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애초에 내가 환타지 세계로 차원이동을 하는 걸 크게 기대했던 건 아니다.
뭐 물론 엘프 여친이라던가 엘프 애인이라던가 엘프 아내라던가 그런 쪽은 좀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우연한 기회에 얻은 차원이동의 책을 통해 차원이동자가 되기 위한 수많은 조건들을 완수하고
마침내 내가 원하는 조건, 미형의 나긋나긋한 엘프들이 있다는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치러야 했던 댓가들과 노력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흔한 말로 내가 이 정도로 공부를 했으면 분명히 큰 인물이 되었을 거다 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그 정도로 연구했다면 노벨상 정도는 탔을 것 같다.
여튼, 나는 차원이동에 필요한 여러가지 지식과 장비를 갖고 판타지 세계로 상큼하게 이동했다.
제일 먼저 만날 것이 확실한 오크에 대한 대책부터 처음 조우할 영주민과 나눌 바디랭귀지, 단전에 기를 쌓는
비급들을 외우고 재활용 제작 가능한 무기 제작 방법부터 기초 생존술 과학 혁명과 산업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제반 지식,
원시부족과의 접촉방법 돈을 벌 수 있는 아이템과 실용격투술에서 영지경영 제왕학까지 두루 섭렵하고
말 그대로 준비된 상태로 차원이동을 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단시간에 적응해 먼치킨이 되어 나라를 경영하고 미녀들과 즐거운 삶을 보내는 것 뿐이었는데.
뭔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처음 나를 맞아준 건 싱그럽기 그지 없는 자연이었다. 지구에서는 보기 힘든 원초적인 숲.
뭔가 마나가 넘쳐흐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에서의 단전 호흡은 뭔지 모를 에너지를 내 뱃속에 채워주는 듯 했다.
열대우림도 아닌 온대기후에서의 숲은 꽤나 낯설고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뒤이어 등장한 것들은 첫 인상을 산산히 부숴놓았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에 준비해온 크로스보우를 꺼내들고 도와주려 가 보니 이게 왠 일.
오크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양쪽다 피투성이에 의복이 남루한 것이 뭔가 맥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순간 투닥거리던 그들의 시선이 내게로 날아왔고 그 순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좀비였다. 빌어먹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좀비였다.
군대에서 초코파이 먹으면서 획득한 티끌같은 신성력을 믿고 기도문을 외우며 나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
오크좀비가 인간좀비랑 뭘 하고 있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며칠간 헤멘 끝에 도착한 마을에서도
나를 맞아주는 건 좀비떼였다.
건물은 반쯤 부서져 썩어가고 있었고 농지는 황폐화 되어 있으며 성은 무너지고 있었다.
세상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온 사방 천지가 언데드였다.
뭔가 로도스도 전기를 생각하고 넘어온 차원이동이 워킹데드였을 줄이야.
살아있는 인간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처음엔 혼자서 살아남는 게 가능할 지 의문이었다.
아주 아주 아주 다행인 것은 놈들은 굶주리면 굶주릴수록 느려졌다.
그어어 소리가 들리고 포복으로 도망쳐도 놈들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숲 근처를 헤메다가 엘프 마을의 표식을 보았다. 차원이동전에 엘프어를 배워두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은 개판이지만 엘프들의 마을에 들어가 피신하며 힘을 기르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숲으로 들어가도 나를 맞아주는 엘프 전사 같은 건 없었다.
마을 중앙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좀비가 된 엘프떼였다.
아 빌어먹을 세상.
엘프 좀비를 주렁주렁 매달고 숲을 빠져나와서 한참을 도망치고 있을 때였다. 한 눈에서 수상해 뵈는 탑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는 뭔가 서치라이트 같은 게 주위를 훒고 있었다.
나는 그 쪽으로 달렸다. 문명의 흔적, 누군가 생존자가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다가오자 서치라이트가 나를 비추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잠시 나를 비추던 서치라이트가 뒤에 다가오던 엘프좀비떼를 향했다. 그리고 뭔가 폭발이 일어났다.
몇바퀴를 굴렀는지 모르겠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니 실내였다.
머리가 욱신거렸다. 손을 짚어보니 뭔가 축축한 천조각이 감겨 있었다. 피가 났던 것 같았다.
"네놈은 뭐 하는 놈이냐?"
허연 수염을 기른 런닝셔츠 차림의 노인이 내게 물었다.
"차원이동객인데요."
"참 좋을 때 찾아왔구나."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왜 이렇게 좀비가 창궐하고 있는 거에요?"
"얼마전에 대륙을 양분하고 있는 제국간에 흑마력 전쟁이 일어났지. 전쟁의 막바지에 양 제국이 갖고 있는 흑마술 저주가 세계 각지에 떨어졌다."
"핵전쟁 같은 건가 보군요."
"그리고 세상 모든 지적 생명체가 좀비화 되어버렸지."
"환타지 세상 같은 데엔 신이라든가 뭐 드래곤 같은 게 개입해서 상황 해결하지 않습니까?"
"글쎄다. 어떤 사이비 신관 말로는 신들이 고리타분한 세계에 질려서 좀비랜드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결정했다는 말도 있던데. 어쨌거나 세상을 모두 쓸어버릴 힘 같은 건 더이상 없다고 봐야 할거다. 드래곤도 좀비화 되었다는 말도 있던데. 하지만 니가 하고 싶으면 밖에 나가 좀비를 전부 쳐 죽이던가. 말리지는 않겠다. 그 전에 늙어 죽겠지만."
"여기서 어떻게 버티시는 겁니까."
"여긴 쉘터다. 흑마력 전쟁에 대비해 세상의 지식과 종자를 모아놓은 곳이지. 흑마술 저주를 막는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어서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지하엔 마력 생성기와 농장, 거주시설등이 갖춰져 있지. 먹고 사는 거라면 천년만년 가능하다."
"남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 안에도 성직자라든가 기사라든가 마법사라든가 엔지니어 현자등 남은 사람들이 십여명 있다. 그 외에 밖에도 몇몇 쉘터들이 있을 거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황궁에도 있을 거고 흑마술에 관심 많았던 귀족가문에도 쉘터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의문이야. 최근 연구에 따르면 좀비가 후손을 볼 수 있는 것 같다는 주장도 있거든. 만약 그렇다면 세상의 주도권은 언데드로 넘어갔다고 봐야겠지."
"그래도 언데드는 언데드 아닙니까. 놈들이 뭉쳐봐야 그냥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무리일 뿐일텐데요. 이 쉘터의 힘으로 그들의 수를 점차 줄여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인간이나 언데드나 그게 그거야. 생각없이 사는 거야 똑같지. 언데드도 뭉치면 윗대가리가 생길 거고 나중엔 나라도 세울 수 있을테지. 그러고 나면 언데드 용사가 쉘터를 던전 탐험하듯 쳐들어와서 보물을 훔쳐가는 일도 가능할 거야. 우리는 이제 몬스터 같은 취급을 받게 될 거라구. 여튼 여기 남게 해줄 수는 있네. 대신 자네에게 부여된 일을 해야만 하지."
나는 쉘터 관리자라고 밝힌 노인이 준 죽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이 세계는 언데드가 주류가 된 거고 적응이라는 건 언데드가 되는 것 같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환타지 세계와의 간극이 커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몇개월간 고민하던 나는 마왕을 소환하기로 했다. 쉘터의 화장실 청소를 하는 도중 틈틈히 마법을 익히며
마나와 소환진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마침내 좀비 천마리의 육신을 댓가로 마왕을 소환했다.
"나를 불러낸 것은 너냐."
"예 마왕님. 이 세상은 죽음에 찌들었습니다. 정화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다. 청소는 직접 하는 것이 순리다."
"멸망을 불러오는 마왕 아니십니까."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그 댓가는 크다. 아무도 모르는 이계의 지식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이계의 지식'을 댓가로 세상에 멸망을 가져올 마왕과 계약을 했다.
그건 게임 잡지였는데 마왕은 거기 나온 실시간 전략 게임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한 동굴에 던전을 차리더니 마졸들을 뽑아내어 자원을 캐고 마왕성으로 업그레이드하고는 마병들을 생산했다.
초반에는 마병들이 약하기 그지 없었지만 점점 무장을 올리더니 좀 더 그럴싸한 놈들이 나타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좀비들이 몰려와 금새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치열했다. 초반의 약한 좀비들과는 달리 무장상태가 양호한 기사클래스의 좀비나 마법을 사용하는 좀비들이 등장하자
전투는 더욱 더 격렬해졌다.
그 와중에 검은 빛을 내뿜는 검을 든 한 좀비가 나타나 마왕과 결전을 벌였다.
2시간에 걸친 격투끝에 마왕은 '분하다' 같은 대사를 남기고는 사라졌다.
좀비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세상에서 그냥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옳은지 아니면 좀비가 되어 좀비 워리어나 좀비킹 같은 게 되는 게
본래의 목적에 맞는 건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의 깊은 고민은 한없이 이어져 마침내 이 세상의 신을 불러냈다.
"이계의 방랑자여. 고민이 많아 보이는구나."
"신이시어. 왜 이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찬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너희는 밝은 것을 원하지만 밝기만 한 것은 바라지 않는다. 너희는 이상과는 달리 완벽하게 깨끗한 세상엔 살지 못하지. 너희의 본성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들이 염원한다면 생명을 되돌릴 수 있다는 뜻입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죽음과 어둠을 택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다. 나는 그들을 심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둘 뿐이다. 나는 관찰자이고 이해하는 자이다."
신과의 대화는 더 큰 고민을 안겨주었고 나는 고민에 열중하다가 화장실 청소를 게을리해 노인에게 등짝을 맞았다.
비록 쉘터에선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게 일이었지만 쉘터 밖에서 좀비들에겐 파괴의 화신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제 좀비들은 말도 능숙하게 하곤 했다. 아마 신에게서 주류종족으로 확실히 인정받은 탓인 것 같았다.
좀비 마을을 불태우고 울부짖는 좀비들을 학살한 뒤 달려온 좀비왕의 토벌대를 피해 도망치면서도
나의 고민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바르게 살고 있는 것일까.
세상 모든 사람이 미쳐돌아가고 있을때 나 혼자만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건 좋은 일일까.
모두를 바로잡아 세상에 정의를 가져올 수 있을까.
아니면 미친척 하고 그 광기에 어울리는 게 좋을까.
하지만 신조차 내 고민에 답을 줄 수는 없었고 나는 계속해서 묵묵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아우 이 식충아! 변기에 똥딱지 묻었잖아! 똑바로 안 닦아!"
"세제가 떨어졌어요. 변기 세정제 어디서 구해요?"
"좀비 담즙으로 닦으랬잖아. 이번에 약탈 가면서 좀비 창자 안 구해왔어?"
"아. 냄새 구린데."
"니가 닦고 난 변기냄새가 더 심해. 똑바로 좀 닦아!"
노인의 등짝 스매싱을 맞으면서 느낀 거지만 진짜로 노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미친 세상에서 더 미친 광기로 살아가는 건 결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
돌아오셨군요. 역시 명불허전입니다.