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에서의 마지막 날들은 부산스럽게 지나갔다. 군율은 엄격해졌고 주점들은 개점휴업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벌레의 바다 - 웜 시(worm-sea)를 건너기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나와 니세와 비르히가 속한 브라반트 여단은 노멘의 기사인 쇼그렐 경의 휘하에 배속되었다. 이른 새벽에 선단은 항구를 떠났다. 포구를 벗어나자 바람이 배를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배들은 남방항로를 따라 내려가 망상열도의 아름다운 섬들을 돌아 항로를 동쪽으로 돌렸다. 새하얀 돛을 면사포처럼 머리에 인 선두의 프키예 호는 진주바다의 아름다운 연파랑색 너울을 가로지르며 햇살의 신부처럼 쾌활하게 나아갔다. 새로 건조된 배들은 진이 덜 빠진 목재의 무게 때문에 그만큼 속도를 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쾌속선에 못지않은 날렵함으로 진주바다의 잔잔한 물결을 두 줄기로 찢어놓았다.

폭풍곶에 이르러 작은 항구 마그도프에 잠시 계류한 함대는 늘 이곳에서 대기하는 종선과 합류했다.
서펜트들은 종소리를 싫어한다. 이것을 모르던 시절에는 무수히 많은 배들이 이 웜-시에서 서펜트들의 원한어린 공격을 받아야 했다. 서펜트들이 아무 종소리에나 반응하는 것은 아니고 정밀하게 조율된 특별한 범종의 소리에만 달아나는데 종선은 갑판에 누각을 세우고 거기에 이 특별한 범종을 매단 배였다. 무게중심을 맞추기 위해 배 바닥에는 자갈을 깔았고 보통 배보다 훨씬 높은 마스트위에는 감시자가 교대로 상주할 감시소가 설치되어있었다. 짐도 승객도 거의 싣지 않은 순전히 서펜트를 쫓기 위한 목적의 배였다.

뭍을 디딜 틈도 없이 하룻밤을 마그도프 앞바다에서 보낸 함대는 이 남단의 항구를 떠나 다시 북동쪽으로 향했다. 두 척의 종선은 함대의 선두와 꼬리에서 배들을 인도했다. 당장 마그도프를 떠나자마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바닷물의 색깔이 흉흉한 쪽빛으로 달라졌다.

이따금 서펜트가 출현해 종선의 종탑이 웅웅 울리는 소리를 내뿜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평탄한 항해였다. 물론 그것은 뱃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비르히처럼 난생 처음 원양선을 타본 사람들은 멀미와 갖은 질병으로 바다에 대한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항해를 하는 동안 내내 비르히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실 풀린 꼭두각시처럼 흐느적거리며 선실과 갑판을 오르내렸다. 그를 도와주려는 손길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니세는 늘 그렇듯 거의 모든 일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주로 그것은 나의 도움이었다. 하지만 비르히는 도움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그는 내가 가져다주는 식사를 받아먹을 바에야 차라리 굶겠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꼬박 열이틀 동안 막막한 해상을 질주한 끝에 함대는 동방의 도시 모나리에 도달했다. 모나리에서는 이틀간 정박했지만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함대는 다시 출발하여 황량한 라스파난의 해안선을 따라 일주일을 더 항해했다.
그리고 기나긴 항해 끝에 드디어 함대가 드디어 도착한 곳은 해무주였다.

해무주는 원래 고리족의 나라인 임라다일의 서쪽 변방에 위치한 항구도시였다. 하지만 3년 전, 동방 원정군의 사령관인 알피네제 퀴멜 공작이 임라다일 조정을 협박해 조차지로 얻어냈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항구도시는 베스트팔롱의 지배에 속하게 되었다. 기한이 명기되지 않은 조차지라는 건 명분이 좋아서 빌린 땅이지 사실상의 침략이었다.
어쨌든 원정군이 해로로 증원군을 보낼 수 있게 된 건 남해와 연결된 이 항구를 얻은 이후부터였다. 이전에는 밀 한 톨이라도 보내려면 쿤족이 출몰하는 ..방의 대목원을 가로질러 험난한 마이센가드를 가로지르는 길을 택해야 했다. 그건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리는 길이었다.


배들은 비좁은 선창에 짐들을 부려놓았다. 바닥이 넓은 이국적인 배들 사이를 속이 빈 나무로 만든 기묘한 보트들이 잽싸게 누비고 다녔다. 날로 먹을 수 있는 생선들을 가득 싣고 파는 배도 있었고 이국적인 과일과 야채가 한가득 실려 있는 납작한 보트도 있었다. 하지만 선원과 병사들은 대부분 비위가 상해 바로 뭍으로 올라갔다.
어딜 보나 키 작고 지저분한 고리족들이 우글거렸다.
고리족의 아이들은 이가 득실거리는 머리를 하고 넝마를 걸친 채 구석진 골목에서 저희들끼리 모여 있었다. 그들이 뛰어 놀아야할 거리는 이국의 군대가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집안에는 도깨비만큼이나 무서운 부모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웃는 아이들을 본다는 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해무주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부대는 장비와 편성을 점검한 뒤 육로를 따라 북상을 시작했다.
징발된 말이 끄는 수레가 대열의 끝에서 보급품들을 싣고 뒤따랐고 선두에는 3년 전부터 이 곳에 머물던 베스트팔롱 사람들이 길을 안내했다. 목적지는 임라다일과 국경을 맞댄 이교도들의 왕국 노이진이었다. 한가로운 시골과 번잡스러운 몇몇 도시들을 지나치자 다소 험준한 산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산을 넘기 전에 부대는 수복진에서 잠시 전열을 정비했다. 고작 반나절을 쉰 부대는 곧장 산을 넘었고 산을 넘자마자 바로 노이진이었다.
국경을 통과하고 나자 임라다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따금 지나치는 마을에는 원정군이 세워놓은 뾰족 지붕의 치안소가 있었고 치안소 앞에는 본보기로 효시된 고리족의 시체가 한두 구씩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의 밑에는 죽은 자의 가족인 듯싶은 사람이 한둘씩 앉아 작대기로 새를 쫓아내고 있었다. 그들은 시체처럼 퀭한 눈으로 지나가는 군대를 노려보았다.
명목뿐인 국경을 통과한 뒤 닷새 동안 더 북쪽으로 행군하자 여단은 목적지인 목성진에 도착했다. 목성진에는 거대한 탑이 있었다. 원래는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을 성 싶은 건축물들이 이제 완전히 병영으로 변모해 있었다. 높다란 망루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던 감시자가 행렬을 발견하고 뿔피리를 불었다. 날카로운 뿔피리소리가 안개 서린 계곡을 따라 메아리쳤다.
사찰의 정문으로 들어서자 널찍한 안뜰에서 무기들을 손질하고 있던 병사들이 주춤주춤 일어났다. 그들은 오랜 여행에 지친 부대의 대열을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야유를 보냈다.
“저 꼬라지들하고는. 싸우자고 온 놈들 맞아?”
“새끼들, 어쩌자고 자꾸 오는 거야. 이젠 염할 천도 없는데.”
“열흘 치 식량은 갖고 왔겠지? 그거면 됐어! 설마 열흘 넘게 살아남을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니세는 침묵으로, 나는 반발심이 담긴 눈초리로, 그리고 비르히는 벌개진 얼굴로 그 야유들에 화답했다. 하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그 병사들이었다는 걸 우린 곧 알게 되었다. 막사가 배정되고 보급품의 지급과 점고가 끝나고 나자 신병들은 곧 수년을 이곳에서 “썩은” 고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게는 하루 이틀 만에 친구가 되었다. 그들과 우리를 묶어주고 있는 것은 천리 밖의 고향에 대한 향수였다.


우리를 맞이한 목성진의 분위기는 한가로웠다. 우리의 도착을 전후하여 인근의 불온지역에 대한 수색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라 원주민의 부락은 대체로 평온했고 먼 곳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반군 놈들의 동태도 대체로 얌전했다. 거기에 더해 날씨도 더할 나위 없이 청명해서 하늘은 깊은 바다처럼 맑았고 바람은 일찍이 맡아본 일 없는 신선한 꽃향기를 품고 있었다.
새로 편성된 우리 연대는 처음의 한 달 동안 무너진 담장을 수리하거나 새로 망루를 세우는 따위의 잡다한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날씨가 좋았던 그 한 달 동안 우리는 그 평온함에 불만을 토로하며 젊은 혈기를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 달이 거의 다 지나가고 계절의 경계가 끝나갈 무렵, 첫 번째 비가 내렸다. 그리고 연대에 드디어 첫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 임무는 조직적인 저항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반군들의 활동을 색출해내는 것이었다.


비가 그친 하늘은 거울처럼 깨끗했다.
“부대! 전진!”
낮은 초가지붕들 사이로 희끗희끗한 옷들이 어른거렸다.
“쓸어내라!”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푸른 물이 세상을 온통 적실 것 같은 날씨였다.
나의 왼편에 서있던 니세는 무표정하게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들이 마을에서 달려 나와 성큼성큼 전진하는 창날의 숲 앞에 바싹 엎드렸다. 잠시 대열이 주춤거렸다.
“뭐하는 거냐! 전진해! 전진!”
병사들은 노인들을 밟아 뭉개며 마을로 진입했다. 그 병사들 중에는 나도 끼어있었다.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마을로 들어선 병사들은 스무 가구 남짓한 집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비명소리와 알아듣지 못할 고함소리들.
“이것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헤들러가 자기에게 매달린 세 명의 아이들을 떼어내기 위해 애를 쓰면서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 아이들의 어머니는 병사의 발밑에 피를 쏟으며 드러누워 있었다. 아이들은 반쯤 칭얼대는 소리로 그에게 뭐라고 지껄여대고 있었다. 나는 외면했다. 내 등 뒤에서 그가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건 나는 상관할 바가 아니다. 우리가 받은 명령은 애초에 그런 것이었으니까.
나는 마지막 집으로 보이는 초막에 다가가 문을 화락 열어젖혔다. 방안에는 꼿꼿한 자세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진무른 눈을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정신이 눈길을 따라 전염되어 이편의 뇌를 침범하는 것 같은 환상에 나는 진저리쳤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니세가 백부장에게 보고했다. 나는 주변의 산들을 돌아보았다.
이 인근에는 도합 아홉 개의 마을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연대는 “탐색”중이었다.
마을을 떠나기 직전에 우리는 불을 피웠다. 바싹 마른 지붕은 불이 잘 붙었다. 지친 원주민들은 비명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하얀 연기에 뒤덮여 메말라갔다.
부대는 다음 마을로, 다음 마을로 이동하며 그런 수색을 반복했다.
“수상한 물건이 발견되면 그 즉시 보고해라!”
수상한 물건, 혹은 수상한 자가 우리 수색의 대상이었다.
수상한 무기, 수상한 글귀가 적힌 격문, 수상한 자들이 모여 있는 은신처, 혹은 이유 없이 저항하는 주민들. 그 모든 것들이 우리 공격의 대상이었다. 모든 것이 지정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한가지만은 지정되지 않았다. 잔혹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건 변명일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우리는 강요받고 있었다.
이동하는 길에 니세가 나에게 물었다.
“왜일까?”
밑도 끝도 없는 그 질문은 우리들이 딛고 선 땅으로부터 아주 먼 곳에서 울리는 종소리처럼 들렸다. 범종의 울림에 괴로워하는 서펜트처럼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기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비르히의 검은 눈동자가 나와 니세를 바라보다가 힘없이 멀어져갔다. 그도 지친 얼굴이었고 슬픈 표정이었다.



목성진으로 돌아와 사흘간을 쉰 후 부대는 곧바로 두 번째 임무에 투입되었다. 처음의 한 달간 맛본 평화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우리는 곧바로 다시 주둔지를 떠났다. 다른 연대의 고참병들이 굳은 표정으로 장비를 꾸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병사들이고 원정군이라는 사실을 간신히 실감했다. 그리고 일단 이동을 시작하자 침울함도 불평불만도 다 날아가 버렸다. 피로와 긴장이 빈자리를 채웠다.

부대는 목성진에서 5일 거리에 위치한 한 야산에 숙영지를 편성하고 하룻밤을 보냈다. 3교대 째 출발한 정찰대가 인근을 수색하고 있었다.
이동 준비가 끝난 부대원들 앞을 오락가락 하다가 대대장 베만이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노스게라 자작의 삼남인 그는 가문으로부터 영지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어 동방에 지원한 전형적인 시골귀족이었다.  
“반군이 대대적으로 이 지역에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전쟁이야, 전쟁! 공중기사단의 지원은 없다. 똑똑히 들어둬라. 곁에서 동료가 죽어나갈 것이다. 그래도 정신을 바싹 차려라. 그게 네 놈들을 연명시켜줄 거다.”
엄중한 군율은 적이 녹녹치 않음을 의미했다.
많은 것이 소문과 달랐다. 황금은 없었고 원정군은 동방을 “지배”하고 있지 않았다. 점점 상황은 명백해지고 있었다. 이동을 시작한지 반나절 만에 부대는 우뚝 멈춰 섰다. 정찰대가 무언가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 무언가가 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꼬박 다시 반나절이 걸렸다. 적들은 그리 멀지 않은 숲에 숨어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