성질들이 더러워서 기다리는 걸 싫어하니까.”
메이란의 대답에 소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나,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싸우는 건 무서워서 싫거든. 거기 말고 다른 데 가면 안될까?”
“……미안. 나도 사실 그런게 보고 싶어서 가는 건 아냐. 이건 일종의 관례 같은 거라서 어쩔 수가 없어. 말이 좋아서 생일이지, 사실 생일을 핑계삼아 서로 적이 아니란 걸 확인하는 행사나 다름없거든. 그러니 아무리 싫어해도 빠질 수가 없어.
게다가 원래는 일반인을 안전가옥에 들일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원칙이야. 물론 원칙은 원칙일 뿐이고 요즘에 와서 그런 거 생각하고 사는 애들은 얼마 없지만, 어쨌건 저 멍청이들이 그걸 기억해 내고 상벌조사위에 고자질이라도 하면 곤란해져. 그럴 마음을 품지 못하게 만들려면 생각할 틈도 없이 정신없게 마구 몰아붙여 줘야만 해. 저 녀석들은 머릿 속에 하나가 들어가면 그 전의 하나가 빠져나오는 바보들이거든.”
여기까지 말한 메이란은 시계를 보더니 다급하게 스미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빨리 안가면 늦겠다. 시간이 없으니 우선 갔다 와서 이야기하자. 알았지?”
“으응…….”
스미레는 메이란을 따라 맨션 밖으로 나갔다. 쏟아지듯 내리는 빗줄기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메이란은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여러 대의 바이크 중 온통 검은 색으로 도장되어 있는 것을 골라 올라탔다. 잠시 머뭇거리던 스미레는 뒷자리에 옆으로 앉아 메이란의 허리를 붙잡았다.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기다리던 다른 아이들이 그녀를 이채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도대체 누구이길래 감히 메이란과 함께 타냐고 묻는 듯한 눈길이었다.
메이란이 스미레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원래 뒤에 앉는 사람은 앞사람 허리를 잡으면 안되지만, 너는 예외로 해줄게. 빨리 달릴 테니까 꽉 잡아야 해.”
스미레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씩 웃어보이며 오른팔을 높이 들고는 바이크의 소음도 묻어버릴 만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 천련방의 형제들이여, 가자!”
환호성과 함께 한데 모여 있던 바이크들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스미레는 갑자기 온몸이 뒤로 젖혀지는 감각에 자신도 모르게 메이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사물들이 순식간에 뒤로 휙휙 사라져가며 무서운 속도감을 선사했다. 맨다리에 와닿는 비바람이 차가움을 남기고 스쳐지나갔다. 주위를 에워싼 바이크들이 내뿜는 굉음에 세상의 모든 것들이 파묻혀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어둠이 내린 거리를 달리는 바이크의 경광등이 비 속의 네온사인처럼 길게 번져 나갔다.
Everything is clearer now
Life is just a dream, you know
That's never ending.
I'm ascending...
그런의미에서 저도 악플이나 하나 드립니....(뻑)
시스템: 당신은 쓰러졌습니다. 1977의 경험치를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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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싸 렙따. 게일님 감사감사 이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