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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페크 형제는 인공적인 인간형 존재, 로봇을 노동자로 규명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체코의 SF 작가는 카렐 차페크일 겁니다. 그리고 흔히 로봇의 원조로 손꼽히는 사람도 차페크죠. 정확히 말하면, 카렐의 형인 요제프가 <로섬의 만능 로봇>에서 처음 쓴 단어이고, 덕분에 SF 작품에서 과학계로 퍼진 용어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로봇의 원조라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로봇은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기계이기 때문입니다. 공장에서 나사를 박는 금속 팔부터 뒤뚱뒤뚱 걷는 견마형 보행 장치를 거쳐 덩실덩실 춤을 추는 인간형까지 로봇의 범주는 꽤나 넓습니다. 크기가 건물만하고 괴수를 때려잡는 슈퍼 로봇까지 꼽는다면, 의미는 더욱 넓어집니다. 하지만 차페크가 쓴 작품에 나오는 로봇은 저런 것과 다소 거리가 멉니다. 차라리 인공적으로 탄생한 인간형 존재라고 해야 할 겁니다. 여러 용어들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인조인간이라는 용어가 제일 어울릴 것 같습니다. 공장의 자동 기계 팔이든, 괴수를 때려잡는 슈퍼 로봇이든, 차페크의 로봇과는 많이 다릅니다.


사실 인간이 자신과 닮은 뭔가를 만든다는 개념은 고대부터 내려왔습니다. 따지고 보면, 저 위대하다는 신조차 우리가 만든 인간형 존재에 불과하죠. 그리스 신화의 신이나 기독교의 신은 인간형 존재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죠. 또한 이럴 때 뻔질나게 등장하는 사례가 피그말리온과 골렘과 탈로스의 강철 거인 같은 것들이죠. 아마 이런 설화나 전설이 없는 곳은 드물 것 같습니다. 이것들은 인간을 닮았고, 인간을 위해 행동하지만, 인간이 아닙니다. 이런 개념은 시간이 흘러 마법과 주술의 껍데기를 벗습니다. 점차 과학 기술의 혜택을 받고, 그래서 근대에는 오토마톤, 그러니까 자동 인형이 탄생합니다. 금속 인형인데, 톱니바퀴로 돌아가는 등 스팀펑크 분위기가 물씬 풍기죠. 비록 주술이 아니라 과학으로 탄생했지만, 여하튼 인간처럼 생겼고 하인 역할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영국에서 메리 셸리가 드디어 <프랑켄슈타인>을 씁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자기 피조물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자세히 나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골렘이나 자동 인형과는 전혀 다를 겁니다. 기계가 아니라 인공 생명체에 가까우니까요.


오죽하면 이 인조인간은 가정을 꾸릴 수 있게 여성을 만든다는 계획까지 세웁니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골렘이나 자동 인형과 달리 하인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본인이 그걸 거부했고, 인간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죠. 아버지뻘 되는 입장이라면 모를까. <프랑켄슈타인>과 비슷한 소재를 이용한 작품 중 또 유명한 것이 <미래의 이브>입니다. 오퀴스트 드 릴아당이 썼죠. 여기에서는 에디슨(그 에디슨이 모델인 인물)이 나와서 전기 장치의 힘으로 인조인간을 만듭니다. 역시 자동 인형 같은 고철덩어리는 아닙니다. 엄연히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그저 거기에 영혼을 불어넣는 일을 인공적으로 작업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이브는 사람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만, 이걸 하인으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에디슨이 지시한대로 행동하니까 하인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노동자는 아니거든요. 우리가 금방 떠올릴 수 있는 하인이나 노예와는 사뭇 달라요. 이렇듯 차페크가 로봇을 고안하기 이전에도 인조인간이나 그와 비슷한 것들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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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조인간 설정은 일찍이 존재했으나,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었죠.]


차페크가 <로섬의 만능 로봇>을 쓰기 이전에도 주술로 움직이는 골렘도 있었고, 가내 수공업 인조인간도 있었죠. 인조인간이란 개념만 보자면, 차페크는 원조가 아닙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인조인간, <미래의 이브>에서 에디슨이 만든 이브, <로섬의 만능 로봇>에서 등장한 로봇은 모두 비슷한 존재들입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죠. 하지만 <로섬의 만능 로봇>에서 나온 인조인간은 다른 두 존재와 좀 다릅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을 노동자로써 부리지 않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애초에 노동자를 부릴 목적이 없었습니다. <미래의 이브>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디슨이 인조인간을 만든 까닭은 사랑에 빠진 귀족 친구의 상심을 달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맞춤 아내(?)라고 할 수 있겠죠. 19세기부터 이런 발상이 나왔다니, 그 시대 사람들도 별별 생각을 다 했나 봅니다. <로섬의 만능 로봇>에서 로봇들의 역할은 저들과 많이 다릅니다. 이 로봇들은 노동자입니다. 공장에서 인간을 위해 묵묵히 일하죠. 애초에 로봇의 어원이 뭐겠습니까. '노동'입니다. 로봇은 노동자이고, 이게 차페크 소설의 특징 중 하나죠.


사실 카렐 차페크를 원조라고 부르는 까닭은 로봇의 역할 때문일 겁니다. <프랑켄슈타인>이나 <미래의 이브>와 달리 <로섬의 만능 로봇>에 나오는 인조인간은 노동자입니다. 좀 더 따지면, 명백한 하인이자 노예입니다. 마침내 로봇은 혁명을 일으키고 인간을 몰아내고 기득권을 차지합니다. 역사 속의 노예와 농민과 시민과 노동자들이 주인과 지주와 왕과 자본가를 몰아낸 것처럼요. 바로 이 부분이 차페크가 셸리나 릴아당과 다른 점일 겁니다. 인조인간을 노동자로 취급하고, 인간을 위해 일하도록 시켰죠.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나 미래의 이브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좀 더 부연 설명한다면, 차페크는 다른 작품에서도 지성 종족을 노예로 부리는 설정을 활용했죠. <도롱뇽과의 전쟁>에 나오는 도롱뇽들의 입장은 로봇이랑 비슷합니다. 인간이 직접 만들었느냐 혹은 바닷속에서 스스로 번성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도롱뇽들도 인간을 위해 일했으나 자립성을 깨닫고 혁명을 일으키니까요. 저는 차페크의 작품 세계를 잘 모르지만, 차페크가 이런 데에 관심이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로봇의 개념도 노동자에 가까울 겁니다. 노동자, 하인, 노예. 우리 대신 일을 해주는 존재입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로봇들도 없지 않으나, 노동자로서의 로봇이 패러다임을 지배하죠. 그 로봇이 기계 팔이든, 무인기든, 인간형 존재이든, 로봇은 우리 대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건 단순한 패러다임이 아니라 현실에서 점차 벌어지는 현상이죠. 이전에도 기계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쫓겨났고, 지금은 그런 현상이 훨씬 커졌으니까요. 인공지능까지 고려한다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닉 보스트롬 같은 인공지능 철학자는 그런 사태를 경고하죠. 레이커즈 와일의 특이점까지 고려한다면, 이건 가히 신세계가 열릴 지경이고요. 솔직히 지금 상태에서 로봇과 인공지능의 미래가 어떻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명망 있는 지식인들은 그야말로 신세계를 예측하지만, 반드시 그들의 말이 옳다고 단정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귀를 기울일 가치가 있고, 그런 미래가 어떻게 돌아갈지 상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꽤나 많은 일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은 그만큼 할 일이 없어지는 시대…. 음, 좀 상투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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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철학자들은 인공지능 로봇과 노동의 관계를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상투적이라고 해도 저런 시대가 온다면, 인간 노동자들은 꽤나 암담해지겠죠. 어차피 강대국들의 인구 증가는 점차 멈출 테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인간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인간들은 임금 노동자가 되길 원할 테지만, 기계가 임금 노동자의 자리를 차지할 테고요. 개발 도상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상용화 가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게 인력을 대체할 정도로 생산력이 뛰어나다면, 개발 도상국의 기업들도 로봇을 사용하려고 애쓰겠죠. 지금은 다국적 기업이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개발 도상국으로 이전하지만, 나중에는 상황이 변할지 모르죠. 아니, 그렇다면 다국적 기업이 굳이 해외로 이전할 이유가 없군요. 어차피 기계를 사용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값산 노동력 착취를 위해 해외로 나가지 않겠네요. 만약 기업이 개발 도상국에 간다면, 원자재 수송이나 토지 세금이나 정경유착이나 뭐, 그런 이유 때문이겠죠. 앞으로 값싼 노동력이 착취를 당할 일이 줄어들 수 있지만, 그건 인간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때문이 아니겠죠.


이건 너무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유형이고, 저런 상황이 당장 닥칠 리 없습니다. 하지만 고용 없는 성장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현실적입니다. 그런 목소리가 미래에 더욱 커질 수 있겠죠. 게다가 이런 우려는 좌파들의 사상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사회주의자나 생태주의자의 주장들 말입니다. 시민에게 기본적인 배당을 지급해야 한다거나, 사용 유무에 상관없이 가치에 따른 토지 세금을 매긴다거나, 약자 돌보미과 환경 미화 같은 업무의 위상을 높이다거나 기타 등등. 아예 노동자들이 기계를 장악해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올지 모르겠군요. 좌파의 사상이 중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런 좌파적 개념에 눈을 돌릴 만큼, 뭔가 현실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뀐 이유는 기계가 노동자로서 임금 노동자를 내쭃기 때문이고요. 이런 현실 때문에 <로섬의 만능 로봇>이 그렇게 유명할 겁니다. 작품 자체도 훌륭하지만, <로섬의 만능 로봇>은 우리에게 로봇이 노동자라는 인식을 심어줬죠. 메리 셸리의 소설이나 오퀴스트 드 릴아당의 소설과 다르죠. 뭐, 어차피 카렐 차페크는 20세기 작가이고 셸리와 릴아당은 19세기 작가니까 다를 수 밖에 없겠죠.


요약하자면, 차페크는 로봇의 원조라기보다… 로봇을 노동자로 보는 시각의 원조라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똑같은 소재라고 해도 그걸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원조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거죠. 차페크가 메리 셸리나 오귀스트 드 릴아당을 표절했다고 따지는 사람은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