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모든 일에 완벽한 합리성을 추구하던 제이슨. 현재 그는 거의 아사 직전에 있다.

이미 먹을 건 다 떨어진 상태였고, 음식을 사러 가긴 가야겠는데

하필 자기 집에서 정확히 똑같은 거리에 두 개의 똑같은 슈퍼마켓이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데, 다른 한 쪽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마침내 배고픔이 극한에 달했을 때, 그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만히 앉아 있느니, 차라리 동전을 던져서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잠깐, 하지만 이는 비합리적인 방법이 아닌가?

그렇다면,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단 말인가?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그의 뇌는 적절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

이러한 딜레마는 언어의 부적절한 사용으로 인해 발생한다.

사실, 동전 던지기는 합리적인 것도 아니고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합리성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우리 행동의 대다수가 이런 식으로 합리적이지 않은데, 예를 들자면

짜장보다 카레를 더 좋아하는 경우다.

이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기호는 이성이 아니라 취향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인정하면 역설은 사라진다.

즉, 때로는 합리적이지 않은 방법을 선택하는 편이 합리적인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성은 어느 슈퍼마켓에 가야 할지 가르쳐 줄 수 없지만,

어쨌든 간에 한 군데는 가야 하므로, 임의로 선택하는 것이 완벽하게 합리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일들이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합리성이 실제보다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의 중요성이

감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합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절차를 어떤 상황에서

사용해야 되는지를 알려주는 일은 오직 이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질병을 한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비록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성은 한약의 사용을 권장할 것이다.

그러나 동종요법(화상을 입은 부위에 뜨거운 찜질을 한다는지)의 경우에는

그것의 효능을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므로, 이성은 우리에게 경고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고 해서

곧바로 비합리성으로 빠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