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벰버 레인(November Rain) - 작가 : 광풍선생(violentgale)
글 수 67
-이 이야기는 황혼의 제국 실제 게임 플레이를 근거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21년 전
-솔 지구사회주의연방 표준력 621년 4월 8일 21시 20분
아크 프라임 성계 근역, 솔 연방 서부방면군 기함 포켓전함 그라프슈페, 전 승무원 수면없이 112시간째 연속작전중
“레이더 컨택! 시에라 3, 본함을 향해 질량체를 발사했습니다! 타입 감마의 자가추진체로 보입니다. 거리 4500, 충돌까지 앞으로 14초! 기만체 잔탄이 없습니다! 충돌까지 10초, 9초, 8초…….”
“긴급방어체계 실시!”
“실드 제네레이터 출력 최대! 미사일 돌입 코스에 방어장 입자를 집중합니다…….”
“전 승무원은 충격에 대비하라. 반복한다, 충격에 대비하라!”
몇초 후, 레트네프의 전투위성에서 발사한 40기가톤급 수폭미사일이 그라프슈페의 우측 하갑판을 직격했다. 엄청난 충격이 1차 방어막을 뚫고 그라프슈페를 뒤흔들었고, 충격은 곧 함교 끝에 위치한 전투상황실까지 관통해 올라갔다. 상황판에 어깨를 부딪히며 나동그라졌던 엠덴 원수는 신음 소리를 눌러 삼키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는 한치의 흔들림도 드러나지 않는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연신 명령을 내렸다.
“각 부서는 피해상황을 보고하라!”
“유압부 정상. 관통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무기통제부 정상. 피해 없습니다!”
“6번 갑판에 화재 발생! 5번 갑판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잡을 수가 없습니다!”
“승무원들을 대피시키고 6번 에어락을 개방하라. 반복한다, 6번 에어락을 개방하라!”
“6번 에어락 개방 완료! 불은 더 이상 번지지 않고 있습니다.”
“화재부에 긴급복구반을 파견한다. 정한철 준장, 복구를 지휘해주게.”
“네, 각하. 6번 갑판에 복구 2팀을 파견하라. 반복한다, 복구 2팀을…….”
“시에라 3은 미나렛급 전투위성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새로운 미사일이 사출기에 올랐습니다. 20초 내에 제 2탄이 발사됩니다!”
“포술장, 사용가능한 화력은?”
“2번 주포가 장전 완료되었습니다. 즉각 발사 가능합니다!”
“좋아. 2번 주포로 시에라 3을 조준한다!”
잠시 후, 32억톤의 중량을 가진 그라프슈페의 하부 포탑이 목표를 향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포구 직경만도 808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의 포신 안에서 포탄에 자장을 거는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포탑의 움직임이 멈추고, 엠덴 원수가 주포 발사의 명령을 내린 그 순간, 그라프슈페가 자랑하는 808미터 71구경장의 3연장 레일건이 불꽃을 뿜었다. 육중한 포탑과 함께 전함 전체가 반동으로 수 키로미터나 밀려났다. 엄청난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한 레일건 포탄 세발이 소행성 사이에 숨어있던 적을 꿰뚫었다. 무식하기로 정평이 난 미나렛급 공격위성의 외부장갑도 808미터 철갑탄의 관통력 앞에서는 휴지조각에 불과했고, 곧 미사일이 유폭된 위성은 눈이 멀 것 같은 대폭발을 일으켰다.
“시에라 3, 침묵했습니다. 반복합니다. 시에라 3 격파 완료.”
오퍼레이터의 침착한 보고에 함 내에 작은 함성이 일었지만 곧 함성은 소리없이 사그라들었다. 첫째는 이런 작은 승리에 고무되기에는 너무 승리에 익숙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대 전체에 벌써 112시간째 1급 전투 경계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곧 전 승무원들이 112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인간인 이상 각성제로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과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표정들이 그들의 상태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또 한번 전투 피해 복구와 재정비의 시간들이 흘러가고 함 내에 피로로 가득한 평정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라프슈페는 다시 본연의 임무인 군사시설 사보타지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주포탑이 1분여의 간격을 두고 번갈아 불을 뿜었고 그때마다 아크 프라임의 조병창에서는 선명한 폭염이 피어올랐다. 근방에 있는 서부방면군의 다른 순양함들이 하고 있는 임무 역시 동일했지만,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라프슈페의 궤도포격은 일반 순양함의 궤도포격과는 규모가 전혀 다른 대폭발을 만들어낸다는 것 정도였다.
포켓전함은 노급전함 제작의 경험이 전무했던 솔의 군사기술진들이 건함기술을 테스트하기 위해 중순양함급의 함체에 노급전함급의 주포를 얹어 만들어낸 실험함이었고, 그렇기에 포켓전함인 그라프슈페의 화력은 여느 중순양함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장점이라고는 오직 그뿐이었다. 원래의 함체와 급이 완전히 다른 주포를 달아버린 대가로 포켓전함은 기동력과 속도의 저하, 주포의 무지막지한 전력 소모를 견디지 못한 제네레이터의 잦은 오버히트, 엄청난 반동으로 인한 조준의 어려움과 함체의 심각한 금속 피로(metal fatigue) 누적 등을 감수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라프슈페는 실험적으로 여덟 척만이 만들어진 포켓전함 중에서도 첫 번째로 만들어진 프로토타입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프슈페가 서부방면군의 기함으로서 훌륭히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오로지 솔 연방 최고의 명장으로 불리우는 총사령관 엠덴 원수의 훌륭한 지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괜찮네. 더 마셨다간 속이 뒤집힐 것 같군.”
부러진 왼팔에 자동치료 키트를 감은 엠덴 원수는 당번병이 내미는 커피를 손을 내밀어 사양하고는 막 복구지휘를 마치고 돌아온 그의 부사령관에게 말을 걸었다. 몹시 피로한지 손바닥으로 눈을 쓸어내리고 있던 정한철 준장은 그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잠시 후 몹시 당황하여 되물었다.
“아……죄, 죄송합니다. 잘 못들었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됐네. 피곤하냐고 물었는데, 바보같은 질문이었군.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해치웠지?”
“네. 지금까지가 구축함 육척, 중순양함 십칠 척, 전투위성 이십 이기…….”
“아니, 본 함 말고 우리 함대 전체를 말하는 거라네. 그리고 주력함급 이상만 보고하게.”
“……금일 1200시의 정기 보고를 종합해 보면 서부방면군은 이번 전역에서 순양함 육만 팔천척, 전투항모 만 이천척을 격파했습니다.”
“육만 이천척이면 아크 프라임 조병창에 있다고 했던 레트네프 순양함의 거의 전부군. 우리측의 피해는?”
“총 구천 칠백척 중 천 오백척을 격침되었고, 보급이나 수리 등의 이유로 가동불가한 병력이 이천 이백척입니다.”
“만 척으로 팔만 척을 날려버렸으니 하나 당 여덟씩 해치운 건가. 게다가 피해는 미미한 수준……. 살아남기만 한다면 역사에 남을 대승리가 되겠군. 살아남기만 한다면 말이야.”
총사령관의 어조에서 비관의 기색을 읽은 정한철 준장은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듣고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시는 겁니까? 방금의 그 발언은 서부집단군 전체의 사기에 직결되는 발언이었습니다.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어……이런. 준장은 정말로 게일 총통이 지원군을 보내 줄 것이라 생각하는가? 역시 젊다는 건 좋은 것이군. 총통은 절대로 지원군을 보내주지 않아. 만약 정말로 지원군을 보내온다면, 그건 총통이 천하에 다시없을 멍청이라는 증거가 되겠지. 어차피 우리는 동부전선을 지탱시키기 위한 사석일 뿐이라네.”
“……사령관 각하께서는 지금 두 가지의 몹시 위험한 발언을 하셨습니다. 위대하신 총통 각하를 모욕한 것이 첫째, 근거 없는 억측으로 유언비어를 유출한 것이 둘째이며 이 모두가 최고형에 처해지기에 충분한 중죄입니다. 전시임을 감안하여 지금까지의 것들은 눈감아 드리겠습니다만 더 이상의 문제 발언을 하시면 저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이런……. 알겠네. 그만 하도록 하지.”
엠덴 원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 부사령관은 신념을 모욕당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상처받은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꽤나 특출난 능력을 지닌 재능있는 젊은이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역시 그는 지구사회주의의 광신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 점에서는 솔 연방의 다른 일반 장병들과도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서부방면군 총사령관 엠덴 원수는 돌처럼 딱딱히 경직되어 있는 그의 부사령관을 바라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한철 준장. 그는 29세의 나이로 장성의 반열에 오른 현 솔 연방의 최연소 준장이었다. 솔 연방 건국 이래로 그보다 빨리 별을 단 사람은 오로지 26세에 장성이 되었던 데미안 그노시스 게일 총통 뿐이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솔 연방의 미래를 이끌 엘리트를 생산하는 ‘강철 자궁’에서 태어나 최고위 군사 교육 코스를 밟고, 솔 최고의 군사 대학인 총통 우주군 사관학교에서 전체 수석의 성적으로, 그것도 월반을 거듭해 졸업을 3년이나 앞당겨가며 졸업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장신의 균형 잡힌 몸에 대리석을 깎아놓은 듯한 외모, 과단성과 치밀함, 그리고 연방과 총통에 대한 극한의 광신성을 두루 지닌 그는 이상적인 솔시스트 -솔과 파시스트의 합성어- 장교의 표상이었다.
그는 18살의 나이에 중위로 임관한 후 최전선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고, 동부전선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워 게일 총통에게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는 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장성의 반열에 올랐고, 장성으로서 배정받은 첫 부임지가 바로 서부방면군의 부사령관 자리였다. 표면적으로 그가 맡은 역할은 총사령관인 엠덴 원수를 보좌하여 작전을 원활히 진행하는 것이었지만 엠덴 원수는 그가 게일 총통에게 받은 밀명이 무엇일지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감시자……라는 거겠지. 맹수를 묶어두기 위한 고삐인 게지.’
엠덴 원수는 커피 대신에 가져다놓은 물을 조금씩 삼키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잠재적인 적을 묶기 위한 고삐. 정한철 중장은 바로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된 감시관이었다.
엠덴 원수를 지칭하는 호칭 중 가장 흔한 것이 바로 ‘마지막 민주주의자’였다. 대원수인 총통을 제외하면 셋 뿐인 원수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파시즘의 압제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민주주의의 마지막 등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고위 장성들 중 유일하게 아직도 솔시스트식 경례 대신 먼 과거의 솔 민주주의 연방식 경례를 고집할 만큼의 골수 민주주의자이기도 했다. 오랜 경험과 연륜, 그리고 탁월한 지휘 능력과 인덕을 지닌 엠덴 원수는 이른바 ‘노르 해방 전쟁’이 시작된 후 자연스럽게 반전-평화운동파의 지도자로 지목되었고 그 또한 그 역할을 사임하지 않았다. 결국 지금의 정세에 있어서 엠덴 원수는 게일 총통의 가장 강력한 정적인 셈이었다.
그랬기에 게일 총통이 엠덴 원수를 서부방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하달한 작전 계획이 ‘평화 민주주의당’측에 알려지자 반전파는 거의 봉기 일보 직전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뼈속까지 철저한 군인이었던 엠덴 원수가 임무는 임무일 뿐이라며 자신의 지지자들을 눌러 앉히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조드에서는 끔찍한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었다. 그만큼 게일 총통이 서부방면군에 내린 명령은 상식 밖의 것이었다. 그는 서부방면군이 단독으로 기습 및 군사시설 파괴를 통해 레트네프 남작군 전체와 맞설 것을 명하고 있었다.
서부방면군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제로 서부방면군은 동부방면군의 십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병력만을 가진 빈 껍데기 군대일 뿐이었다. 집단군 수준의 편제단위인 서부방면군은 최소 몇 개의 군(armee)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군의 하위단위인 일개 군단(korps)에도 못 미치는 병력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바로 서부방면군이었다. 총통은 이런 서부방면군으로 하여금 최소 일곱 배의 적 함대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된 아크 프라임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었다. 총통이 아주 약간의 병력 손실을 감수하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한 사실이었다.
물론 엠덴 원수는 이 작전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엠덴 원수가 여느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우선 그걸 알면서도 레트네프 남작령을 향해 진격했다는 것이며, 다음으로 그 정신나간 작전을 실행에 옮겨 성공시켰다는 것이었다. 전과만으로 치면 서부집단군의 열 세배의 병력을 가진 동부집단군이 동부전선에서 이룬 성과에도 그리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작전이 성공이건 실패이건 간에 서부집단군의 운명이 전멸 뿐이라는 것이 엠덴 원수의 생각이었다. 게일 총통이 약속했던 대로라면 벌써 5일 전에 서부방면군을 구원하기 위한 전자전순양함 독립함대가 이곳에 도착하여 전파교란 작전에 돌입했어야 옳았다. 물론 엠덴 원수는 총통의 약속을 믿을 만큼 바보가 아니었고, 총통 역시 약속을 지킬만큼 바보는 아니었음이 틀림없었다. 레트네프의 중순양함 7만여척이 자신들의 본성계를 수복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돌진해 오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된 지도 벌써 48시간이 넘었다. 총통의 지원함대가 다가오고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부방면군의 장병들 또한 이러한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엠덴 원수의 휘하에서 호흡을 맞춰 온 그들인 만큼 자신들의 지휘관이 얼마나 총통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묵묵히 사지로 향한 까닭은 솔 연방에 대한 충성심과 엠덴 원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오랜 시간안 단단히 다져진 군인 정신 때문이었다. 이 함대에서 총통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이는 사실상 정한철 준장 한 명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총통은 정말이지 독한 사람이군. 전멸할 것이 뻔한 함대에 자신의 사람을 붙여 보내다니. 부하의 목숨 따위야 고려의 대상이 못 된다는 건가. 하지만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시대의 거목으로 자라날 수 있을만한 재목일 터. 이런 역사에 이름도 남지 않을 전장에서 스러지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인재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통신병의 다급한 보고가 엠덴 원수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
“총사령관 각하, 4파섹 전방의 931호 초계순양함으로부터 메시지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통신 주파수는 5번, 긴급 전문의 주파수입니다.”
“……전문을 이쪽으로 연결해 주게.”
“네, 각하.”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그는 빠르게 말을 받으며 앞에 놓인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잠시 후 귀에 가져다 댄 송수화기를 통해 초계순양함이 보낸 메시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메시지를 끝까지 들은 엠덴 원수는 낮은 침음성을 흘리며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표정에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한 정한철 준장 역시 다른 송수화기를 들어 메시지를 듣기 시작했고, 곧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칙……13시 방……에 적함대 출현…… 레이더……지직……칠만 대……반복한…… 칠만……치지직……적의 전파 방해…… 발견……가 퇴각 불…… 최후까지……항전하겠……총통 각하…… 치지지직 ……만세……」
‘드디어 최후의 시간이 되었군.’
엠덴 원수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마침내 닥쳐온 운명을 실감했다. 다시 눈을 부릅뜬 그의 표정에는 결의가 가득 맺혀있었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마지막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전 함대에 알린다. 긴급 전투 태세로! 반복한다, 긴급 전투 태세로! 일급 경계 경보를 발령한다! 통신장, 최대 출력으로 서부방면군 전체에 긴급 경보 명령을 하달하도록.”
“네, 각하. 여기는 그라프슈페, 전 함선에게 알린다. 일급 경계 경보를 발령한다! 반복한다, 일급 경계 경보를…….”
통신장이라 불리운 사내는 영문도 모른 채 기계적으로 사령관의 명령을 하달하고 있었다. 경보 상황을 알리는 사이렌이 함내를 진동시키자 승무원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통신병들은 모든 함대에 결집명령을 전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각 전투부서의 장들은 방비 상황을 점검하며 제각기 필요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모든 함선에게 알린다. 즉각 사보타지 임무를 포기하고 각함의 직속 지휘함의 위치로 집결하라. 각 지휘함은 기함을 중심으로 3식 방어대형을 형성하라.”
“1번 주포, 포격 중지! 궤도폭격을 중지하고 대함용 철갑탄을 장전하라. 뭐? 이미 OBM을 장전해 버렸다고? 멍청한 놈, 아무곳에나 대고 콜드런칭해 버리면 되잖아!”
“입자방어기 재가동 준비! 카운트 20, 19, 18…….”
“사령관 각하, 레트네프 남부방면군이 이곳에 도착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어쩌면 시간을 벌기 위한 레트네프의 방해 공작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빨리 함대를 결집시키면 사보타지 임무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명령의 재고를…….”
그때였다. 정한철 준장이 일급 경계 경보의 재고를 요청한 그 순간, 갑자기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상황판에 붉은 색의 작은 십자가가 떠올랐다. 마치 종말의 예고처럼 불길한 느낌을 주는 그 십자가는, 곧 바이러스가 증식하듯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놀란 탐지장교가 다급한 목소리로 미확인 물체의 탐지를 알렸다.
“레……레이더 컨택! 다수의 시그널이 잡힙니다! 거리 18000, 총 4000기……아니? 9000기……17000기? 숫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단거리 공간도약입니다!”
“……IFF는 어떻게 되는가? 렉스 중위, 어서 파문을 확인하라!”
피아식별을 요구하는 정한철 준장의 목소리에는 짙은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는 아직도 구원군의 도착을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표정을 냉정히 굳힌 엠덴 원수가 그에게 뭔가 말을 건네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렉스 중위라 불렸던 장교가 차가운 현실을 확인해 주었다.
“미확인 함대는 피아식별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파문 분석 결과는 ……적함입니다. 바로크급 중순양함, 레트네프의 주력함입니다!”
“최종 확인합니다. 적함의 수는 총 칠만 이천기, 반복합니다. 칠만 이천기입니다! 적 함대가 본대를 향해 고속 전진하고 있습니다. 이 속도대로라면 7분 내에 본대의 통상교전거리에 들어오게 됩니다!”
“……마침내 올 것이 왔군 그래.”
엠덴 원수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끝으로 함교에는 막막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적함의 접근 경보를 알리는 경고음만이 계속하여 결정을 강요하고 있을 뿐,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채 전면 스크린에 벌떼처럼 빽빽이 떠오른 적의 대함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모두들 짐작하고 있었던 운명이기 때문일까. 일곱 배의 대함대를 눈앞에 두고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며칠 동안이나 수염을 깎지 못해 까칠한 턱을 긁적이며 포술장이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가 어지간히 미움받기는 했나보군요. 저렇게 개떼같이도 몰려올 줄은 몰랐는데요. 아무래도 저걸 다 밀어버리기는 좀 귀찮을 것 같으니, 어디 휴전 협상이라도 해 볼까요?”
엠덴 원수는 웃는 눈으로 포술장을 돌아보았다. 포술장의 태도는 오늘 저녁은 뭘로 먹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처럼 한가해 보이기만 했다. 엠덴 원수가 되물었다.
“그럼, 자네가 한 번 나가보겠나?”
“글쎄요. 저쪽에서 절세미녀 장교라도 하나 나와서 협상하자고 하면 무조건 항복도 하겠습니다만…… 어디 저 곰팡내 나는 지하실 놈들에게 미녀 같은게 있긴 할까요?”
곰팡내 나는 놈들이라는 말은 인구 문제로 지하 생활을 하는 레트네프족을 비꼬는 흔한 욕설 중 하나였다. 함교 여기저기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포술장의 익살에 굳었던 분위기도 조금이나마 누그러져 있었다. 엠덴 원수도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아마 절세미녀 장교는 없을 것 같네만. 그럼 어떻게 하겠나?”
“아아, 그러면 별 수 없죠. 미인이 없다면 여기엔 볼일이 없으니, 일단 지구로 돌아가서 생각해 봐야죠. 따지고보면 우리도 전쟁영웅인데 총통 각하께서 미팅 정도는 주선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미녀가 넘치는 지구로 돌아가야죠.”
“……그래. 지구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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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덴 원수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꼈다. 최후까지 몰린 지금에 와서도 이들은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총통이, 그리고 그 명령을 거부하지 않은 상관이 원망스러울 법도 하지만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써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엠덴 원수는 자신의 부하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벌써 오랫동안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해 왔던 부하들이었다. 자신 하나만을 믿고 묵묵히 이 사지로 함께 들어와준 고마운 사람들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은 솔의 장병들이었다. 원수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통신을 전함대에 연결해 주게.”
그는 통신병에게 말을 건네며 지휘용 마이크를 집어올렸다. 목이 메어 얼른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던 그는, 이윽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여기는 사령관이다.(This is commander.)
우리는 지금 레트네프 함대와의 교전을 앞두고 있다. 제군들의 눈 앞에 적함들이 보일 테니,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적보다 수가 적고, 적잖이 지쳐있으며, 보급 물자도 부족하다. 따라서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르며, 그러면 이것이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빠져나가는데 성공하더라도 더 이상의 교전은 없을 것이라 본다. 따라서 이번이 마지막 전투인 셈이며, 이번 작전의 종결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해 왔다.
싸움이 있었고 휴식이 있었다. 전진과 후퇴가 있었으며 정찰과 전면전이 있었다. 긴 훈련의 시간과 그보다 긴 실전의 시간들도 있었다. 고통스러운 시간들도 있었으며 영광스러운 시간들도 있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함께했고, 또 이겨냈다. 이전에 있었던 많은 작전들처럼 나와 제군들은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 냈다.
이번 작전을 제군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이번 작전은 무리한 부분이 많은 작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작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총통의 권력과 권위에 복종하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불합리한 명령에 굴복해야 할 이유가 될 수 없다. 내가 이 작전을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군인이기 때문이다.
제군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연방에 충성을 맹세한 군인이다. 그리고 이번 작전은 비록 우리들의 희생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솔 연방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작전이었다. 군인은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이다. 나의 희생으로 나의 형제자매, 어버이와 자식들, 그리고 연인과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안전해지고 또 덜 불행해질 수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싸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군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나는 이미 죽을 날이 가까운 늙은이이며, 따라서 인류의 젊은 미래인 제군들에게 나의 신념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군들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제군들은 그것을 묵묵히 감수해 주었다. 그래서 미안하고, 또 고맙다. 그대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들의 용기와 헌신이 없었더라면 이번 작전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제군들이 자랑스럽다. 제군들과 같은 훌륭한 군인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희생(sacrifice) 작전을 종료하는 바이다. 이제, 우리는 지구로 돌아갈 것이다. 설사 부서지고 깨져 혼백만이 남더라도 우리는 돌아가야만 한다. 그곳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고향, 지구에서.”
-솔 지구사회주의 연방력 621년 4월 9일. 본성계를 수복하기 위하여 귀환한 레트네프 함대와의 전투에서 솔 연방 서부방면군은 전멸한다. 서부방면군은 1대 7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분전, 또 다시 적함 1만여척을 격침시키고 최후를 맞는다.
희생(sacrifice) 작전 개시 시점의 서부방면군의 총 함정수는 구천 칠백 삼십사척이었으며, 작전 종료까지 서부방면군은 전투항모 1개 군단, 중순양함 8개 군단을 격멸하여 총 구만 이천 칠백 팔십 이척의 전투함을 격파했다. 그중 서부방면군의 기함이었던 포켓전함 애드미럴 그라프슈페(admiral Graf Spee)는 구축함 팔척, 중순양함 삼십 이척, 전투위성 이십 사기를 격파했다.
후세 전사학자들이 추산해 본 서부연방군의 교환비(아군과 적군의 사상자 비율을 나타냄)는 6 대 58, 즉 1 대 9.67 이었다.
서부/동부 양 전선에서의 협공으로 솔 연방은 서서히 전 우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전력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 시점에서부터 점차 두드러졌다. 서부연방군은 레트네프군을 상대로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사실상 그들이 솔 연방이 서부전선에 배치가능한 전 병력이었으며, 사망한 서부방면군 총사령관 나이트하르트 폰 엠덴 원수가 솔 연방 최고의 명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제 솔 연방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잇다른 후퇴와 패전, 그리고 과도한 전비의 지출로 인한 국내경기의 악화로 솔 연방의 국운은 점점 내리막을 걷게 된다. 또한 엠덴 원수의 사망을 계기로 반전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이 폭발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하면서 데미안 그노시스 게일 총통의 입지도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한편, 서부방면군의 극소수의 생존자 중에는 포켓전함 그라프슈페의 비상용 페이즈시프트(phase-shift) 셔틀을 타고 탈출에 성공한 정한철이라는 이름의 젊은 장성이 있었다. 본래 강력한 친 총통파 세력으로 분류되던 그는 300여년의 냉동 수면 항해 끝에 지구에 도착하고, 후에 그는 솔 연방에서 일어난 혁명의 중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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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제국 게시판 제 2기에서 제가 솔 연방을 플레이했는데, 거기서 적이었던 레트네프의 본성계에 난입하여 가히 히어로급의 킬수를 올린 후덜덜한 순양함이 한 척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소재로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
-지금으로부터 421년 전
-솔 지구사회주의연방 표준력 621년 4월 8일 21시 20분
아크 프라임 성계 근역, 솔 연방 서부방면군 기함 포켓전함 그라프슈페, 전 승무원 수면없이 112시간째 연속작전중
“레이더 컨택! 시에라 3, 본함을 향해 질량체를 발사했습니다! 타입 감마의 자가추진체로 보입니다. 거리 4500, 충돌까지 앞으로 14초! 기만체 잔탄이 없습니다! 충돌까지 10초, 9초, 8초…….”
“긴급방어체계 실시!”
“실드 제네레이터 출력 최대! 미사일 돌입 코스에 방어장 입자를 집중합니다…….”
“전 승무원은 충격에 대비하라. 반복한다, 충격에 대비하라!”
몇초 후, 레트네프의 전투위성에서 발사한 40기가톤급 수폭미사일이 그라프슈페의 우측 하갑판을 직격했다. 엄청난 충격이 1차 방어막을 뚫고 그라프슈페를 뒤흔들었고, 충격은 곧 함교 끝에 위치한 전투상황실까지 관통해 올라갔다. 상황판에 어깨를 부딪히며 나동그라졌던 엠덴 원수는 신음 소리를 눌러 삼키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는 한치의 흔들림도 드러나지 않는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연신 명령을 내렸다.
“각 부서는 피해상황을 보고하라!”
“유압부 정상. 관통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무기통제부 정상. 피해 없습니다!”
“6번 갑판에 화재 발생! 5번 갑판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잡을 수가 없습니다!”
“승무원들을 대피시키고 6번 에어락을 개방하라. 반복한다, 6번 에어락을 개방하라!”
“6번 에어락 개방 완료! 불은 더 이상 번지지 않고 있습니다.”
“화재부에 긴급복구반을 파견한다. 정한철 준장, 복구를 지휘해주게.”
“네, 각하. 6번 갑판에 복구 2팀을 파견하라. 반복한다, 복구 2팀을…….”
“시에라 3은 미나렛급 전투위성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새로운 미사일이 사출기에 올랐습니다. 20초 내에 제 2탄이 발사됩니다!”
“포술장, 사용가능한 화력은?”
“2번 주포가 장전 완료되었습니다. 즉각 발사 가능합니다!”
“좋아. 2번 주포로 시에라 3을 조준한다!”
잠시 후, 32억톤의 중량을 가진 그라프슈페의 하부 포탑이 목표를 향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포구 직경만도 808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의 포신 안에서 포탄에 자장을 거는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포탑의 움직임이 멈추고, 엠덴 원수가 주포 발사의 명령을 내린 그 순간, 그라프슈페가 자랑하는 808미터 71구경장의 3연장 레일건이 불꽃을 뿜었다. 육중한 포탑과 함께 전함 전체가 반동으로 수 키로미터나 밀려났다. 엄청난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한 레일건 포탄 세발이 소행성 사이에 숨어있던 적을 꿰뚫었다. 무식하기로 정평이 난 미나렛급 공격위성의 외부장갑도 808미터 철갑탄의 관통력 앞에서는 휴지조각에 불과했고, 곧 미사일이 유폭된 위성은 눈이 멀 것 같은 대폭발을 일으켰다.
“시에라 3, 침묵했습니다. 반복합니다. 시에라 3 격파 완료.”
오퍼레이터의 침착한 보고에 함 내에 작은 함성이 일었지만 곧 함성은 소리없이 사그라들었다. 첫째는 이런 작은 승리에 고무되기에는 너무 승리에 익숙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대 전체에 벌써 112시간째 1급 전투 경계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곧 전 승무원들이 112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인간인 이상 각성제로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과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표정들이 그들의 상태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또 한번 전투 피해 복구와 재정비의 시간들이 흘러가고 함 내에 피로로 가득한 평정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라프슈페는 다시 본연의 임무인 군사시설 사보타지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주포탑이 1분여의 간격을 두고 번갈아 불을 뿜었고 그때마다 아크 프라임의 조병창에서는 선명한 폭염이 피어올랐다. 근방에 있는 서부방면군의 다른 순양함들이 하고 있는 임무 역시 동일했지만,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라프슈페의 궤도포격은 일반 순양함의 궤도포격과는 규모가 전혀 다른 대폭발을 만들어낸다는 것 정도였다.
포켓전함은 노급전함 제작의 경험이 전무했던 솔의 군사기술진들이 건함기술을 테스트하기 위해 중순양함급의 함체에 노급전함급의 주포를 얹어 만들어낸 실험함이었고, 그렇기에 포켓전함인 그라프슈페의 화력은 여느 중순양함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장점이라고는 오직 그뿐이었다. 원래의 함체와 급이 완전히 다른 주포를 달아버린 대가로 포켓전함은 기동력과 속도의 저하, 주포의 무지막지한 전력 소모를 견디지 못한 제네레이터의 잦은 오버히트, 엄청난 반동으로 인한 조준의 어려움과 함체의 심각한 금속 피로(metal fatigue) 누적 등을 감수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라프슈페는 실험적으로 여덟 척만이 만들어진 포켓전함 중에서도 첫 번째로 만들어진 프로토타입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프슈페가 서부방면군의 기함으로서 훌륭히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오로지 솔 연방 최고의 명장으로 불리우는 총사령관 엠덴 원수의 훌륭한 지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괜찮네. 더 마셨다간 속이 뒤집힐 것 같군.”
부러진 왼팔에 자동치료 키트를 감은 엠덴 원수는 당번병이 내미는 커피를 손을 내밀어 사양하고는 막 복구지휘를 마치고 돌아온 그의 부사령관에게 말을 걸었다. 몹시 피로한지 손바닥으로 눈을 쓸어내리고 있던 정한철 준장은 그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잠시 후 몹시 당황하여 되물었다.
“아……죄, 죄송합니다. 잘 못들었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됐네. 피곤하냐고 물었는데, 바보같은 질문이었군.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해치웠지?”
“네. 지금까지가 구축함 육척, 중순양함 십칠 척, 전투위성 이십 이기…….”
“아니, 본 함 말고 우리 함대 전체를 말하는 거라네. 그리고 주력함급 이상만 보고하게.”
“……금일 1200시의 정기 보고를 종합해 보면 서부방면군은 이번 전역에서 순양함 육만 팔천척, 전투항모 만 이천척을 격파했습니다.”
“육만 이천척이면 아크 프라임 조병창에 있다고 했던 레트네프 순양함의 거의 전부군. 우리측의 피해는?”
“총 구천 칠백척 중 천 오백척을 격침되었고, 보급이나 수리 등의 이유로 가동불가한 병력이 이천 이백척입니다.”
“만 척으로 팔만 척을 날려버렸으니 하나 당 여덟씩 해치운 건가. 게다가 피해는 미미한 수준……. 살아남기만 한다면 역사에 남을 대승리가 되겠군. 살아남기만 한다면 말이야.”
총사령관의 어조에서 비관의 기색을 읽은 정한철 준장은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듣고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시는 겁니까? 방금의 그 발언은 서부집단군 전체의 사기에 직결되는 발언이었습니다.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어……이런. 준장은 정말로 게일 총통이 지원군을 보내 줄 것이라 생각하는가? 역시 젊다는 건 좋은 것이군. 총통은 절대로 지원군을 보내주지 않아. 만약 정말로 지원군을 보내온다면, 그건 총통이 천하에 다시없을 멍청이라는 증거가 되겠지. 어차피 우리는 동부전선을 지탱시키기 위한 사석일 뿐이라네.”
“……사령관 각하께서는 지금 두 가지의 몹시 위험한 발언을 하셨습니다. 위대하신 총통 각하를 모욕한 것이 첫째, 근거 없는 억측으로 유언비어를 유출한 것이 둘째이며 이 모두가 최고형에 처해지기에 충분한 중죄입니다. 전시임을 감안하여 지금까지의 것들은 눈감아 드리겠습니다만 더 이상의 문제 발언을 하시면 저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이런……. 알겠네. 그만 하도록 하지.”
엠덴 원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 부사령관은 신념을 모욕당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상처받은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꽤나 특출난 능력을 지닌 재능있는 젊은이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역시 그는 지구사회주의의 광신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 점에서는 솔 연방의 다른 일반 장병들과도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서부방면군 총사령관 엠덴 원수는 돌처럼 딱딱히 경직되어 있는 그의 부사령관을 바라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한철 준장. 그는 29세의 나이로 장성의 반열에 오른 현 솔 연방의 최연소 준장이었다. 솔 연방 건국 이래로 그보다 빨리 별을 단 사람은 오로지 26세에 장성이 되었던 데미안 그노시스 게일 총통 뿐이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솔 연방의 미래를 이끌 엘리트를 생산하는 ‘강철 자궁’에서 태어나 최고위 군사 교육 코스를 밟고, 솔 최고의 군사 대학인 총통 우주군 사관학교에서 전체 수석의 성적으로, 그것도 월반을 거듭해 졸업을 3년이나 앞당겨가며 졸업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장신의 균형 잡힌 몸에 대리석을 깎아놓은 듯한 외모, 과단성과 치밀함, 그리고 연방과 총통에 대한 극한의 광신성을 두루 지닌 그는 이상적인 솔시스트 -솔과 파시스트의 합성어- 장교의 표상이었다.
그는 18살의 나이에 중위로 임관한 후 최전선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고, 동부전선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워 게일 총통에게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는 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장성의 반열에 올랐고, 장성으로서 배정받은 첫 부임지가 바로 서부방면군의 부사령관 자리였다. 표면적으로 그가 맡은 역할은 총사령관인 엠덴 원수를 보좌하여 작전을 원활히 진행하는 것이었지만 엠덴 원수는 그가 게일 총통에게 받은 밀명이 무엇일지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감시자……라는 거겠지. 맹수를 묶어두기 위한 고삐인 게지.’
엠덴 원수는 커피 대신에 가져다놓은 물을 조금씩 삼키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잠재적인 적을 묶기 위한 고삐. 정한철 중장은 바로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된 감시관이었다.
엠덴 원수를 지칭하는 호칭 중 가장 흔한 것이 바로 ‘마지막 민주주의자’였다. 대원수인 총통을 제외하면 셋 뿐인 원수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파시즘의 압제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민주주의의 마지막 등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고위 장성들 중 유일하게 아직도 솔시스트식 경례 대신 먼 과거의 솔 민주주의 연방식 경례를 고집할 만큼의 골수 민주주의자이기도 했다. 오랜 경험과 연륜, 그리고 탁월한 지휘 능력과 인덕을 지닌 엠덴 원수는 이른바 ‘노르 해방 전쟁’이 시작된 후 자연스럽게 반전-평화운동파의 지도자로 지목되었고 그 또한 그 역할을 사임하지 않았다. 결국 지금의 정세에 있어서 엠덴 원수는 게일 총통의 가장 강력한 정적인 셈이었다.
그랬기에 게일 총통이 엠덴 원수를 서부방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하달한 작전 계획이 ‘평화 민주주의당’측에 알려지자 반전파는 거의 봉기 일보 직전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뼈속까지 철저한 군인이었던 엠덴 원수가 임무는 임무일 뿐이라며 자신의 지지자들을 눌러 앉히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조드에서는 끔찍한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었다. 그만큼 게일 총통이 서부방면군에 내린 명령은 상식 밖의 것이었다. 그는 서부방면군이 단독으로 기습 및 군사시설 파괴를 통해 레트네프 남작군 전체와 맞설 것을 명하고 있었다.
서부방면군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제로 서부방면군은 동부방면군의 십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병력만을 가진 빈 껍데기 군대일 뿐이었다. 집단군 수준의 편제단위인 서부방면군은 최소 몇 개의 군(armee)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군의 하위단위인 일개 군단(korps)에도 못 미치는 병력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바로 서부방면군이었다. 총통은 이런 서부방면군으로 하여금 최소 일곱 배의 적 함대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된 아크 프라임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었다. 총통이 아주 약간의 병력 손실을 감수하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한 사실이었다.
물론 엠덴 원수는 이 작전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엠덴 원수가 여느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우선 그걸 알면서도 레트네프 남작령을 향해 진격했다는 것이며, 다음으로 그 정신나간 작전을 실행에 옮겨 성공시켰다는 것이었다. 전과만으로 치면 서부집단군의 열 세배의 병력을 가진 동부집단군이 동부전선에서 이룬 성과에도 그리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작전이 성공이건 실패이건 간에 서부집단군의 운명이 전멸 뿐이라는 것이 엠덴 원수의 생각이었다. 게일 총통이 약속했던 대로라면 벌써 5일 전에 서부방면군을 구원하기 위한 전자전순양함 독립함대가 이곳에 도착하여 전파교란 작전에 돌입했어야 옳았다. 물론 엠덴 원수는 총통의 약속을 믿을 만큼 바보가 아니었고, 총통 역시 약속을 지킬만큼 바보는 아니었음이 틀림없었다. 레트네프의 중순양함 7만여척이 자신들의 본성계를 수복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돌진해 오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된 지도 벌써 48시간이 넘었다. 총통의 지원함대가 다가오고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부방면군의 장병들 또한 이러한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엠덴 원수의 휘하에서 호흡을 맞춰 온 그들인 만큼 자신들의 지휘관이 얼마나 총통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묵묵히 사지로 향한 까닭은 솔 연방에 대한 충성심과 엠덴 원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오랜 시간안 단단히 다져진 군인 정신 때문이었다. 이 함대에서 총통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이는 사실상 정한철 준장 한 명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총통은 정말이지 독한 사람이군. 전멸할 것이 뻔한 함대에 자신의 사람을 붙여 보내다니. 부하의 목숨 따위야 고려의 대상이 못 된다는 건가. 하지만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시대의 거목으로 자라날 수 있을만한 재목일 터. 이런 역사에 이름도 남지 않을 전장에서 스러지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인재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통신병의 다급한 보고가 엠덴 원수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
“총사령관 각하, 4파섹 전방의 931호 초계순양함으로부터 메시지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통신 주파수는 5번, 긴급 전문의 주파수입니다.”
“……전문을 이쪽으로 연결해 주게.”
“네, 각하.”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그는 빠르게 말을 받으며 앞에 놓인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잠시 후 귀에 가져다 댄 송수화기를 통해 초계순양함이 보낸 메시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메시지를 끝까지 들은 엠덴 원수는 낮은 침음성을 흘리며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표정에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한 정한철 준장 역시 다른 송수화기를 들어 메시지를 듣기 시작했고, 곧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칙……13시 방……에 적함대 출현…… 레이더……지직……칠만 대……반복한…… 칠만……치지직……적의 전파 방해…… 발견……가 퇴각 불…… 최후까지……항전하겠……총통 각하…… 치지지직 ……만세……」
‘드디어 최후의 시간이 되었군.’
엠덴 원수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마침내 닥쳐온 운명을 실감했다. 다시 눈을 부릅뜬 그의 표정에는 결의가 가득 맺혀있었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마지막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전 함대에 알린다. 긴급 전투 태세로! 반복한다, 긴급 전투 태세로! 일급 경계 경보를 발령한다! 통신장, 최대 출력으로 서부방면군 전체에 긴급 경보 명령을 하달하도록.”
“네, 각하. 여기는 그라프슈페, 전 함선에게 알린다. 일급 경계 경보를 발령한다! 반복한다, 일급 경계 경보를…….”
통신장이라 불리운 사내는 영문도 모른 채 기계적으로 사령관의 명령을 하달하고 있었다. 경보 상황을 알리는 사이렌이 함내를 진동시키자 승무원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통신병들은 모든 함대에 결집명령을 전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각 전투부서의 장들은 방비 상황을 점검하며 제각기 필요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모든 함선에게 알린다. 즉각 사보타지 임무를 포기하고 각함의 직속 지휘함의 위치로 집결하라. 각 지휘함은 기함을 중심으로 3식 방어대형을 형성하라.”
“1번 주포, 포격 중지! 궤도폭격을 중지하고 대함용 철갑탄을 장전하라. 뭐? 이미 OBM을 장전해 버렸다고? 멍청한 놈, 아무곳에나 대고 콜드런칭해 버리면 되잖아!”
“입자방어기 재가동 준비! 카운트 20, 19, 18…….”
“사령관 각하, 레트네프 남부방면군이 이곳에 도착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어쩌면 시간을 벌기 위한 레트네프의 방해 공작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빨리 함대를 결집시키면 사보타지 임무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명령의 재고를…….”
그때였다. 정한철 준장이 일급 경계 경보의 재고를 요청한 그 순간, 갑자기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상황판에 붉은 색의 작은 십자가가 떠올랐다. 마치 종말의 예고처럼 불길한 느낌을 주는 그 십자가는, 곧 바이러스가 증식하듯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놀란 탐지장교가 다급한 목소리로 미확인 물체의 탐지를 알렸다.
“레……레이더 컨택! 다수의 시그널이 잡힙니다! 거리 18000, 총 4000기……아니? 9000기……17000기? 숫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단거리 공간도약입니다!”
“……IFF는 어떻게 되는가? 렉스 중위, 어서 파문을 확인하라!”
피아식별을 요구하는 정한철 준장의 목소리에는 짙은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는 아직도 구원군의 도착을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표정을 냉정히 굳힌 엠덴 원수가 그에게 뭔가 말을 건네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렉스 중위라 불렸던 장교가 차가운 현실을 확인해 주었다.
“미확인 함대는 피아식별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파문 분석 결과는 ……적함입니다. 바로크급 중순양함, 레트네프의 주력함입니다!”
“최종 확인합니다. 적함의 수는 총 칠만 이천기, 반복합니다. 칠만 이천기입니다! 적 함대가 본대를 향해 고속 전진하고 있습니다. 이 속도대로라면 7분 내에 본대의 통상교전거리에 들어오게 됩니다!”
“……마침내 올 것이 왔군 그래.”
엠덴 원수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끝으로 함교에는 막막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적함의 접근 경보를 알리는 경고음만이 계속하여 결정을 강요하고 있을 뿐,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채 전면 스크린에 벌떼처럼 빽빽이 떠오른 적의 대함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모두들 짐작하고 있었던 운명이기 때문일까. 일곱 배의 대함대를 눈앞에 두고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며칠 동안이나 수염을 깎지 못해 까칠한 턱을 긁적이며 포술장이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가 어지간히 미움받기는 했나보군요. 저렇게 개떼같이도 몰려올 줄은 몰랐는데요. 아무래도 저걸 다 밀어버리기는 좀 귀찮을 것 같으니, 어디 휴전 협상이라도 해 볼까요?”
엠덴 원수는 웃는 눈으로 포술장을 돌아보았다. 포술장의 태도는 오늘 저녁은 뭘로 먹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처럼 한가해 보이기만 했다. 엠덴 원수가 되물었다.
“그럼, 자네가 한 번 나가보겠나?”
“글쎄요. 저쪽에서 절세미녀 장교라도 하나 나와서 협상하자고 하면 무조건 항복도 하겠습니다만…… 어디 저 곰팡내 나는 지하실 놈들에게 미녀 같은게 있긴 할까요?”
곰팡내 나는 놈들이라는 말은 인구 문제로 지하 생활을 하는 레트네프족을 비꼬는 흔한 욕설 중 하나였다. 함교 여기저기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포술장의 익살에 굳었던 분위기도 조금이나마 누그러져 있었다. 엠덴 원수도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아마 절세미녀 장교는 없을 것 같네만. 그럼 어떻게 하겠나?”
“아아, 그러면 별 수 없죠. 미인이 없다면 여기엔 볼일이 없으니, 일단 지구로 돌아가서 생각해 봐야죠. 따지고보면 우리도 전쟁영웅인데 총통 각하께서 미팅 정도는 주선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미녀가 넘치는 지구로 돌아가야죠.”
“……그래. 지구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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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덴 원수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꼈다. 최후까지 몰린 지금에 와서도 이들은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총통이, 그리고 그 명령을 거부하지 않은 상관이 원망스러울 법도 하지만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써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엠덴 원수는 자신의 부하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벌써 오랫동안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해 왔던 부하들이었다. 자신 하나만을 믿고 묵묵히 이 사지로 함께 들어와준 고마운 사람들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은 솔의 장병들이었다. 원수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통신을 전함대에 연결해 주게.”
그는 통신병에게 말을 건네며 지휘용 마이크를 집어올렸다. 목이 메어 얼른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던 그는, 이윽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여기는 사령관이다.(This is commander.)
우리는 지금 레트네프 함대와의 교전을 앞두고 있다. 제군들의 눈 앞에 적함들이 보일 테니,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적보다 수가 적고, 적잖이 지쳐있으며, 보급 물자도 부족하다. 따라서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르며, 그러면 이것이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빠져나가는데 성공하더라도 더 이상의 교전은 없을 것이라 본다. 따라서 이번이 마지막 전투인 셈이며, 이번 작전의 종결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해 왔다.
싸움이 있었고 휴식이 있었다. 전진과 후퇴가 있었으며 정찰과 전면전이 있었다. 긴 훈련의 시간과 그보다 긴 실전의 시간들도 있었다. 고통스러운 시간들도 있었으며 영광스러운 시간들도 있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함께했고, 또 이겨냈다. 이전에 있었던 많은 작전들처럼 나와 제군들은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 냈다.
이번 작전을 제군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이번 작전은 무리한 부분이 많은 작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작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총통의 권력과 권위에 복종하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불합리한 명령에 굴복해야 할 이유가 될 수 없다. 내가 이 작전을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군인이기 때문이다.
제군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연방에 충성을 맹세한 군인이다. 그리고 이번 작전은 비록 우리들의 희생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솔 연방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작전이었다. 군인은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이다. 나의 희생으로 나의 형제자매, 어버이와 자식들, 그리고 연인과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안전해지고 또 덜 불행해질 수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싸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군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나는 이미 죽을 날이 가까운 늙은이이며, 따라서 인류의 젊은 미래인 제군들에게 나의 신념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군들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제군들은 그것을 묵묵히 감수해 주었다. 그래서 미안하고, 또 고맙다. 그대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들의 용기와 헌신이 없었더라면 이번 작전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제군들이 자랑스럽다. 제군들과 같은 훌륭한 군인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희생(sacrifice) 작전을 종료하는 바이다. 이제, 우리는 지구로 돌아갈 것이다. 설사 부서지고 깨져 혼백만이 남더라도 우리는 돌아가야만 한다. 그곳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고향, 지구에서.”
-솔 지구사회주의 연방력 621년 4월 9일. 본성계를 수복하기 위하여 귀환한 레트네프 함대와의 전투에서 솔 연방 서부방면군은 전멸한다. 서부방면군은 1대 7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분전, 또 다시 적함 1만여척을 격침시키고 최후를 맞는다.
희생(sacrifice) 작전 개시 시점의 서부방면군의 총 함정수는 구천 칠백 삼십사척이었으며, 작전 종료까지 서부방면군은 전투항모 1개 군단, 중순양함 8개 군단을 격멸하여 총 구만 이천 칠백 팔십 이척의 전투함을 격파했다. 그중 서부방면군의 기함이었던 포켓전함 애드미럴 그라프슈페(admiral Graf Spee)는 구축함 팔척, 중순양함 삼십 이척, 전투위성 이십 사기를 격파했다.
후세 전사학자들이 추산해 본 서부연방군의 교환비(아군과 적군의 사상자 비율을 나타냄)는 6 대 58, 즉 1 대 9.67 이었다.
서부/동부 양 전선에서의 협공으로 솔 연방은 서서히 전 우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전력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 시점에서부터 점차 두드러졌다. 서부연방군은 레트네프군을 상대로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사실상 그들이 솔 연방이 서부전선에 배치가능한 전 병력이었으며, 사망한 서부방면군 총사령관 나이트하르트 폰 엠덴 원수가 솔 연방 최고의 명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제 솔 연방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잇다른 후퇴와 패전, 그리고 과도한 전비의 지출로 인한 국내경기의 악화로 솔 연방의 국운은 점점 내리막을 걷게 된다. 또한 엠덴 원수의 사망을 계기로 반전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이 폭발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하면서 데미안 그노시스 게일 총통의 입지도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한편, 서부방면군의 극소수의 생존자 중에는 포켓전함 그라프슈페의 비상용 페이즈시프트(phase-shift) 셔틀을 타고 탈출에 성공한 정한철이라는 이름의 젊은 장성이 있었다. 본래 강력한 친 총통파 세력으로 분류되던 그는 300여년의 냉동 수면 항해 끝에 지구에 도착하고, 후에 그는 솔 연방에서 일어난 혁명의 중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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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제국 게시판 제 2기에서 제가 솔 연방을 플레이했는데, 거기서 적이었던 레트네프의 본성계에 난입하여 가히 히어로급의 킬수를 올린 후덜덜한 순양함이 한 척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소재로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
Everything is clearer now
Life is just a dream, you know
That's never ending.
I'm ascen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