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벰버 레인(November Rain) - 작가 : 광풍선생(violentgale)
글 수 67
-솔 지구사회주의연방 표준력 618년 9월 13일 14시 40분
신 모스크바시 상공 520km 궤도 엘리베이터 내 총통 집무실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렸다. 붉은 정장을 입은 미모의 여성이 문틈으로 몸을 드러내자 좌중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잠시 얼굴을 붉힌 여비서는 깨끗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총통 각하, 10분 남았습니다.”
“들었나? 10분이다. 모두들 그 안에 끝낼 수 있도록. 비서실장, 시작해.”
“네, 각하. 메카톨 렉스 의회의 결정입니다. 노동 인력 정책 안건이 아슬아슬한 표차로 의결되었습니다. 결과는 확정적입니다. 이제 어떠한 종족도 노동 인력 정책을 폐기할 수 없습니다. 상임이사국 크샤 왕국은 협박에 못 이겨 이 안건을 의회에 강제 상정했을뿐더러, 투표에서 기권했습니다.”
이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은 솔 연방의 수도인 신 모스크바 상공 520킬로미터 부근이었다. 지구의 핵을 기준으로 한 공간의 z축 좌표는 계속 변화하고 있었기에 명확히 단정지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이 대화의 공간이 엄청난 속도로 수직 하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총통 전용 13번 궤도 엘리베이터의 중심부에 위치한 총통 집무실이었다. 최고급의 대리석으로 마감된 너른 방 안에는 역시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비싼 베푸트산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고, 그 테두리를 따라 십여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5세기 전, 게일 소장은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의 정체를 민주주의에서 국가사회주의로 변경했다. 그 이후로 오랜 기간동안 군정일치를 추구해온 군사공동체 솔 연방이었기에 모든 정부의 요인들은 관료인 동시에 군인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으로 정부의 핵심인사들이 밀집해 있는 이 집무실에 모인 별의 개수는 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솔 연방의 사병이라면 입을 쩍 벌리게 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이곳에 모인 장성들의 계급장에 붙은 별들을 모조리 떼어내면 백금의 별이 30개쯤 달린 모빌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총통 친위대의 병사들은 ‘총통의 궤도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면 그건 우주가 하나 날아가는 꼴’이라고 농담삼아 말하곤 했는데, 사실 그것은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만큼 이 방에 모인 사람들의 영향력은 가히 우주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 그 기라성 같은 인물들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핏기가 전혀 없는 창백한 피부에 마찬가지로 색소가 결핍된 하얀 백발, 그리고 혈관이 그대로 비치는 붉은 눈동자와 귀족적이고 오만한 눈초리를 지닌 사내였다. 장신의 날렵한 몸을 솔 연방에서 단 한 사람만이 입을 수 있는 총통의 예복으로 감싼 그는, 솔의 80억 장병과 9000억 시민들을 대표하는 자였다.
솔 지구사회주의연방 총통 데미안 그노시스 게일. 악마적인 카리스마와 깊은 심계(審計),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돌적인 추진력 때문에 그의 적들에게는 다스 게일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오래 전에 개정한 헌법에 따르면 총통은 종신직이었다. 그래서 독재자는 벌써 600여년 동안이나 총통의 지위에서 그 무자비한 철권을 휘둘러 왔다. 게일의 육체는 청년의 그것처럼 젊고 탄탄했다. 하지만 멜라닌이 전혀 없는 그의 피부와 머리카락이야말로 수십 번의 유전자 재복원 과정의 부작용에서 비롯된, 치유 불가능한 세월의 흔적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독재자는 비서실장의 보고를 주의깊게 경청하고 있었다. 보고가 끝나자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잘 되었군. 지난 반세기간에 걸쳐 실시했던 공작이 드디어 빛을 본 것인가. 이제는 그 누구도 솔의 앞길을 막아설 수 없다. 안보부장, 수고해 주었네.”
“아닙니다, 각하. 총통 각하의 지원이 없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치사는 그만두게. 이건 분명한 자네의 공적이야. 곧 보훈국의 심사가 있을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한데 납치해온 크샤 국왕의 장자는 어디에 있는가?”
안보부장이라 불린 덩치 큰 사내는 험상궂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리남의 특수 정치범 수용소에 있습니다. 워낙에 정신 방어가 강한 탓에 마인드 컨트롤이 잘 먹히지 않아서 아리남의 정신파 통제 모듈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정신력이 강한 크샤인인 데다가 그 중에서도 유별날 정도로 자기제어력이 강해서, 인간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비파괴 제어기는 전혀 소용이 없는 수준입니다.”
“과연. 범의 새끼는 고양이가 될 수 없는가. 스탈린 국왕의 아들답군.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더더욱 그냥 놓아둘 수 없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세뇌시켜.”
“하……하지만 남은 것은 향정신성 약품 사용과 나노머신 이식밖에 없고, 그건 콴 협약에 의해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상관없어. 겉보기에만 멀쩡해 보이면 돼. 뭘 사용하던 상관하지 않을 테니 나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도록. 그보다도 채찍이 효력을 냈으니 당근이 필요하겠지. 어느 정도의 보상을 생각하고 있나?”
사내는 눈앞에 떠 있는 손바닥만한 홀로그램 노트를 쿡쿡 찍으며 말을 이었다.
“안보부의 비자금을 총동원하면 대략 십구조 팔천억 크레딧 정도를 마련할 수 있고, 그래서 그 정도 선에서 예상하고 있습니다.”
“너무 적어. 그 두 배로 한다.”
“그건…… 너무 많습니다. 국방부의 한 세기 예산과 맞먹는 수준인데, 무엇보다도 재원 조달이 불가능합니다.”
“상관없어. 부족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거기까지는 신경쓸 필요 없다. 이정도의 테러를 저질러 놓고 수습을 못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크샤측에 분명히 알려라. 사십조 크레딧이다. 알겠나?”
“……네, 각하. 알겠습니다.”
사내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총통의 시선이 그에게서 떨어져 옆의 사내에게 옮겨 갔다. 검은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발라 넘긴 동양계의 젊은 남자였다. 총통의 시선에서 무언의 명령을 감지한 그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정보부에서 포착한 각국간의 자원 및 카드 교류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번 의회 개회 기간 동안에 졸나르는 모든 자금과 카드를 노르에게 넘겼습니다.”
“……노르에게라고? 하칸이나 레트네프에게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흥, 웃기지도 않는군. 솔을 공격하고 싶다면 차라리 강성한 레트네프나 하칸을 지원할 것이지, 곧 망할 노르에게 모든 걸 걸다니. 멸망해가는 종족간의 동병상련인가. 계속해 봐.”
“또…… 노르는 그렇게 받은 카드를 포함하여 총 세장의 행동 카드를 사용했습니다. 기술적 약진과, 그것을 흉내낸 천재적 영감과, 이번 노동 정책 안건에 반대표를 행사하기 위한 환상적인 웅변입니다. 물론 환상적인 웅변을 통한 . 노르에게 남은 카드는 원래 가지고 있던 세금 환급과 졸나르에게 받은 숙련된 후퇴, 그리고 사기 진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 한 장은 확인중입니다.”
게일 총통은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노르의 갑각류들은 뇌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모양이군. 국운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또다시 기술 개발이라니, 그 대책없는 느긋함이 부러울 정도군. 게다가 천재적 영감을 겨우 그런 곳에 사용했단 말인가? 하다못해 신호 방해나 구세주 카드를 복사하여 어떻게든 다음 턴을 기약해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거부권을 복사해 노동 안건을 파기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한 방법이었을텐데. 그러고보니 민간 방위도 있었군.”
“총통 각하, 이제 5분 남았습니다.”
예의 여비서가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왠지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총통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결 안심한 표정이 되어 집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독재자는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결국 퀴나라의 버그들은 최후의 기회마저 놓쳐버리는군. 이제는 신경쓸 필요도 없다. 다른 정보는 없나?“
“노르가 하칸에게 카드 한 장을 보냈고 레트네프에게 5조 크레딧에 카드 한 장을 구매했습니다. 노르가 하칸에게 보낸 카드는 졸나르에게 받아온 풍년 카드로 보이며 레트네프에게 받은 카드는 사기 진작으로 추정됩니다. 사기 진작은 솔과의 결전에 대비하기 위함인 듯 합니다. 하칸과 레트네프는 직접적인 적대 의사를 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반 솔 동맹의 형성은 이미 명약관화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런 헐값에 카드를 넘기다니……. 레트네프는 노르가 솔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고 멸망해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군.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라도 해 보자는 건가. 노르와 하칸의 공조도 단단한 것 같고, 크샤의 의도는 오리무중……. 이제는 사면초가로군.”
총통의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은하 최강의 솔 연방이지만 그렇기에 다른 종족들의 질시를 한몸에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솔의 무서운 성장을 경계하는 다른 종족들의 연합은 이미 통제 가능한 수준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애써 뚫어 놓았던 외교 루트는 모조리 단절되고, 어떠한 메시지를 보내 보아도 차가운 무반응 뿐…….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솔의 멸망뿐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당해 줄성 싶으냐.’
잠시 침울하게 변했던 총통의 두 눈에 다시 차가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될 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룀, 연방의 재정 상태에 대해 보고하도록.”
“네, 각하. 노동 인력 안건의 재의결로 인해 솔 연방의 GRP(Gross Racial Product)는 지난 세기의 2배가 넘는 엄청난 양적 성장을 거두었습니다. 현재 솔 연방의 GRP는 크샤 왕국을 제외한 모든 종족들의 GRP를 합친 것보다도 높습니다. 10퍼센트 선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은 현재 1퍼센트 미만에 머물러 있으며, 기업 일선에서는 노동력이 모자라 기피 대상이던 복제 인력마저 대거 채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좋은 소식이군. 예산 배정은 어떻게 되었나?”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각하. 필수예산을 제외하면 과학기술비에 25조, 국방비에 42조가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국방비는 대부분이 건함비용으로 투입되었으며 전투순양함을 중심으로 한 5만척 수준의 함대가 건조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우주해병대 3개 집단군이 신설될 예정입니다.”
“5개 함대라…… 그정도면 아쉬운대로 써먹을 수는 있겠지. 생산완료된 노급함대의 진수식은 연기된 걸로 아는데, 맞는가?”
“네, 각하. 노르 진공작전의 개시일시가 앞당겨짐에 따라 정규 함대에의 취임은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대신 제 21함대에 임시 편입되어 예비대로 활용될 예정입니다.”
“에른스트 대장의 입이 찢어지겠군. 무려 노급함 이만척을 예비대로 쓰다니. 노르 방면에서 뭔가 이상징후가 발견되는 것은 없나?”
“없습니다, 각하.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몸이 짓눌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하강과정을 거의 끝마친 궤도 엘리베이터가 최종 감속 코스에 들어간 것이다. 집무실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쿵, 하는 작은 충격음과 함께 진동이 멈추었다. 드디어 궤도 엘리베이터가 신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이었다.
또각거리는 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비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각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이미 군악대가 연맹군가가 연주중입니다. 시민들이 각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리 식을 시작하지 않으면…….”
독재자는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알았어, 알았다고. 걱정도 팔자군. 남은 부분은 추후에 서면으로 보고하도록 하고, 이제 연단으로 간다. 모두들 시민들에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한다. 가자.”
총통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도 총통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무실에서 나와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총통 전용 궤도 엘리베이터의 출구 중 하나는 총통 사령부 ‘독수리 둥지’의 연단에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군화를 신은 그들의 빠른 발걸음이 고딕 양식의 통로를 쩌렁쩌렁 울렸다. 통로에는 고대 독일 제3 제국의 의장을 갖춘 의체화 병사들이 일정 간격으로 늘어서 부동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총통이 그들 사이로 지나가자 검은 연방 제복에 프리쯔 헬멧을 눌러쓴 그들이 차례차례 오른팔을 들어올리며 군화의 뒷굽을 맞부딪혔다. 병사들이 전면만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총통 또한 정면만을 응시하며 걸었다.
출구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철문에 조각된 강철의 독수리가 총통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철문의 미세한 틈을 통해 새어들어오는 연방군가의 울림이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다급한 목소리가 그를 잡아세웠다.
“잠깐만요!”
걸음을 멈춘 총통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정장을 입은 여비서가 뛰는 것에 가까운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이힐에 저렇게 좁은 치마를 입고도 잘도 움직이는군, 하는 시답잖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윽고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말을 건넸다.
“이걸, 빠뜨리셨어요.”
그녀가 들어보인 것은 낡고 때가 묻은 은색의 훈장이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솔이 아직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고 그가 겨우 중위에 불과하던 햇병아리 시절에 용맹과 헌신의 증거로 받은 것이었다. 그에게는 다 세지도 못할 만큼의 훈장이 있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훈장은 이것 하나 뿐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훈장을 그의 칼라 사이에 매달기 시작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더욱 뺨을 붉게 물들이며 눈을 내리깐 그녀는, 흐트러진 옷깃을 매만져 주는 것을 끝으로 그의 품에서 멀어졌다.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건넸다.
“사람들이…… 두려워 하고 있어요. 우리들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어요.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세요.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세요.”
물끄러미 비서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던 그는 곧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음 조각처럼 차갑던 그의 인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선량해 보이는 젊은이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부드럽고, 심지어는 장난기까지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걱정 마. 사실 그거 말고 내가 할 줄 아는 게 또 있겠어?”
비서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준 그는 다시 출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태도는 연방 총통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총통은 엄숙한 어조로 명령했다.
“제군들, 앞으로.”
그들은 나아갔다. 거대한 철문이 열리고 엄청난 음파의 파도가 그들을 덮쳤다. 신 붉은광장에는 백만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목이 터져라 부르는 군가는 삼십만 연방군의 것이었고 귀청이 터지도록 질러대는 함성은 칠십만 시민의 것이었다.
이 엄청난 박력 앞에 게일 총통은 새삼 자신이 진 짐의 무게를 깨달았다. 이들의 미래는 모두 자신의 어깨 위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이들의 삶을, 번영을, 미래를. 총통은 그 모든 것의 무게를 뼈아프게 느꼈다. 그렇기에 더더욱 힘든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총통은 팔을 들어올렸다. 함성 소리가 높아져 갔다. 인간들의 외침은 신 붉은 광장을, 신 모스크바 시를, 지구를, 그리고 솔 연방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솔 지구사회주의연방 표준력 618년 9월 13일. 데미안 그노시스 게일 총통의 취임 550주년 기념식에서 총통 최고 사령부는 사르닥 노르에 대한 선전 포고를 결의한다. 아울러 연방 최고 평의회는 사르닥 노르를 지원하는 세력에 대한 무제한 공격을 허용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사실상 이는 은하계의 모든 종족들에 대한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군사 역량에서 우월했음에도 동시에 2개 이상의 전선을 펼치다 패망한 고대 독일 제3제국의 예를 들어 작전의 무모함을 주장했지만 총통의 결단은 확고했다. 반면 일부 역사가들은 당시의 은하계 정세를 예로 들어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결정이었음을 역설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이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아무도 판가름할 수 없었다는 것이 후세 은하계 역사가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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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WAR게시판에서 현재 플레이중인 온라인 겸용(?) 보드 게임 '황혼의 제국'에 대해 쓴 팬픽입니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현재 제가 플레이중인 종족이 솔 연방, 즉 인류죠. 쓴지는 꽤 된 글이지만 한 번 여기에 올려 봅니다.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글은 의식하지 않고 가볍게 쓰면 쓸수록 잘 나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즐기면서' 쓴 가벼운 글이기 때문인지 글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 들더군요. 노벰버 레인을 쓸 때도 어깨에 힘을 좀 빼야 하는데, 일종의 결벽증 때문에 그게 쉽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_-;;
신 모스크바시 상공 520km 궤도 엘리베이터 내 총통 집무실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렸다. 붉은 정장을 입은 미모의 여성이 문틈으로 몸을 드러내자 좌중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잠시 얼굴을 붉힌 여비서는 깨끗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총통 각하, 10분 남았습니다.”
“들었나? 10분이다. 모두들 그 안에 끝낼 수 있도록. 비서실장, 시작해.”
“네, 각하. 메카톨 렉스 의회의 결정입니다. 노동 인력 정책 안건이 아슬아슬한 표차로 의결되었습니다. 결과는 확정적입니다. 이제 어떠한 종족도 노동 인력 정책을 폐기할 수 없습니다. 상임이사국 크샤 왕국은 협박에 못 이겨 이 안건을 의회에 강제 상정했을뿐더러, 투표에서 기권했습니다.”
이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은 솔 연방의 수도인 신 모스크바 상공 520킬로미터 부근이었다. 지구의 핵을 기준으로 한 공간의 z축 좌표는 계속 변화하고 있었기에 명확히 단정지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이 대화의 공간이 엄청난 속도로 수직 하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총통 전용 13번 궤도 엘리베이터의 중심부에 위치한 총통 집무실이었다. 최고급의 대리석으로 마감된 너른 방 안에는 역시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비싼 베푸트산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고, 그 테두리를 따라 십여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5세기 전, 게일 소장은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의 정체를 민주주의에서 국가사회주의로 변경했다. 그 이후로 오랜 기간동안 군정일치를 추구해온 군사공동체 솔 연방이었기에 모든 정부의 요인들은 관료인 동시에 군인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으로 정부의 핵심인사들이 밀집해 있는 이 집무실에 모인 별의 개수는 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솔 연방의 사병이라면 입을 쩍 벌리게 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이곳에 모인 장성들의 계급장에 붙은 별들을 모조리 떼어내면 백금의 별이 30개쯤 달린 모빌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총통 친위대의 병사들은 ‘총통의 궤도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면 그건 우주가 하나 날아가는 꼴’이라고 농담삼아 말하곤 했는데, 사실 그것은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만큼 이 방에 모인 사람들의 영향력은 가히 우주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 그 기라성 같은 인물들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핏기가 전혀 없는 창백한 피부에 마찬가지로 색소가 결핍된 하얀 백발, 그리고 혈관이 그대로 비치는 붉은 눈동자와 귀족적이고 오만한 눈초리를 지닌 사내였다. 장신의 날렵한 몸을 솔 연방에서 단 한 사람만이 입을 수 있는 총통의 예복으로 감싼 그는, 솔의 80억 장병과 9000억 시민들을 대표하는 자였다.
솔 지구사회주의연방 총통 데미안 그노시스 게일. 악마적인 카리스마와 깊은 심계(審計),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돌적인 추진력 때문에 그의 적들에게는 다스 게일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오래 전에 개정한 헌법에 따르면 총통은 종신직이었다. 그래서 독재자는 벌써 600여년 동안이나 총통의 지위에서 그 무자비한 철권을 휘둘러 왔다. 게일의 육체는 청년의 그것처럼 젊고 탄탄했다. 하지만 멜라닌이 전혀 없는 그의 피부와 머리카락이야말로 수십 번의 유전자 재복원 과정의 부작용에서 비롯된, 치유 불가능한 세월의 흔적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독재자는 비서실장의 보고를 주의깊게 경청하고 있었다. 보고가 끝나자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잘 되었군. 지난 반세기간에 걸쳐 실시했던 공작이 드디어 빛을 본 것인가. 이제는 그 누구도 솔의 앞길을 막아설 수 없다. 안보부장, 수고해 주었네.”
“아닙니다, 각하. 총통 각하의 지원이 없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치사는 그만두게. 이건 분명한 자네의 공적이야. 곧 보훈국의 심사가 있을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한데 납치해온 크샤 국왕의 장자는 어디에 있는가?”
안보부장이라 불린 덩치 큰 사내는 험상궂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리남의 특수 정치범 수용소에 있습니다. 워낙에 정신 방어가 강한 탓에 마인드 컨트롤이 잘 먹히지 않아서 아리남의 정신파 통제 모듈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정신력이 강한 크샤인인 데다가 그 중에서도 유별날 정도로 자기제어력이 강해서, 인간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비파괴 제어기는 전혀 소용이 없는 수준입니다.”
“과연. 범의 새끼는 고양이가 될 수 없는가. 스탈린 국왕의 아들답군.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더더욱 그냥 놓아둘 수 없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세뇌시켜.”
“하……하지만 남은 것은 향정신성 약품 사용과 나노머신 이식밖에 없고, 그건 콴 협약에 의해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상관없어. 겉보기에만 멀쩡해 보이면 돼. 뭘 사용하던 상관하지 않을 테니 나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도록. 그보다도 채찍이 효력을 냈으니 당근이 필요하겠지. 어느 정도의 보상을 생각하고 있나?”
사내는 눈앞에 떠 있는 손바닥만한 홀로그램 노트를 쿡쿡 찍으며 말을 이었다.
“안보부의 비자금을 총동원하면 대략 십구조 팔천억 크레딧 정도를 마련할 수 있고, 그래서 그 정도 선에서 예상하고 있습니다.”
“너무 적어. 그 두 배로 한다.”
“그건…… 너무 많습니다. 국방부의 한 세기 예산과 맞먹는 수준인데, 무엇보다도 재원 조달이 불가능합니다.”
“상관없어. 부족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거기까지는 신경쓸 필요 없다. 이정도의 테러를 저질러 놓고 수습을 못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크샤측에 분명히 알려라. 사십조 크레딧이다. 알겠나?”
“……네, 각하. 알겠습니다.”
사내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총통의 시선이 그에게서 떨어져 옆의 사내에게 옮겨 갔다. 검은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발라 넘긴 동양계의 젊은 남자였다. 총통의 시선에서 무언의 명령을 감지한 그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정보부에서 포착한 각국간의 자원 및 카드 교류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번 의회 개회 기간 동안에 졸나르는 모든 자금과 카드를 노르에게 넘겼습니다.”
“……노르에게라고? 하칸이나 레트네프에게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흥, 웃기지도 않는군. 솔을 공격하고 싶다면 차라리 강성한 레트네프나 하칸을 지원할 것이지, 곧 망할 노르에게 모든 걸 걸다니. 멸망해가는 종족간의 동병상련인가. 계속해 봐.”
“또…… 노르는 그렇게 받은 카드를 포함하여 총 세장의 행동 카드를 사용했습니다. 기술적 약진과, 그것을 흉내낸 천재적 영감과, 이번 노동 정책 안건에 반대표를 행사하기 위한 환상적인 웅변입니다. 물론 환상적인 웅변을 통한 . 노르에게 남은 카드는 원래 가지고 있던 세금 환급과 졸나르에게 받은 숙련된 후퇴, 그리고 사기 진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 한 장은 확인중입니다.”
게일 총통은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노르의 갑각류들은 뇌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모양이군. 국운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또다시 기술 개발이라니, 그 대책없는 느긋함이 부러울 정도군. 게다가 천재적 영감을 겨우 그런 곳에 사용했단 말인가? 하다못해 신호 방해나 구세주 카드를 복사하여 어떻게든 다음 턴을 기약해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거부권을 복사해 노동 안건을 파기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한 방법이었을텐데. 그러고보니 민간 방위도 있었군.”
“총통 각하, 이제 5분 남았습니다.”
예의 여비서가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왠지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총통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결 안심한 표정이 되어 집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독재자는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결국 퀴나라의 버그들은 최후의 기회마저 놓쳐버리는군. 이제는 신경쓸 필요도 없다. 다른 정보는 없나?“
“노르가 하칸에게 카드 한 장을 보냈고 레트네프에게 5조 크레딧에 카드 한 장을 구매했습니다. 노르가 하칸에게 보낸 카드는 졸나르에게 받아온 풍년 카드로 보이며 레트네프에게 받은 카드는 사기 진작으로 추정됩니다. 사기 진작은 솔과의 결전에 대비하기 위함인 듯 합니다. 하칸과 레트네프는 직접적인 적대 의사를 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반 솔 동맹의 형성은 이미 명약관화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런 헐값에 카드를 넘기다니……. 레트네프는 노르가 솔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고 멸망해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군.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라도 해 보자는 건가. 노르와 하칸의 공조도 단단한 것 같고, 크샤의 의도는 오리무중……. 이제는 사면초가로군.”
총통의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은하 최강의 솔 연방이지만 그렇기에 다른 종족들의 질시를 한몸에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솔의 무서운 성장을 경계하는 다른 종족들의 연합은 이미 통제 가능한 수준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애써 뚫어 놓았던 외교 루트는 모조리 단절되고, 어떠한 메시지를 보내 보아도 차가운 무반응 뿐…….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솔의 멸망뿐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당해 줄성 싶으냐.’
잠시 침울하게 변했던 총통의 두 눈에 다시 차가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될 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룀, 연방의 재정 상태에 대해 보고하도록.”
“네, 각하. 노동 인력 안건의 재의결로 인해 솔 연방의 GRP(Gross Racial Product)는 지난 세기의 2배가 넘는 엄청난 양적 성장을 거두었습니다. 현재 솔 연방의 GRP는 크샤 왕국을 제외한 모든 종족들의 GRP를 합친 것보다도 높습니다. 10퍼센트 선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은 현재 1퍼센트 미만에 머물러 있으며, 기업 일선에서는 노동력이 모자라 기피 대상이던 복제 인력마저 대거 채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좋은 소식이군. 예산 배정은 어떻게 되었나?”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각하. 필수예산을 제외하면 과학기술비에 25조, 국방비에 42조가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국방비는 대부분이 건함비용으로 투입되었으며 전투순양함을 중심으로 한 5만척 수준의 함대가 건조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우주해병대 3개 집단군이 신설될 예정입니다.”
“5개 함대라…… 그정도면 아쉬운대로 써먹을 수는 있겠지. 생산완료된 노급함대의 진수식은 연기된 걸로 아는데, 맞는가?”
“네, 각하. 노르 진공작전의 개시일시가 앞당겨짐에 따라 정규 함대에의 취임은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대신 제 21함대에 임시 편입되어 예비대로 활용될 예정입니다.”
“에른스트 대장의 입이 찢어지겠군. 무려 노급함 이만척을 예비대로 쓰다니. 노르 방면에서 뭔가 이상징후가 발견되는 것은 없나?”
“없습니다, 각하.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몸이 짓눌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하강과정을 거의 끝마친 궤도 엘리베이터가 최종 감속 코스에 들어간 것이다. 집무실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쿵, 하는 작은 충격음과 함께 진동이 멈추었다. 드디어 궤도 엘리베이터가 신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이었다.
또각거리는 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비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각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이미 군악대가 연맹군가가 연주중입니다. 시민들이 각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리 식을 시작하지 않으면…….”
독재자는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알았어, 알았다고. 걱정도 팔자군. 남은 부분은 추후에 서면으로 보고하도록 하고, 이제 연단으로 간다. 모두들 시민들에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한다. 가자.”
총통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도 총통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무실에서 나와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총통 전용 궤도 엘리베이터의 출구 중 하나는 총통 사령부 ‘독수리 둥지’의 연단에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군화를 신은 그들의 빠른 발걸음이 고딕 양식의 통로를 쩌렁쩌렁 울렸다. 통로에는 고대 독일 제3 제국의 의장을 갖춘 의체화 병사들이 일정 간격으로 늘어서 부동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총통이 그들 사이로 지나가자 검은 연방 제복에 프리쯔 헬멧을 눌러쓴 그들이 차례차례 오른팔을 들어올리며 군화의 뒷굽을 맞부딪혔다. 병사들이 전면만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총통 또한 정면만을 응시하며 걸었다.
출구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철문에 조각된 강철의 독수리가 총통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철문의 미세한 틈을 통해 새어들어오는 연방군가의 울림이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다급한 목소리가 그를 잡아세웠다.
“잠깐만요!”
걸음을 멈춘 총통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정장을 입은 여비서가 뛰는 것에 가까운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이힐에 저렇게 좁은 치마를 입고도 잘도 움직이는군, 하는 시답잖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윽고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말을 건넸다.
“이걸, 빠뜨리셨어요.”
그녀가 들어보인 것은 낡고 때가 묻은 은색의 훈장이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솔이 아직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고 그가 겨우 중위에 불과하던 햇병아리 시절에 용맹과 헌신의 증거로 받은 것이었다. 그에게는 다 세지도 못할 만큼의 훈장이 있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훈장은 이것 하나 뿐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훈장을 그의 칼라 사이에 매달기 시작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더욱 뺨을 붉게 물들이며 눈을 내리깐 그녀는, 흐트러진 옷깃을 매만져 주는 것을 끝으로 그의 품에서 멀어졌다.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건넸다.
“사람들이…… 두려워 하고 있어요. 우리들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어요.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세요.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세요.”
물끄러미 비서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던 그는 곧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음 조각처럼 차갑던 그의 인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선량해 보이는 젊은이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부드럽고, 심지어는 장난기까지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걱정 마. 사실 그거 말고 내가 할 줄 아는 게 또 있겠어?”
비서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준 그는 다시 출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태도는 연방 총통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총통은 엄숙한 어조로 명령했다.
“제군들, 앞으로.”
그들은 나아갔다. 거대한 철문이 열리고 엄청난 음파의 파도가 그들을 덮쳤다. 신 붉은광장에는 백만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목이 터져라 부르는 군가는 삼십만 연방군의 것이었고 귀청이 터지도록 질러대는 함성은 칠십만 시민의 것이었다.
이 엄청난 박력 앞에 게일 총통은 새삼 자신이 진 짐의 무게를 깨달았다. 이들의 미래는 모두 자신의 어깨 위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이들의 삶을, 번영을, 미래를. 총통은 그 모든 것의 무게를 뼈아프게 느꼈다. 그렇기에 더더욱 힘든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총통은 팔을 들어올렸다. 함성 소리가 높아져 갔다. 인간들의 외침은 신 붉은 광장을, 신 모스크바 시를, 지구를, 그리고 솔 연방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솔 지구사회주의연방 표준력 618년 9월 13일. 데미안 그노시스 게일 총통의 취임 550주년 기념식에서 총통 최고 사령부는 사르닥 노르에 대한 선전 포고를 결의한다. 아울러 연방 최고 평의회는 사르닥 노르를 지원하는 세력에 대한 무제한 공격을 허용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사실상 이는 은하계의 모든 종족들에 대한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군사 역량에서 우월했음에도 동시에 2개 이상의 전선을 펼치다 패망한 고대 독일 제3제국의 예를 들어 작전의 무모함을 주장했지만 총통의 결단은 확고했다. 반면 일부 역사가들은 당시의 은하계 정세를 예로 들어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결정이었음을 역설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이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아무도 판가름할 수 없었다는 것이 후세 은하계 역사가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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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WAR게시판에서 현재 플레이중인 온라인 겸용(?) 보드 게임 '황혼의 제국'에 대해 쓴 팬픽입니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현재 제가 플레이중인 종족이 솔 연방, 즉 인류죠. 쓴지는 꽤 된 글이지만 한 번 여기에 올려 봅니다.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글은 의식하지 않고 가볍게 쓰면 쓸수록 잘 나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즐기면서' 쓴 가벼운 글이기 때문인지 글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 들더군요. 노벰버 레인을 쓸 때도 어깨에 힘을 좀 빼야 하는데, 일종의 결벽증 때문에 그게 쉽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_-;;
Everything is clearer now
Life is just a dream, you know
That's never ending.
I'm ascen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