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저 2만리>의 노틸러스는 스팀펑크 장르의 대표적인 오버 테크놀러지입니다. 그렇다 보니, 다른 매체에 나올 때마다 성능이 기하급수적으로 업그레이드하곤 합니다. 이는 만화 <젠틀맨 리그>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는 웬 초거대 오징어 잠수함이 등장했죠. 그야말로 19세기 기술로는 꿈도 못 꿀, 아니, 21세기 기술로도 함부로 만들기 어려운 물건입니다. 만화를 영상화한 실사영화도 다르지 않습니다. 시미터처럼 생긴 노틸러스는 아예 유도 미사일까지 발사합니다. 아니, 2차 대전 함선들도 제대로 쏘지 않았던 미사일을 19세기 잠수함이 멀쩡히 날리는 걸 보면 참…. (만화에서는 그냥 함포 사격만 하더군요.) 그걸 보니까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왜 소설 속의 노틸러스는 어뢰를 쏘지 않을까요. 작중 노틸러스의 주요 무기는 뱃전에 달린 충각입니다. 이걸로 숱한 배를 들이받아서 침몰시켰습니다. 그런데 충각 공격은 아군의 피해 역시 감수하는 전술입니다. 아군 함선과 상대 함선이 서로 부딪히니까, 피해자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소설에서도 노틸러스 승무원이 사망했습니다. 적국(아마 영국) 함선에게 들이받을 때, 노틸러스가 충격을 받아서 승무원이 사망했죠. 노틸러스가 여러 함선들을 수장시켰으니, 그 와중에 죽은 승무원도 적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무덤 자리까지 정했죠.) 어뢰를 쐈다면, 훨씬 안전하고 유리하게 싸울 수 있었을 겁니다. 들이받을 필요도 없고, 그냥 멀찍이서 조준하고 쏘면 되니까요. 다만, 노틸러스가 어뢰를 쏘려면 여러 문제점이 생기는데… 우선 작가인 쥘 베른이 어뢰를 얼마나 자세히 알았을지가 관건이네요. 19세기 중반까지 어뢰는 그냥 수중 폭탄이었습니다. 1870년대 즈음에 현대적인 어뢰라고 할만한 물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각국 해군에서 본격적으로 어뢰를 무장하기 시작했고요. 그런데 <해저 2만리>의 출판 시기가 1870년입니다. 즉, 쥘 베른이 이 소설을 쓸 당시에 어뢰는 아직 널리 쓰이는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확신할 수 없지만, 어쩌면 베른은 어뢰가 어떤 무기일지 제대로 몰랐을 수 있습니다. 작중에서 노틸러스를 추격하는 해군 함선들도 그냥 포탄을 쐈죠. 어뢰를 발사하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잠수함임을 알면서도 함포 사격만 했습니다.


게다가 어뢰라는 물건은 신뢰가 꽤 낮았습니다. 단순하게 쏘면 날아가는 함포와 달리 어뢰는 꽤나 복잡한 물건이었죠. 수중을 이동하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고, 불발하기 일쑤였고, 제대로 터지지 않으면 용골을 깨뜨리지 못하고 등등. 2차 대전까지도 어뢰가 불안정했으니, 이걸 19세기 작가가 설정으로 차용하기는 무리였을 겁니다. 더군다나 어뢰는 소모품입니다. 한 번 쏘면 다시 보충할 방법이 없으며, 기항해서 다시 채우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노틸러스는 딱히 기항지가 없습니다. 세계 바다를 누비지만, 어뢰처럼 정교한 물건을 보급할 장소가 없습니다. 승무원들이 물과 식량을 자주 보충하지만, 식량과 어뢰는 차원이 다르죠. 그나마 어딘가의 화산섬에 들려서 석탄을 보급하지만, 여기에 어뢰를 생산할 설비와 인력이 없어요. 애초에 노틸러스는 활동 반경이 커서 화산섬 기항지에 자주 들리지 않으며, 유보트마냥 적국 선박만 졸졸 쫓아다니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네모 선장은 어뢰 생산 공장도 없고, 그걸 보관할 기항도 없고, 노틸러스도 자주 기항지에 들리지 않습니다. 어뢰를 쏘고 싶어도 보급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또한 노틸러스는 사실상 승무원들의 유일한 주거지입니다. 네모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은 일상을 대부분 잠수함 안에서 해결합니다. 그들은 육지에 절대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잠수함에서 살든가, 잠수복을 입은 채 바닷속을 누비거나 합니다. 자연히 노틸러스 안은 비좁을 테고, 수 십 발의 어뢰를 따로 실을 공간이 부족할 겁니다. 무기고를 만들고, 거기에 어뢰를 적재하는 것도 가능하겠습니다만. 그럴 바에야 선실이나 식량 창고로 쓰는 게 나을 겁니다. 노틸러스는 군용이 아니니까요. 전투를 위해서 생활 공간을 축소할 수 없으니까요. 뭐, 만화와 영화에 나왔던 것만큼 노틸러스가 초거대 잠수함이라면 모를까, 소설에서는 100m 남짓한 물건입니다. 물론 10발 이하로 적재하면 공간을 아낄 수 있지만, 세계 바다를 누비는 잠수함의 어뢰 적재량이 고작 10발…. 아마 영국 함대를 발견해도 자주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단점이 크니까 어뢰를 쏘는 것보다 차라리 충각을 이용하는 게 나을 수 있습니다. 노틸러스는 유보트처럼 무조건 전투 위주가 아니라 탐험을 어느 정도 겸비한 장비니까요.


게다가 쥘 베른이 노틸러스에 어뢰를 집어넣었다면, 과연 독자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독자들은 어뢰를 얼만큼 이해할까요. 위에서 이미 말했다시피 현대적인 어뢰는 1870년대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해저 2만리>도 그때 서점에 나왔죠. 따라서 19세기 독자들은 어뢰가 뭔지 제대로 몰랐을 수 있습니다. 당시의 함대전은 함선들이 수면에서 함포를 날리는 과정이었죠. 잠수함이 은밀하게 어뢰를 쏘는 모양새가 아니었습니다. 노틸러스는 안 그래도 오버 테크놀로지 장비인데, 어뢰는 더욱 황당하게 보일 수 있죠. 물론 19세기 독자들은 소설 속의 만능 잠수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어뢰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지 모릅니다. 어차피 네모 선장의 기술력은 당시의 평균적인 기술력을 뛰어넘었잖아요. 만능 잠수함도 만들었는데, 어뢰라고 못 만들겠습니까. 어쩌면 어뢰를 보조 무장으로 설정해도 괜찮을 겁니다. 노틸러스가 영국 함선을 발견하면, 일단 어뢰를 쏴서 어느 정도 무력화시킵니다. 그리고 주 무장인 충각으로 들이받는 겁니다. 이러면 노틸러스도 망가질 위험이 줄어들고, 승무원들도 충격 때문에 사망하지 않을 겁니다.


밀리터리 지식도 모르면서 어뢰 이야기하려니까 힘드네요. 가끔 실사 영화 같은 2차 매체에서 노틸러스가 충각으로 들이받지 말고, 어뢰를 쏘면 어떨까 싶은데…. 19세기 잠수함이 어뢰를 뻥뻥 쏘고 다니면, 스팀펑크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질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잠수함과 어뢰 모양을 좀 더 고전적으로 만드는 방법도 있을 테고요. 어뢰란 물건이 워낙 단순하게 생겨먹었긴 합니다만. 브라이언 싱어가 <해저 2만리> 영화를 만든다고 하던데, 노틸러스가 유럽 함선들을 어떻게 공격할지 모르겠네요. 또 충각 돌진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