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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표지 그림. 행성 개척·건설의 로망이 물씬 풍기지 않습니까.]
예전에 소설 <붉은 화성>이 샌드 박스 게임 같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붉은 화성>은 100여 명의 개척자들이 지구에서 출발해 화성에 도착한 후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내용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맨손으로, 맨땅에서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문자 그대로 맨손, 맨땅은 아니죠. 개척자들은 최첨단 장비를 갖추었으니까요. 하지만 험악한 환경에서 거주지를 건설하고, 농사를 짓고, 환경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기는 애초에 인류의 터전도 아닙니다. 화성이잖아요. 지구의 극한 지대에서 번성하기도 쉽지 않은 마당에 외계 행성에서 어떻게 터전을 키우겠어요. 그럼에도 개척자들은 꾸준히 거주지를 확장하고, 결국 사람답게 살 만한 환경을 조성하고, 급기야 대도시가 화성 위에 떡하니 생깁니다. 이런 과정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모래밭에 모래성을 쌓는 것과 비슷하죠. 비디오 게임의 샌드 박스 장르도 마찬가지입니다. 샌드 박스 게임은 이름처럼 빈 터에 뭔가를 짓고 운영하죠. 가게, 공원, 마을, 도시, 국가, 심지어 여러 행성들까지.
만약 어떤 게임 제작진이 <붉은 화성>을 게임으로 만든다면, 저는 샌드 박스 장르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사례를 찾자면…. 일단 <플래닛 베이스>가 그럴 듯하겠습니다. 그야말로 붉은 사막 행성에 인류 거주지를 짓는 게임이죠. 초기에는 소수의 기술자, 일꾼, 과학자 등으로 시작하고, 거주지도 우주 강하선이 고작입니다. 그러나 점차 자원을 모으고, 거주지를 넓히고, 기술도 개발하고, 인구를 늘리고, 온전한 도시 하나가 등장합니다. <플래닛 베이스>의 배경 행성은 기본적으로 붉은 사막 행성이고, 그 외에 얼음 행성, 가스 행성, 폭풍 행성 등이 추가로 존재합니다. 붉은 사막 행성에서 거주지를 지으면, 정말이지 <붉은 화성>을 직접 게임으로 체감하는 듯한 느낌도 들겠죠. 그렇게 깊이 있는 게임이 아니라서 단순한 구석도 있지만, 분위기, 설정, 배경, 주제 등은 비슷하니까요. 어차피 거주지를 건설하는 SF 샌드 박스 게임들은 많고 많습니다. <플래닛 베이스>가 간단하게 보인다면, <아노 2070> 같은 게임도 있어요. 이 게임의 배경은 지구지만, 환경 파괴 덕분에 난리법석이 났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건물을 지을 수 없죠.
<붉은 화성>의 재미는 비단 건설 과정만이 아닙니다. 정치 문제도 빼놓을 수 없죠. 그 놈의 지긋지긋한 정치는 지구만 아니라 외계 행성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긴 인간이 다른 종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정치 문제는 언제까지나 우리를 따라다닐 겁니다. 그래서 소설 작가 킴 로빈슨은 과학자들도 정치를 멀리하지 말고, 중립에서 탈피한 후 사회 체계 개선에 힘쓰라고 권유합니다. 여하튼 <플래닛 베이스>나 <아노 2070> 같은 게임에 정치 요소를 덧붙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소위 4X 게임들처럼요.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나 <엔들리스 스페이스>, <비욘드 어스>, <스텔라리스> 같은 게임에는 여러 정치 형태가 나오고, 플레이어가 이를 실행할 수 있습니다. <붉은 화성> 게임이 나온다면, 플레이어도 각종 사회 체계를 고를 수 있고 그걸 실험할 수 있어야 하겠죠. 소설은 은근슬쩍 (아니, 대놓고) 사회주의 혹은 무정부주의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물론 그걸 이루기가 쉽지 않고, 암투 속에 끝내 파멸하고 맙니다. 어쨌든 소설에서 못 이룬 꿈을 게임으로 이루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게 바로 게임의 재미 아닙니까. 자기 입맛대로 운영할 수 있어요.
[그야말로 붉은 사막 행성에서 인류 정착지 건설입니다. 하여간 화성은 약방의 감초인 듯.]
참고로 소설에는 웬 러시아 과학자가 나오는데, 이 양반은 러시아 혁명을 지지합니다. 이쯤 되면, 이 인물의 성향을 확실히 알 수 있겠죠. 그렇다고 레닌의 통제나 스탈린의 학살까지 지지하지 않습니다. 저 과학자는 비록 볼셰비키 정당은 실패했고 독재로 변했지만, 러시아 혁명의 정수라고 할까요. 그런 유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날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보자는 뜻이죠. '비록 혁명은 실패했지만, 혁명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사고 방식인데, 이게 소설가 킴 로빈슨 본인의 생각인지 잘 모르겠군요. 이런 생각은 예브게니 자마친 같은 작가도 주장합니다. <우리들>을 보면, 혁명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우리들>은 스탈린 체제를 비판하는 소설이죠. 자마친은 볼셰비키 당원이었지만, 러시아 혁명이 독재로 변모하자 크게 실망했나 봅니다. 그래도 혁명의 꿈은 접지 않은 듯해요. 사실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의 지적은 근본적으로 틀리지 않았으니까요. 자본주의 팽창과 모순은 지금도 극렬합니다.
신나게 발전만 하거나 사회 건설에만 힘쓰다 보면, 주변 환경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생태계 유지 또한 중요한 변수입니다. 실제로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생태계를 바꿀 것이냐, 생태계를 바꿔도 좋은가, 환경 재난이 닥치지 않는가 등을 논의합니다. 어떤 과학자는 인류가 화성 환경을 바꾸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화성은 지구만큼 나이를 먹었고, 고유의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류는 그 환경에 살 수 없지만, 몇 십 억 년의 가치를 무너뜨리면 안 된다고 주장해요. 그러나 이 과학자의 주장은 먹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류의 터전을 확장하기 원하고, 지구는 유한합니다. 인류의 터전이 넓어지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행성을 개척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 외계 행성의 40억 년짜리 환경이 변하는 거야…. 어쩔 수 없죠. 화성의 고유한 환경을 인정한다고 해도 인류의 번영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이는 지구 생태계 보존과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인류는 애초에 지구의 자손 중 하나지만, 화성은 아니니까요. 인류는 화성에서 외계인이니까요.
결국 개척자들은 테라포밍을 시작하고, 화성의 환경은 크게 바뀝니다. 그리고 결국…. 음, 내용 누설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 없군요. 여하튼 이 소설은 낯선 행성 개척과 정치 문제만 아니라 생태계 변화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룹니다. 생태 SF 장르에 들어가도 좋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붉은 화성>을 게임으로 만든다면, 생태계 시뮬레이션 역시 포함하는 게 좋겠죠. 밑그림이 될 만한 게임으로는…. 흠, <이매진 어스>가 어떨까 싶습니다. 역시 장르는 샌드 박스, 건설 및 경영입니다. 플레이어는 우주 개척 회사의 직원이고, 새로운 행성에 인류 거주지를 짓습니다. 그리고 거주지는 대도시로 발전하고, 산업 분야는 계속 팽창하죠. 이런 부분은 여타 SF 샌드 박스 게임과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기후 변화입니다. 게임에 아예 행성 온도 수치가 존재하고, 모든 건설 및 산업 활동, 사막화는 온도 수치를 낮추거나 올립니다. 온도가 일정 이상 올라가면, 극지의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문명은 망했어요~ 상태가 됩니다. 무분별한 팽창은 위험하죠.
[이상 기후, 사막화, 해수면 상승 등을 구현하기 위한 게임이라고 하더군요.]
따라서 플레이어는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문명 확장을 위해 발전 속도를 늘릴 것이냐, 아니면 환경 재난을 피하기 위해 개발 속도를 늦출 것이냐. <이매진 어스>는 인디 게임이고 아직 초기 테스트 중입니다. 그래서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제작진이 원하는 모든 요소를 구현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결과물이 나와도 대작 타이틀 수준의 깊이를 보여주지 못하겠죠. 인디 게임 제작진의 한계가 그러니까요. 하지만 게임 컨셉은 꽤 그럴 듯하고, 만약 <붉은 화성>을 게임으로 만든다면, 이런 컨셉을 적용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어지간한 4X 게임이나 샌드 박스 게임들은 환경 변화 요소를 포함합니다. 위생 상태가 나쁘면 시민들이 반발한다거나 행복 수치가 떨어진다거나 그런 식이죠. 하지만 그런 환경 변화 요소는 <이매진 어스>에서 게임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게임의 주된 목표이고 주제입니다. 아예 각 행성마다 큼지막한 극지 빙산을 자랑하며, 온도 수치가 꼬박꼬박 튀어나옵니다. 게임 제작진은 이 게임이 (여타 샌드 박스와 차별되는) 독특한 생태계 게임이 되기 바라더군요.
이렇게 본다면, <붉은 화성>이 게임으로 나오기까지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할 겁니다. 건설, 정치, 생태계. 그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구현할 수 있어야 소설의 주제를 제대로 살리는 게임이 되겠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소설을 인상적으로 읽고 어디 비슷한 게임이 있는지 찾아봤기 때문입니다. <이매진 어스> 같은 인디 테스트 게임부터 <스텔라리스> 같은 커다란 게임까지…. 하지만 저런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구비한 게임은 찾기 쉽지 않더군요. 음, 제가 게임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죠. 어차피 스팀에서 찾아봤을 뿐이니까요. 스팀은 거대 유통 시스템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SF 샌드 박스 게임이 스팀에 들어있지 않죠. 제가 게임을 잘 안다면, 그런 비슷한 게임을 금방 찾았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최근에 나왔던 샌드 박스 게임들 중에서는 건설, 정치, 생태계를 동시에 만족하는 SF 작품이 없는 듯 보입니다. 물론 세계에는 수많은 게임 제작진들이 있고, 그들은 저마다 차별화된 게임을 내세웁니다. 언젠가 <붉은 화성>의 느낌을 충실히 재현할 수 있는 게임이 나올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