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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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정말 충격적이고 끔찍한 사건이었다.
수백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나왔고, 그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었다. 부모들은 보통 직장에 있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오열했다. 게다가 그 동안 경찰의 범죄 신고망이 원인불명의 고장으로 작동이 정지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경찰에 대한 비난을 가열시키기에 충분했다. 경찰이 넋 놓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할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것이 단순히 언제나 발생할수 있는 시스템 상의 문제였을 뿐이라고 주장한 한 경솔한 경찰 간부는 유족과 부상자들의 격열한 비난에 직면하여 옷을 벗어야 했다. 그를 시작으로 하여 시민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많은 경찰 간부가 사직과 강등, 한직으로의 전출을 받아들여야 했다. 범인들이 놀 테러리스트 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인족에 대한 여론도 급격히 나빠졌다. 모든 타종족을 배제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인간 중심 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종족 화합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들끓는 여론과는 정 반대로 범인들의 정체는 도무지 파악이 불가능했다. 남아있는 범인들의 잔해에서 이들이 모종의 테러 조직에 속한 자들이라는 심증은 굳혔지만, 보통 큰 일을 저지르고 나서 사건을 선전하게 마련인 테러 조직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민간인 거주 구역에 테러를 가했단 말인가? 이토록 잔인한 테러를 하면 조직의 정당성을 알리기는 커녕 단순한 악의 조직으로 낙인 찍히기 쉽상일텐데 말이다. 일반적인 다른 테러와는 달리 이것은 목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단서는 거의 없었고, 적의 배우는 안개에 휩쌓였다.
어쨋건 사건이 장기화 되어가면서 이 사건도 달아오른 냄비처럼 급격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모든 죽음처럼 이것도 죽은 사람을 가슴에 묻는 형태로 결말을 지어갔다. 보험금도 정부에서 지급한 특별 보상금과 곳곳에서 모인 위로금도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억제하지는 못했지만 "시간"은 그것까지도 풍화시켜나갔다.
일레인을 더욱 괴롭게 한 것은 어머니가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라비스의 시체는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폭발이 발생한 곳에서 너무 가까웠던 탓에 그 주위의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져서 시체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황으로 볼때 그녀가 죽은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일레인은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믿지 못했다.
평범한 인간, 엘프의 부모와는 달리 라비스는 부모는 자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수 밖에 없다는 보편적인 가르침을 전해주지 않았다. 하프 엘프의 수명은 길면 2,3백년에 달해서 인간보다는 훨씬 길지만 그래봤자 엘프와 비교하자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그래서 대부분의 하프 엘프는 엘프인 부모보다 일찍 죽어버린다. 이것은 엘프와 인간의 사랑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인간인 배우자가 일찍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엘프들도 참아낼수 있었다. 배우자와 사별하거나 헤어지고, 재결합 하는 것은 엘프 부부 사이에서도 흔히 발생하는 일이다. 그들이라고 만사가 평탄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자식들까지도 자신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정말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엘프에게도 아이는 부모에게 가장 큰 보물이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건강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피가 섞인 아이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죽어버린다. 엘프에게는 가장 활력이 넘칠 시기에 그들은 이미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정말 슬픈 일이지만 엘프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라비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레인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더욱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쏟았는지도 모른다. 일레인은 아직 그런 것 까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나이는 아니었지만 막연하게 나마 자신이 어떻게 할수없는 그 문제에 대해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는 그 때문에 "부모의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본 경험이 없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는 독립해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어머니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던 탓에 그녀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컷다.
그로부터 몇주뒤.
철컥….
일레인은 새로 살게된 거주구역으로 퇴근해왔다. 보상금과 보험금 등을 합쳐서 새로 임대해 얻은 곳은 독신자용 아파트였다. 생활면적은 전에 살던 곳보다 좁았지만 개인편의시설은 더 충실하게 되어있었다. 객관적으로는 더 쾌적해진 생활환경이었지만 이곳에 돌아올때마다 그녀는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도 저녁 식사는 인스턴트 식품으로 때웠다. 요리는 원래 잘 못하는 데다가 요즘에는 일에 몰두하고 있어서 일부러 뭔가를 만들어 먹을 형편이 못되었다. 라비스의 멋들어진 요리 솜씨에 길들여진 그녀에게 인스턴트 식품은 식사를 즐긴다기 보다는 음식물을 뱃속에 쑤셔넣는다는 기분 나쁜 느낌만을 주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집안의 분위기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다른 집에 와있는 느낌이었다. 너무 피해가 막심해서 전에 살던 집에서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가구도 옷도 소지품도 모두 새로 산 것이다. 몇개인가 유품을 건지기는 했지만 대부분 쓸모없게 되버려서 상자에 담아서 보관하고 있었다.
딩동!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럿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누구지?'
궁금해하면서 비춰본 외부 스크린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게일과 등용이였다.
"어쩐 일이야?"
그들과 만났던 것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실제로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일에만 빠져있다 보니 오랜만에 보는 것 처럼 느껴졌다. 등용운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응? 오늘 저녁에 온다고 했잖아?"
"아."
그러고보니 몇일 전에 그런 약속을 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미안해. 요즘 하도 정신이 없어서…."
"괜찮은 거야? 좀 야윈것 같은데… 꼭 이 녀석 처럼 말이야."
"무슨 소리냐?"
게일은 자신을 가리키는 등용의 손짓을 기분나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잘생긴 편이기는 했지만 아무리봐도 건강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밝은 불빛아래에서 본 피부는 비정상적으로 창백하고 윤기가 없으며 눈 밑에는 검은 기미 같은 것도 있었다. 혈색도 안 좋고 살집도 없었다. 어쨋건 그도 언데드니까 어쩔수 없는 일이다. 뱀파이어가 마치 살아있는 것 처럼 위장하기 위해서는 피의 힘을 약간 소모해야 하는데 그 같은 햇병아리 뱀파이어에게는 그 얼마 안되는 피도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저기 대체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라비스 씨가 그런 일을 당하다니. 아 참, 조문이 늦어진 것도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엘프들은 뱀파이어를 싫어한다고 해서…."
"괜찮아. 우리 엄마는 너 꽤 마음에 들어하셧으니까."
"아니. 요 근래에 들어서 이 근처에 다른 엘프들이 많이 드나든다고 해서 말이야."
"아. 그렇지. 참…."
라비스의 장례식은 열리지 않았지만 그 동안 일레인의 집에는 조문하기 위한 엘프들이 줄을 이어서 들어왔다. 대부분 라비스의 친척이나 옛 친구들로서 일레인은 잘 알지도 못하는 엘프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상당한 고위층으로 보이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녀는 역시 알지못했다. 하지만 일단은 예의바른 그들의 태도 밑바닥에는 하프엘프에 대한 묘한 편견과 경멸, 동정이 깔려있는 것이 느껴져서 올때마다 불쾌함 때문에 고생했었다.
그렇게 오래 산 엘프들은 뱀파이어가 몬스터로 여겨질 때부터 살아와서 뱀파이어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게일은 자신이 이곳에 드나들면 일레인이나 라비스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미칠까봐 일부러 얼마간 접근을 삼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신경써줄 필요는 없는데. 난 어차피 엘프들한테는 내가 어떻게 보이던지 말던지 관심없으니까."
"그럼 다행이군."
그는 일레인이 조금은 안정을 찾은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뱀파이어 13인 회의는 뱀파이어 종족만의 자치 기관이었다. 그러나 물론 단지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다. 실질적으로는 도시 전체가 13인 회의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은 노골적으로 인간을 지배하여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인간들 중에는 자신이 다른 무언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싫어하는 자들도 있으니까. 도시의 권력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있었다. 입법은 의회가, 행정은 정부가, 재판은 법원이 한다. 13인 회의는 어느 종족이나 가지고 있는 종족 자치 기관일 뿐이고, 도시 운영에는 아무런 실권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13인 회의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었다. 많은 수의 의원, 관료, 법관들은 불사의 미끼에 걸려서 뱀파이어가 하라는 대로 하고 있었고, 기업들은 막강한 자금력을 지닌 뱀파이어에게 교묘한 지배를 받고 있다. 그외에도 여러 가지 음모를 꾸며 뱀파이어들은 이 풍요로운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끝없이 계속하고 있었다.
"혈족 여러분. 저는 최근 치안 조직에 큰 결함이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에릭은 회의에 출석한 백여명의 엘더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연단에 올라있는 그는 다른 엘더들을 능가하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엘더들은 에릭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수없는 표정으로 모든 "참석자들"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앉아있는 13인의 의원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얼마전에 발생한 테러 사건. 이것을 단순한 사고라고 봐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현재 지배 시스템의 결함이 외부로 노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의있소."
그때 레즈닉 백작이라 하는 엘더가 이의를 제기하며 일어섯다. 에릭 보다 오래된 뱀파이어인 그는 자기보다 어린 자가 나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 발언은 13인 회의에 대한 모욕이요. 현재 지배 체계를 쌓아올린 것은 이 자리에 게신 여러 의원 분들이 아닌가?"
회의장은 일순간에 무거운 침묵에 휩쌓였다. 좀 억지에 가까웠지만 확실히 그렇게 해석될 여지도 없지는 않았다. 만일 의원들이 정말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누가 감히 의원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저 터무니 없이 강력한 괴물들을…. 에릭은 의연하게 그에 반박했다.
"이 자리의 의의는 무엇인가? 의원 분들이 혈족의 지혜를 모으기 위해서가 아닌가? 모함으로 발언을 가로막는 쪽이 더욱 회의를 모욕하는 것이 아닌가?"
"무어라!"
레즈닉은 버럭 화를 냈다.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에릭에게 동조하는 듯한 흐름이 얼음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레즈닉의 발언은 의원들의 위세를 빌려서 에릭의 의견을 꺽으려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원들은 에릭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의에 신경쓰지 말고 발언을 계속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레즈닉은 큰 망신을 당하고 말았지만 의원들의 뜻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치안 시스템의 허술함.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무리의 미치광이 테러리스트들이 이 회의장에 네이팜 탄을 들고 찾아올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대체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 때문입니다!"
에릭은 격열하게 웅변을 토해냈다.
"하나부터 열가지 다 인간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뒤에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 인간들의 능력을 보십시요. 한심하지 않습니까? 인간이란 본래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존재입니다. 저런 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고 뒤에 물러나 있을수 있습니까?"
엘더 뱀파이어들은 모두 수긍하는 눈치였다. 젊은이들이라면 인간 비하적인 이 발언에 약간이나마 반발심을 가졌겠지만 엘더들 중에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뱀파이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뱀파이어로서의 자아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제 간접적인 지배만으로는 한계에 달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뱀파이어가 전면적으로 지배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보다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은 이전 그 어느 시대보다도 강력해졌습니다. 더 이상 이면에서 지배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보다 새롭고! 보다 강력한! 그리고 보다 완벽한! 그러한 지배체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의원님들?"
에릭은 몸을 한바퀴 빙 돌려 13인의 의원들을 마주보았다. 타오르는 듯히 정열적인 에릭과 시체들을 앉혀놓은 것 처럼 냉담하기 그지없는 의원들은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의원들 중 한명이 그에 답하듯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엘이었다.
"젊은 혈족이여. 그대는 무엇으로 자신이 옳음을 증명할 것인가?"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문했다.
"지금 이 상황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혈족들은 누가 그들의 집에 불을 지르러 올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정중한 말투였으나 그 어조는 거의 따지는 듯이 과격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의원들은 여전히 어떤 감정변화도 나타내지 않았다. 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포는 지혜를 흐리게 한다. 용기는 지혜를 맑게 한다. 용기로 공포를 쫓고 혜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니 지혜니 하는 고루한 격언이 아닙니다! 보다 확실한 안전 보장 대책입니다! 저는 회의에 출석하기 전에 8천명의 혈족에게 제 주장에 동의한다는 피의 서명을 받아왔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제출해 드릴수도 있습니다."
8천명씩이나! 그 자리의 엘더들은 모두 놀랐다. 그 만한 숫자가 에릭에게 동조하고 있다면 이건 만만치 않은 문제였다. 피로 서명한다는 것은 단순한 서명보다 훨씬 무거운 의미를 지닌다. 이 만한 숫자의 피의 서명을 모았다는 것은 그의 정치력이 그 만큼 막강해졌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의원들을 움직이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에릭 폰 뤼베르하트, 가장 올바른 길을 가는 자는 가장 입이 많은 자가 아니라 가장 현명한 자다. 너는 8천의 이름이 아니라 8천의 지혜를 빌려와야 했다."
"그렇군요…. 좋습니다."
에릭은 분하다는 듯이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대답했다. 레즈닉 백작은 자신이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자의 그런 모습을 고소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릭은 그 따위에는 안중도 없다는 듯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되물었다.
"그렇다면 저의 통찰이 옳았다는 증거가 더 나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는 너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보마."
"알겠습니다. 제 발언은 이걸로 끝입니다."
에릭은 연단에서 내려왔고, 다음 발언자가 올라갔다. 모두들 그가 크게 실망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그 역시 수백년을 살아온 엘더 뱀파이어. 살아있는 것 처럼 강하게 타오르는 정열 안에는 잿속의 불씨처럼 질긴 인내심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에는 안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기다린다. 하지만 기다림이 길지는 않을 것이다….'
뱀파이어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어 있었다. 숫자는 꾸준히 늘어가지만 죽는 자는 거의 없게 되었다. 오래된 자들은 거의 영원토록 높은 자리에 앉아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야망을 가진 자가 권력을 얻는 것은 쉽지 않게 되었다. 보다 높은 지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만한 모험을 해야 한다.
수백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나왔고, 그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었다. 부모들은 보통 직장에 있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오열했다. 게다가 그 동안 경찰의 범죄 신고망이 원인불명의 고장으로 작동이 정지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경찰에 대한 비난을 가열시키기에 충분했다. 경찰이 넋 놓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할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것이 단순히 언제나 발생할수 있는 시스템 상의 문제였을 뿐이라고 주장한 한 경솔한 경찰 간부는 유족과 부상자들의 격열한 비난에 직면하여 옷을 벗어야 했다. 그를 시작으로 하여 시민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많은 경찰 간부가 사직과 강등, 한직으로의 전출을 받아들여야 했다. 범인들이 놀 테러리스트 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인족에 대한 여론도 급격히 나빠졌다. 모든 타종족을 배제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인간 중심 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종족 화합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들끓는 여론과는 정 반대로 범인들의 정체는 도무지 파악이 불가능했다. 남아있는 범인들의 잔해에서 이들이 모종의 테러 조직에 속한 자들이라는 심증은 굳혔지만, 보통 큰 일을 저지르고 나서 사건을 선전하게 마련인 테러 조직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민간인 거주 구역에 테러를 가했단 말인가? 이토록 잔인한 테러를 하면 조직의 정당성을 알리기는 커녕 단순한 악의 조직으로 낙인 찍히기 쉽상일텐데 말이다. 일반적인 다른 테러와는 달리 이것은 목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단서는 거의 없었고, 적의 배우는 안개에 휩쌓였다.
어쨋건 사건이 장기화 되어가면서 이 사건도 달아오른 냄비처럼 급격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모든 죽음처럼 이것도 죽은 사람을 가슴에 묻는 형태로 결말을 지어갔다. 보험금도 정부에서 지급한 특별 보상금과 곳곳에서 모인 위로금도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억제하지는 못했지만 "시간"은 그것까지도 풍화시켜나갔다.
일레인을 더욱 괴롭게 한 것은 어머니가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라비스의 시체는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폭발이 발생한 곳에서 너무 가까웠던 탓에 그 주위의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져서 시체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황으로 볼때 그녀가 죽은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일레인은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믿지 못했다.
평범한 인간, 엘프의 부모와는 달리 라비스는 부모는 자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수 밖에 없다는 보편적인 가르침을 전해주지 않았다. 하프 엘프의 수명은 길면 2,3백년에 달해서 인간보다는 훨씬 길지만 그래봤자 엘프와 비교하자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그래서 대부분의 하프 엘프는 엘프인 부모보다 일찍 죽어버린다. 이것은 엘프와 인간의 사랑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인간인 배우자가 일찍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엘프들도 참아낼수 있었다. 배우자와 사별하거나 헤어지고, 재결합 하는 것은 엘프 부부 사이에서도 흔히 발생하는 일이다. 그들이라고 만사가 평탄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자식들까지도 자신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정말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엘프에게도 아이는 부모에게 가장 큰 보물이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건강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피가 섞인 아이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죽어버린다. 엘프에게는 가장 활력이 넘칠 시기에 그들은 이미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정말 슬픈 일이지만 엘프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라비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레인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더욱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쏟았는지도 모른다. 일레인은 아직 그런 것 까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나이는 아니었지만 막연하게 나마 자신이 어떻게 할수없는 그 문제에 대해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는 그 때문에 "부모의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본 경험이 없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는 독립해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어머니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던 탓에 그녀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컷다.
그로부터 몇주뒤.
철컥….
일레인은 새로 살게된 거주구역으로 퇴근해왔다. 보상금과 보험금 등을 합쳐서 새로 임대해 얻은 곳은 독신자용 아파트였다. 생활면적은 전에 살던 곳보다 좁았지만 개인편의시설은 더 충실하게 되어있었다. 객관적으로는 더 쾌적해진 생활환경이었지만 이곳에 돌아올때마다 그녀는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도 저녁 식사는 인스턴트 식품으로 때웠다. 요리는 원래 잘 못하는 데다가 요즘에는 일에 몰두하고 있어서 일부러 뭔가를 만들어 먹을 형편이 못되었다. 라비스의 멋들어진 요리 솜씨에 길들여진 그녀에게 인스턴트 식품은 식사를 즐긴다기 보다는 음식물을 뱃속에 쑤셔넣는다는 기분 나쁜 느낌만을 주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집안의 분위기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다른 집에 와있는 느낌이었다. 너무 피해가 막심해서 전에 살던 집에서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가구도 옷도 소지품도 모두 새로 산 것이다. 몇개인가 유품을 건지기는 했지만 대부분 쓸모없게 되버려서 상자에 담아서 보관하고 있었다.
딩동!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럿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누구지?'
궁금해하면서 비춰본 외부 스크린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게일과 등용이였다.
"어쩐 일이야?"
그들과 만났던 것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실제로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일에만 빠져있다 보니 오랜만에 보는 것 처럼 느껴졌다. 등용운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응? 오늘 저녁에 온다고 했잖아?"
"아."
그러고보니 몇일 전에 그런 약속을 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미안해. 요즘 하도 정신이 없어서…."
"괜찮은 거야? 좀 야윈것 같은데… 꼭 이 녀석 처럼 말이야."
"무슨 소리냐?"
게일은 자신을 가리키는 등용의 손짓을 기분나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잘생긴 편이기는 했지만 아무리봐도 건강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밝은 불빛아래에서 본 피부는 비정상적으로 창백하고 윤기가 없으며 눈 밑에는 검은 기미 같은 것도 있었다. 혈색도 안 좋고 살집도 없었다. 어쨋건 그도 언데드니까 어쩔수 없는 일이다. 뱀파이어가 마치 살아있는 것 처럼 위장하기 위해서는 피의 힘을 약간 소모해야 하는데 그 같은 햇병아리 뱀파이어에게는 그 얼마 안되는 피도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저기 대체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라비스 씨가 그런 일을 당하다니. 아 참, 조문이 늦어진 것도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엘프들은 뱀파이어를 싫어한다고 해서…."
"괜찮아. 우리 엄마는 너 꽤 마음에 들어하셧으니까."
"아니. 요 근래에 들어서 이 근처에 다른 엘프들이 많이 드나든다고 해서 말이야."
"아. 그렇지. 참…."
라비스의 장례식은 열리지 않았지만 그 동안 일레인의 집에는 조문하기 위한 엘프들이 줄을 이어서 들어왔다. 대부분 라비스의 친척이나 옛 친구들로서 일레인은 잘 알지도 못하는 엘프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상당한 고위층으로 보이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녀는 역시 알지못했다. 하지만 일단은 예의바른 그들의 태도 밑바닥에는 하프엘프에 대한 묘한 편견과 경멸, 동정이 깔려있는 것이 느껴져서 올때마다 불쾌함 때문에 고생했었다.
그렇게 오래 산 엘프들은 뱀파이어가 몬스터로 여겨질 때부터 살아와서 뱀파이어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게일은 자신이 이곳에 드나들면 일레인이나 라비스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미칠까봐 일부러 얼마간 접근을 삼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신경써줄 필요는 없는데. 난 어차피 엘프들한테는 내가 어떻게 보이던지 말던지 관심없으니까."
"그럼 다행이군."
그는 일레인이 조금은 안정을 찾은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뱀파이어 13인 회의는 뱀파이어 종족만의 자치 기관이었다. 그러나 물론 단지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다. 실질적으로는 도시 전체가 13인 회의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은 노골적으로 인간을 지배하여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인간들 중에는 자신이 다른 무언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싫어하는 자들도 있으니까. 도시의 권력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있었다. 입법은 의회가, 행정은 정부가, 재판은 법원이 한다. 13인 회의는 어느 종족이나 가지고 있는 종족 자치 기관일 뿐이고, 도시 운영에는 아무런 실권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13인 회의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었다. 많은 수의 의원, 관료, 법관들은 불사의 미끼에 걸려서 뱀파이어가 하라는 대로 하고 있었고, 기업들은 막강한 자금력을 지닌 뱀파이어에게 교묘한 지배를 받고 있다. 그외에도 여러 가지 음모를 꾸며 뱀파이어들은 이 풍요로운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끝없이 계속하고 있었다.
"혈족 여러분. 저는 최근 치안 조직에 큰 결함이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에릭은 회의에 출석한 백여명의 엘더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연단에 올라있는 그는 다른 엘더들을 능가하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엘더들은 에릭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수없는 표정으로 모든 "참석자들"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앉아있는 13인의 의원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얼마전에 발생한 테러 사건. 이것을 단순한 사고라고 봐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현재 지배 시스템의 결함이 외부로 노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의있소."
그때 레즈닉 백작이라 하는 엘더가 이의를 제기하며 일어섯다. 에릭 보다 오래된 뱀파이어인 그는 자기보다 어린 자가 나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 발언은 13인 회의에 대한 모욕이요. 현재 지배 체계를 쌓아올린 것은 이 자리에 게신 여러 의원 분들이 아닌가?"
회의장은 일순간에 무거운 침묵에 휩쌓였다. 좀 억지에 가까웠지만 확실히 그렇게 해석될 여지도 없지는 않았다. 만일 의원들이 정말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누가 감히 의원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저 터무니 없이 강력한 괴물들을…. 에릭은 의연하게 그에 반박했다.
"이 자리의 의의는 무엇인가? 의원 분들이 혈족의 지혜를 모으기 위해서가 아닌가? 모함으로 발언을 가로막는 쪽이 더욱 회의를 모욕하는 것이 아닌가?"
"무어라!"
레즈닉은 버럭 화를 냈다.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에릭에게 동조하는 듯한 흐름이 얼음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레즈닉의 발언은 의원들의 위세를 빌려서 에릭의 의견을 꺽으려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원들은 에릭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의에 신경쓰지 말고 발언을 계속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레즈닉은 큰 망신을 당하고 말았지만 의원들의 뜻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치안 시스템의 허술함.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무리의 미치광이 테러리스트들이 이 회의장에 네이팜 탄을 들고 찾아올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대체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 때문입니다!"
에릭은 격열하게 웅변을 토해냈다.
"하나부터 열가지 다 인간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뒤에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 인간들의 능력을 보십시요. 한심하지 않습니까? 인간이란 본래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존재입니다. 저런 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고 뒤에 물러나 있을수 있습니까?"
엘더 뱀파이어들은 모두 수긍하는 눈치였다. 젊은이들이라면 인간 비하적인 이 발언에 약간이나마 반발심을 가졌겠지만 엘더들 중에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뱀파이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뱀파이어로서의 자아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제 간접적인 지배만으로는 한계에 달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뱀파이어가 전면적으로 지배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보다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은 이전 그 어느 시대보다도 강력해졌습니다. 더 이상 이면에서 지배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보다 새롭고! 보다 강력한! 그리고 보다 완벽한! 그러한 지배체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의원님들?"
에릭은 몸을 한바퀴 빙 돌려 13인의 의원들을 마주보았다. 타오르는 듯히 정열적인 에릭과 시체들을 앉혀놓은 것 처럼 냉담하기 그지없는 의원들은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의원들 중 한명이 그에 답하듯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엘이었다.
"젊은 혈족이여. 그대는 무엇으로 자신이 옳음을 증명할 것인가?"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문했다.
"지금 이 상황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혈족들은 누가 그들의 집에 불을 지르러 올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정중한 말투였으나 그 어조는 거의 따지는 듯이 과격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의원들은 여전히 어떤 감정변화도 나타내지 않았다. 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포는 지혜를 흐리게 한다. 용기는 지혜를 맑게 한다. 용기로 공포를 쫓고 혜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니 지혜니 하는 고루한 격언이 아닙니다! 보다 확실한 안전 보장 대책입니다! 저는 회의에 출석하기 전에 8천명의 혈족에게 제 주장에 동의한다는 피의 서명을 받아왔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제출해 드릴수도 있습니다."
8천명씩이나! 그 자리의 엘더들은 모두 놀랐다. 그 만한 숫자가 에릭에게 동조하고 있다면 이건 만만치 않은 문제였다. 피로 서명한다는 것은 단순한 서명보다 훨씬 무거운 의미를 지닌다. 이 만한 숫자의 피의 서명을 모았다는 것은 그의 정치력이 그 만큼 막강해졌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의원들을 움직이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에릭 폰 뤼베르하트, 가장 올바른 길을 가는 자는 가장 입이 많은 자가 아니라 가장 현명한 자다. 너는 8천의 이름이 아니라 8천의 지혜를 빌려와야 했다."
"그렇군요…. 좋습니다."
에릭은 분하다는 듯이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대답했다. 레즈닉 백작은 자신이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자의 그런 모습을 고소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릭은 그 따위에는 안중도 없다는 듯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되물었다.
"그렇다면 저의 통찰이 옳았다는 증거가 더 나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는 너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보마."
"알겠습니다. 제 발언은 이걸로 끝입니다."
에릭은 연단에서 내려왔고, 다음 발언자가 올라갔다. 모두들 그가 크게 실망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그 역시 수백년을 살아온 엘더 뱀파이어. 살아있는 것 처럼 강하게 타오르는 정열 안에는 잿속의 불씨처럼 질긴 인내심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에는 안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기다린다. 하지만 기다림이 길지는 않을 것이다….'
뱀파이어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어 있었다. 숫자는 꾸준히 늘어가지만 죽는 자는 거의 없게 되었다. 오래된 자들은 거의 영원토록 높은 자리에 앉아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야망을 가진 자가 권력을 얻는 것은 쉽지 않게 되었다. 보다 높은 지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만한 모험을 해야 한다.
Igne Natura Renovatur Integ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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